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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뭉크의 절규처럼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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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뭉크의 절규처럼 (11)
2013-12-02 조회 7961    프린트스크랩
▲ 영화 '소녀' 포스터.


 

서울병원 근처 도로는 교통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천년영세교교인들이 수십미터씩 줄을 서 한쪽 도로를 막아버린 상태였다. 병원 안은 주차장은 물론이고 잔디밭까지 교인들이 점거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발 디딜 틈 하나 없었다. 천년영세교교인들에게교주는 하느님 같은 존재였다. 그런 교주가 죽었다. 죽어도 그냥 죽은 것이 아니고 등산하다 살해를 당했으니 교인들의 눈이 뒤집히고도 남을 일이다.

흥분한 교인들은 교주를 죽인 악마를 당장 잡아오라면서 금방이라도 병원을 뒤집어엎을 기세였다. 그것을 막기 위해 동원된 경찰이 2개 중대였다. 교인들의 아우성과 통곡 속에서 병원건물로 진입하려는 교인들과 그것을 막으려는 경찰의 몸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병원은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환자를 받을 수 있겠는가. 그나마 오늘이 일요일이라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병원 측에서는 당장 교주의 시체를 가져가라고 경찰에 항의를 했다.

교인들을 뚫고 천신만고 끝에 병원건물 안으로들어온 호철의 몰골은 가관이 아니었다. 온통 땀으로 범벅인 호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아니다. 득달같이 지하 시체안치실로 뛰어내려가는 호철이다. 시체안치실 밖에서 호철을 맞은 건 민지현과 30대의 남자였다.

“쯧쯧...몰골이 말이 아니군. 무슨 전쟁이라도 치르고 온 사람 같아.

헐떡대는 호철을 본 지현이 첫마디를 건넨다.

“말도 말라고. 이건 전쟁터가 따로 없어. 죽은 사람이 교주인 모양이야. 무슨 천년...

“천년영세교입니다.

호철의 말에 지현의 옆에 서있는 남자가 말을 이었다.호철은 남자를 보았다. 여자처럼 갸름한 얼굴인 30대 남자는 세련된 양복차림이었다. 이 더운 여름에 양복차림이라니, 도대체 어떤 놈인가 싶다. 그 궁금증을 지현이 즉시 풀어준다.

“아, 인사해. 이쪽은 은평경찰서의 김형사. 이쪽은 노원경찰서 강력반 강호철 형사야.

“처음 뵙겠습니다. 김태호입니다.

남자가 호철에게 손을 내밀었다. 호철이 그 손을 잡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강호철입니다.

남자와 달리 호철의 목소리는 무뚝뚝하기 짝이 없었다. 원래도 그리 살갑지 않은 호철이지만 지금은 더욱 무뚝뚝했다. 그렇게 말한 호철도 자신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악수가 끝나자 지현이 말을 이었다.

“우리 공조수사 말이야. 연쇄살인사건, 그거 비공식적인 거잖아. 아직 연쇄살인사건이라는 결정적인 단서도 없고 말이야. 근데 사실 얼마전에 태호한테 말을 했었거든.

30대 남자의 이름을 스스럼없이 말하는 지현이다. 호철에게는 그것이 귀에 거슬렸다. 지현의 말을 남자가 이었다.

“술 한잔 하다가 우연히 나온 겁니다. 경찰끼리 술마시면 하는 얘기가 다 그렇잖아요. 뭐 사건얘기가 전부죠. 딱히 사적으로 할 얘기도 없고. 암튼 그때 지현이가 말했을 때는 솔직히 긴가민가했어요.

