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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뭉크의 절규처럼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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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뭉크의 절규처럼 (9)
2013-11-13 조회 7854    프린트스크랩
▲ 영화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포스터.
          

남자가 강남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나왔다. 남자의 옆에는 오렌지 칼라로 염색한 20대의 늘씬한 미녀가 바짝 붙어서 연신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 뒤로 언제나처럼 예닐곱 명의 검은색 제복 차림의 경호원들이 따른다. 주변 사람들은 남자의 움직임에 눈을 떼지 못했다. 남자는 사실 그런 걸 즐긴다.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야 만족하는 그런 사람이다. 경호원들도 사실은 경호가 목적이 아니라 남자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하나의 장치일 뿐이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조각같이 잘생긴 외모에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를 자랑한다. 가슴까지 풀어헤쳐진 야자수가 그려진 비치웨어는 갈색으로 썬텐한 남자의 근육질 몸과 무척 잘 어울렸다. 남자의 과시욕은 목에 건 금목걸이와 팔찌, 금장 롤렉스시계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남자가 여자와 함께 지붕이 열려져 있는 벤틀리 컨티넨탈 컨버터블에 올라타자 경호원들은 부랴부랴 벤틀리의 뒤쪽에 주차돼 있는 벤츠와 레인지로버 두 대에 나눠 탄다. 벤틀리가 굉음을 터트리며 출발하자 그 뒤를 허겁지겁 좇는 벤츠와 레인지로버다. 남자가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사람들은 부러운 눈으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도대체 저사람 누구야?”라는 의구심을 보였다.

남자는 천년영세교 교주다. 세상은 천년영세교를 사이비교라고 하지만 교인들은 그곳이 천국이고 지상낙원이라고 믿고 있다. 교주는 그들에게 하느님이었다. 교주를 위한 그들의 맹목적인 충성과 사랑은 일반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도였다. 남자는 교인들의 충성으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2년전 남자는 살인을 비롯해서 폭행, 사기, 협박, 재산 갈취, 강간 등 총 열두 건으로 기소를 당했다. 하지만 법은 남자에게 단 하나의 유죄도 내리지 않았다. 남자는 법 앞에서 무죄였다. 대신 충성스런 교인 몇 명이 감옥에 가는 걸로 끝이었다.

나는 벌써 한달 넘게 남자를 관찰했다. 법은 남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난 남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내일은 목요일이다. 남자는 혼자 북한산으로 등산을 갈 것이다. 남자가 즐기는 여러가지 취미 중 하나다. 한달에 한번은 오대산이나 지리산 같은 큰 산을 오르고 일주일에 한번은 북한산을 오른다. 그것도 정식 등산로가 아닌 자신이 개척한 비등산로를 즐긴다. 그것도 자기 과시욕인지 모른다. 어쨌든 남자가 경호원 없이 혼자인 건 그때가 유일하다. 남자는 아침 9시에 오르기 시작해서 오후 1시에 내려온다.

남자에게 내일 등산은 마지막 등산이 될 것이다.

아니, 이 세상을 보는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남자가 오늘을 마음껏 즐기기를 난 기도한다.

악어의 눈물처럼.

, 이게 재촉한다고 되는 게 아냐.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잖아. 시간싸움이야. 시간싸움. 그러니까 재촉하지 말고 진득하게 기다려. 나도 답답하다구. 씨바. 도대체 어떤 새끼길래 이렇게 스킬이 높은 거야. 그 새끼 잡으면 쌍판 좀 보여줘 봐.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 구경이나 한번 해봐야겠어.”

알았어.”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민규의 짜증스런 목소리에 호철은 죄인처럼 힘없이 대답하고 핸드폰을 끊는다. 하긴 짜증이 날만도 하다. 하루에도 수십 번 전화를 해대니 짜증이 안 나고 배기겠는가. 당나귀 싸이트 IP주소를 검색하기 시작한 지 벌써 나흘이 지났다. 민규가 말한 로또당첨은 이미 물 건너간 상태다. 하루하루가 답답한 호철이다.

아직 못 찾은 거야?”

호철의 책상에 자판기 커피 한잔을 놓으며 말하는 반장이다. 반장이 커피를 타준다는 건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다. 그만큼 반장도 이번 사건에 관심이 높다는 증거다.

그 당나귄지 당나란지 하는 IP주소 말이야.”

.... 그게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나저나 그놈이 범인인건 확실해?”

반장님!”

호철이 버럭 소리친다.

이 새끼가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임마, 니가 그렇게 소리치지 않아도 내가 반장이란 건 세상이 다 알아.”

반장님도 인정하셨잖습니까. 전후좌우 맞춰본 결과 당나귀가 범인이 맞다고. 근데 왜 딴집니까. 딴지가.”

딴지가 아니라 이건 이상하잖아.”

뭐가 말입니까?”

당나귀란 싸이트 아직 폐쇄 안했다면서?”

그게 왜요.”

, 임마, 만약 너 같으면 싸이트를 그냥 놔두겠냐. 경찰이 자기를 잡으러 오는데 말이야.”

사실 호철로서도 궁금한 사실이다. 박동신이나 오자영은 범인을 생명의 은인처럼 알고 있다. 그런 두 사람이 경찰이 당나귀란 싸이트를 알아냈는데 가만히 손 놓고 있을 리가 없다. 분명히 싸이트에 글을 올렸을 것이다. 경찰이 알아냈다고. 그런데도 싸이트는 폐쇄되지 않고 그대로다. 도대체 범인은 무슨 생각인가.