남자도 지현이라는 호칭을 썼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지현에게 아무 감정도 없는 호철이 서로 이름을 부르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궁금했다. 더 솔직히 말하면 궁금하기보다 묘한 불쾌감이 일었다. 호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근데 어제 북한산에서 칼에 찔린 시체가 발견됐어요.난 다른 사건 때문에 신경을 못 썼는데 오늘 아침 출근해서 사건 파일을 보고 지현이 말한게 생각 나더라고요. 똑같았어요. 피살자는 나무를 등지고 앞으로 쓰러져 있었습니다. 사인은 오른쪽 7번과 8번 늑골 사이를 관통한 자상으로 인한 장기손상과 과다출혈입니다. 범인이 왼손잡이라는 증거죠. 범인 추정 키는 170센티 정도. 흉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자상의 흔적으로 추측한다면 칼날 길이 25센티의 양면 칼입니다. 어때요? 똑같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남자의 열변에 비해 호철의 대답은 간단했다. 남자의 말에 딱히 새로운 것도 없었지만 웬지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그때 지현의 말이 호철의 귀를 번쩍 뜨게 한다.

“한가지 다른 점이 있어.

“다른 점? 뭔데?

“일단 시체부터 보고 얘기해.

시체안치실로 들어서자 서늘한 공기와 함께 포름알데히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무리 맡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냄새다. 마치 주인처럼 앞장선 남자가 시체를 안치하는 서랍장 하나를 열었다. 길게 열린 서랍장 안에는 흰천으로 얼굴까지 덮인 시체가 보였다. 호철은 조심스럽게 흰천을 걷어냈다.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잠자는 듯한 얼굴이다. 천을 더 밑으로 걷어내자 오른쪽 갈비뼈 쪽에 3센티 넓이의 칼자국이 보였다. 호철은 칼자국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목요일 살해당한 건가?

“어떻게 알았어?

지현이 사뭇 놀란 듯이 말했다.

“시체가 물기에 불어 있어. 목요일 비가 왔었지.

“맞습니다.

남자가 호철의 말을 받았다.

“정확한 건 검사 결과가 나와 봐야 알지만 의사 말로는 사망 추정시간을 대략 목요일 오전 8시부터 12시 정도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긴 검사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그건 확실할 겁니다. 교인들 증언으로는 피살자가 매주 목요일 아침 9시부터 1시까지 등산을 했다고 했으니까요.

“부검은?

“원래 화요일로 잡혀 있었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오늘 실시하기로 했어요. 아마 부검의가 오고 있을 겁니다.

시체에서 눈을 뗀 호철이 시선을 지현에게로 옮겼다.

“아까 말한 건 뭐야. 다른 점이란 거 말이야.

호철의 말에 지현이 남자에게 말을 던졌다.

“보여줘 봐.

남자는 시체안치실 한쪽 구석에 놓여져 있는 스테인리스로 만든 냉동고로 걸어갔다. 지현은 남자가 냉동고에서 뭔가를 꺼내는 걸 보면서 호철에게 말을 했다.

“보고 놀라지 마.

“뭔데 그래.

남자는 한뼘 정도 크기의 비닐봉지를 호철에게 들어 보이며 말을 했다.

“이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남자가 들어올린 ‘증거물 1호’ 라고 매직펜으로 써 있는 비닐봉지 안의 내용물을 들여다 본 호철은 잠간동안 멍한 기분이었다. 비닐봉지 안에는 선혈이 낭자한 살덩이가 들어 있었다. 그것이 뭔지를 아는 건 단 0.1초도 걸리지 않았다. 사람의 혀였다. 그것이 누구 것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뻔한 사실을 지현이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뭔지 알겠지? 피살자 혀야. 피살자 옆에 버려져 있었어. 무슨 뜻인지 알겠어?

지현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호철은 안다. 그것이 머릿속에서 영화처럼 펼쳐졌다. 범인이 피살자를 유혹한다. 피살자를 나무로 밀어붙이고 키스를 한다. 오상복이나 윤진우가 나무를 등지고 살해당한 이유가 이제야 풀린다. 피살자는 범인의 키스에 넋이 빠진다. 범인은 그 틈에 피살자의 7번과8번 갈비 사이에 칼을 꽂는다. 피살자들이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살해당한 이유도 여기서 풀린다. 이번 피살자의 경우는 뭔가 변수가 발생했다. 그래서 범인은 키스 중인 피살자의 혀를 절단한 것이다. 그 변수가 뭔지를 지현이 설명한다.

“피살자의 등산복 안주머니에서 칼자국이난 지갑이 발견됐어. 칼이 지갑을 관통해서 피살자의 몸속에 박힌 거야.

이제 결론은 불을 보듯 뻔하다. 피살자는 키스하는 도중에 살해됐다. 남자끼리 키스할 리는 없다.

범인은 여자다!

그것을 추론하는 순간 호철의 마음은 급했다. 피살자는 사이비 종교단체의 교주다. 혀가 절단됐다. 여자 연쇄살인범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언론한테는 메가톤급 사건이다. 아무리 입단속을 해도 언론에 유출되는 건 시간문제다. 언론에서 터트리는 순간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질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민규가 당나귀 싸이트 IP를 알아낼 때까지는 시간을 끌어야 한다.

“관내 사건도 아닌데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한데 일단 이 사건에서 혀가 절단된 건 대외비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저희도 피살자 혀가 절단됐다는 걸 아는 사람은 간부급 이상입니다. 물론 입단속도 내부적으로 지시가 떨어진 상태구요.

남자는 간부급 이상이 안다는 사실로 자기스스로 간부임을 간접적으로 표시했다. 아마 경위쯤 될 것이다. 그것에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는 호철이다.

“그리고 연쇄살인이란 것도 혼자만 알고 있었으면 합니다만.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고...

“당연하죠.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연쇄살인사건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수사하다보면 그쪽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겠죠.

남자의 말투에서 영예욕이 느껴졌다. 웬지 믿을 수 없는 놈이다. 지현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선입견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놈한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처지다.일단 피살자의 신원정보 확인이 시급하다.

호철은 수첩과 볼펜을 꺼내면서 말을 이었다.

“개인적으로 피살자 신원확인 좀 하고 싶습니다. 협조 좀 부탁드립니다.

“당연히 해드려야지요.

“협조 안하면 나한테 죽지.

지현이 농담처럼 끼어들었다.

“사실 지현이 하고는 3년전에 공조수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녹번동 미용실 강도살인 사건이었어요. 서로 나이도 같고 그래서인지 손발이 잘 맞았습니다.

“그때부터 친구처럼 지내고 있지.

남자의 말에 지현이 호응을 했다.

“겨우 친구 정도야?

“그럼 더이상 뭐 있어?

남자의 실망스런 말투에 지현이 눈을 흘겼다.

남자는 호철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이미 알고 있다시피 피살자는 천년영세교교주입니다. 교인들한테는 신처럼 추앙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저런 사건으로 추문도 있긴 합니다만 정확한 정보는 현재 수집 중입니다. 어쨌든 주변에 원한을 살만한 사람이 많다는 얘기죠.

호철이 수첩에 열심히 뭔가를 적으면서 물었다.

“가족은 있습니까?

호철의 질문에 남자는 스마트폰에 기록돼있는 피살자의 정보를 검색하고 말을 이었다.

“현재까지 조사한 바로는 없는 걸로 나와있습니다. 부모형제도 없고 결혼은 아직 안했습니다. 내연의 관계가 있는 여자가 있는 걸로 돼 있습니다만 정확한 정보는 현재 조사 중입니다. 피살자 나이는 47. 이름은 강무세입니다. 현재 거주지는...

남자의 말을 받아 적던 호철의 손이 멈췄다.

“잠깐...이름이.

“강무세입니다.

“강무세.

호철의 시선이 허공에 머물렀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었다.

강무세.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다.

.

.

.

그 이름 석자를 조용히 뇌까리던 호철의 얼굴이 납처럼 굳어졌다.

“왜 그래?

지현의 말이 꿈속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호철의 생각은 다른 곳을 헤매고 있었다.

- 강무세여요.

- 이름이 강무세여요.

- 바둑 고서인 현현기경에 나오는 문제여요. 이름이 강무세여요.

호철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볼펜이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호철의 머릿속에서 소녀의 말이 웽웽거리면서 메아리쳤다.

- 문제를 풀면 선물을 준다고 했지. 선물이 뭐야.

- 이미 줬어요. 이름을 가르쳐줬어요.

강무세여요강무세여요강무세여요강무세여요강무세여요강무세여요

강무세여요강무세여요강무세여요강무세여요강무세여요강무세여요

강무세여요강무세여요강무세여요강무세여요강무세여요강무세여요

왼손잡이여요왼손잡이여요왼손잡이여요왼손잡이여요왼손잡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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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잡이여요왼손잡이여요왼손잡이여요왼손잡이여요왼손잡이여요

호철의 눈은 초점을 잃고 있었다. 마치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강형사!

지현이 호철의 어깨를 흔들자 비로소 현실로 돌아오는 호철이다.

“왜그래.무슨 일이야?

“아...아냐. 아무 것도.

“안색이 안 좋잖아.

“바람 좀 쐐야겠어.

“그래. 아무래도 그래야겠어. 포름알데히드에 중독된 거 아냐?

지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호철은 문쪽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뒷모습이 잔뜩 경직돼 있었다.

 

 

 

부검은 한시간 만에 끝났다. 별로 특별히 검시할 것도 없었다. 오른쪽 7번과 8번 갈비 사이의 자상으로 인한 장기손상이 직접 사인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자상의 단면은 깨끗했다. 오상복이나 윤진우 사건의 복사판이었다. 혀가 절단된 것이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다.

천년영세교 교인들은 시간이 갈수록 숫자가 늘어나면서 거칠어졌다. 호철과 지현은 가까스로 교인들을 뚫고서 병원을 나왔다. 호철이 주차돼 있는 차 쪽으로 걸어가면서 한마디를 툭 던진다. 좀전에 시체안치실에서 나온 이후로 잔뜩 화난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있던 호철이 처음으로 하는 말이다.

“술이나 한잔 해.

지현은 뜻밖인 얼굴로 호철을 보았다.

“오늘 도대체 왜그래. 무슨 일이야. 술이라면 쓴 독약 먹듯 하는 사람이. 거기다 아직 해가 저만치 떠있는데.

지현의 말에 호철은 대답이 없었다. 그 대답을 지현 스스로가 한다.

“혹시 태호 때문에 그러는 거 아냐?

“태호?

“김형사 말이야.

“그 친구가 왜?

“질투하는 거 아니냐구.

“그런가...

호철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 말에 지현이 목젖이 보이도록 웃었다.

“이거 괜찮은데. 질투 유발 말이야. 그동안 나를 소 닭 보듯 하더니 드디어 뭔가를느낀 거야?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하란 말이야. 알았어?

지현이 유쾌하게 말하고 호철의 팔짱을 끼었다. 팔짱을끼고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누가 봐도 다정한 연인으로 보였다.

불광동에 있는 이자까야 낙원의 간판불이 켜졌다. 이제 주변은 어둠에 묻혀가고 있었다. 낙원 안은 텅비어 있었다. 호철과 지현이 유일한 손님이었다. 가게를 오픈하자마자 들어온 두 사람은 벌써 두 시간째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 이미 다섯 병째다.

“그만 마셔. 취했어.

자신의 빈잔에 술을 따르는 호철의 손을 잡으면서 지현이 말했다.

“아직...괜찮아.

호철은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취한 사람의 말투다. 다섯 병중 세 병 이상을 호철이 마셨다.

“오늘 정말 왜그래. 아까 피살자 신원을 들으면서부터 그러던데...피살자가 아는 사람이라도 되는 거야?

“알 리가 없잖아.

“물론 그렇겠지만. 암튼 자기 이상해. 뭔가 달라.

...난 말이야.

말을 끊고 소주를 한입에 털어넣는 호철이다. 빈잔을 거칠게 테이블에 놓는다. 술 마시는 것도 술잔을 놓는 것도 평소의 호철이 아니다. 호철은 테이블에 놓인 빈잔을 움켜쥐면서 끊었던 말을 이었다.

“난 말이야. 꼭 잡을 거야. 범인 말이야. 연쇄살인범.

“물론이지. 우린 잡을 수 있어.

“우리가 아니라 나야!!

호철이 소리치면서 소주잔을 움켜쥐었다. 호철의 손안에서 소주잔이 박살나면서 피가 튀었다. 피가 흐르는 호철의 손을 보고 기겁을 하는 지현이다.

“강형사!

“내가 잡아. 이 강호철이 잡고 만다고!

“알았어.자기가 잡을 거야. 손에서 피나잖아. 손을 펴.

손을 편 호철의 손은 피투성이었다. 눈에도 핏발이 서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화산 같았다.

무엇이 호철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지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아무리 운동으로 다져진 여자라도 80킬로그램이 넘는 술취한 남자를 부축하고 온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인사불성인 호철을 자신의 오피스텔로 데려온 지현은 거의 탈진상태였다.

침대에 걸터앉아 숨을 고른 지현은 잠든 듯이 누워있는 호철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장난이었다. 호철을 좋아한다는 것이. 사실 호철은 지현의 이상형은 아니었다. 지현은 시크하고 도시적인 남자를 좋아했다. 호철같이 투박하고 무뚝뚝한 남자는 전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런데 편안했다. 그래서 장난처럼 좋아했고 농담처럼 표현했다. 그런데 그 장난이 점점 진짜가 돼버렸다. 거기다 지현의 호감을 호철은 바위처럼 묵묵부답으로 대답했다. 그것이지현의 마음을 더 달뜨게 했다. 이제 지현에게 호철은 안보면 보고 싶은 그런 존재가 돼버렸다. 33년을 살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훔쳐가 버린 남자다. 그 남자가 바로 눈앞에 누워있다. 지현은 마치 자석에 끌리듯이 자신의 얼굴을 호철에게로 다가갔다. 지현의 입술이 호철의 입술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따뜻한 입술이다.

그 순간 호철이 눈을 부릅떴다. 광기어린 눈빛이었다.

호철의 눈빛에 지현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다급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강형사......

짧은 순간이었다. 호철은 마치 야수처럼 지현을 거칠게 침대에 눕혔다. 지현이 소리쳤다.

“강형사!이러지 마!

지현의 외침은 공허했다. 호철의 우악스런 손에 지현의 블라우스와 브래지어가 찢겨져 나가며 백옥같이 하얀 젖무덤이 드러났다. 지현이 필사적으로 자신의 바지춤을 잡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호철의 완력에 우두둑 소리와 함께 벨트의 버클이 분리되며 바지는 지퍼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찢어졌다. 손바닥만한 실크팬티가 휴지처럼 찢겨져 나간 건 순간이었다. 지현이 본능적으로 자신의 아랫도리를 가렸지만 그 손마저호철의 우악스런 손에 포박돼 버렸다. 지현은 호철을 보았다. 호철은 헐떡이고 있었다.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분노가 아닌지 모른다. 그동안 참았던 욕정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지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호철의 눈에는 소녀가 보였다. 소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다. 그 무표정함 뒤에 피비린내를 감추고있었다.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호철의 분노는 활화산처럼 치밀어 올랐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분노는 온통 아랫도리로 몰렸다. 아랫도리는 금방이라도 마그마를 터트릴 기세로 융기됐다. 호철은 그것을 지현의 몸속 깊숙이 집어넣었다. 마치 소녀가 피살자의 몸속 깊숙이 칼을 박듯이.

화산의 폭발에 지현이 길게 신음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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