겁이 났을지도 모르죠.”

누가 겁나?”

누군 누굽니까. 박동신하고 오자영이죠.”

뭐가 겁나?”

생각해보세요. 만약 싸이트에 경찰이 알아냈다고 글을 올리면 결국 비밀을 지키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 자백한 꼴이 되잖습니까.”

그러니까 범인의 보복이 두려워서 두 사람이 싸이트에 글을 올리지 않았다 이거야?”

그렇죠.”

지금 그걸 추리라고 하는 거야? 명색이 대한민국 강력반 형사라는 놈이. 그런 걸로 보복할 놈 같으면 애당초 자기하고 아무 상관없는 오상복이나 윤진우를 죽이지도 않았어. 그 정도는 알만한 놈이 왜 그래? 너 요즘 멘탈에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냐? 도대체 뭐야. 왜 그래?”

호철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한 말을 해서 반장한테 일장 연설을 들어야할 판국이다. 반장이 막 길고 긴 열변을 토해내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어댄다. 민지현이다. 민지현의 전화가 이렇게 반가운 건 처음이다.

당나귀 싸이트 IP 아직 안 나왔어?”

지현의 첫마디도 IP.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당나귀 싸이트 IP에 집중돼 있는 것 같다.

아직.”

뭐가 그렇게 오래 걸려. 민균지 뭔지 그거 믿어도 돼?”

재촉하지 말고 진득하게 기다려. 시간싸움이야. 시간싸움.”

민규의 말을 그대로 흉내내는 호철이다.

알았어. 이쪽으로 와. 오랜만에 한잔하자구.”

생각 없어. 싸우나나 가서 머리나 식혀야겠어.”

이 더운 날 무슨 싸우나야.”

이열치열.”

머리가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호철은 퇴근하자마자 사우나로 향했다. 평소에도 사우나를 즐기는 호철이다. 열기로 후끈한 사우나 안은 텅 비어있었다. 하긴 민지현의 말대로 이 더위에 사우나에 올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올 여름은 유난히 덥다. 이제 6월인데 기온은 35도를 육박하고 있었다. 기상청은 연일 사상최고의 기온이라고 난리법석이었고 한전은 여차하면 단전을 할지도 모른다는 협박성 발언으로 국민들에게 절전을 호소했다.

그런 더위에 이런 사우나는 어쩌면 에너지 낭비의 주범인지도 모른다. 사우나 주인도 하루에 오는 손님이 기껏해야 열 명도 안된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호철은 그 넓은 사우나를 독차지한다는 미안한 생각을 가지며 뜨거운 탕 안으로 몸을 담궜다. 뜨거운 물의 열기가 온몸으로 전해진다. 같은 열기라도 기분 좋은 열기다. 머리 속을 텅 비운 호철은 기분 좋은 열기를 온몸으로 받는다. 노인네처럼 입에서 어~~~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것 같다. 물 밖으로 나온 몸에서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걸 느낄 때쯤 비워진 머리가 다시 하나씩 채워진다.

오자영, 윤진우, 오상복, 박동신, 당나귀, 민지현, 왼손잡이, 260미리...

뒤엉켜 있는 생각이 채곡채곡 정리되는 순간 또 하나의 생각이 그 속으로 파고든다.

딱딱딱...

바둑돌 놓는 소리.

백은 아래 꼬리쪽을 끊는다.

흑이 1선에서 단수를 치면 백은 필연적으로 늘어야한다.

흑 역시 1선에서 따라가며 단수를 친다.

그 다음이 문제다. 여기서 무슨 수가 있는가.

사우나 안은 마치 짙은 안개가 내린 것처럼 수증기로 가득 찼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수증기 속을 호철은 노려보았다. 그 순간 하나의 점이 보였다.

일단 위쪽의 4점을 먹여치고 다시 단수를 쳐서 자충을 만들어 놓는다. 이제 모양이 정리된다. 백은 흑의 외곽을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완전하게 둘러싸고 있고 흑집 안에 2선에서 두점으로 늘어선 백을 흑은 1선에서 단수치고 있다. 이제 흑의 공배는 세곳이다. 1선 꼬리쪽의 두곳, 백 두점을 단수쳐서 때낼 수있는 2선의 한곳. 백이 둘 곳은 오직 한 곳뿐이다. 2선을 두는 건 자살이기 때문에 못둔다. 1선은 먹여치는 곳과 안쪽. 안쪽도 두면 흑이 따내서 아무 수도 안난다.

1선 꼬리쪽을 먹여친다.

흑은 꼬리쪽에서는 딸 수가 없다. 환격이다.

어쩔 수 없이 2선에 늘어선 백 두점을 따낸다.

그 순간 탄성을 지르며 탕에서 벌떡 일어나는 호철이다.

웬일이어요.”

아파트 현관문을 연 소녀가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사우나에서 한걸음에 달려온 호철은 숨을 헐떡였다.

문제를 풀었어.”

풀었어요.”

그래. 확실해.”

소녀는 들어오라는 말도 없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간다. 그 뒤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서는 호철이다.

소녀는 바둑판을 가져다놓고 단정한 자세로 문제를 만들었다. 그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지는 호철이다. 문제가 다 만들어지자 호철은 기다렸다는 듯이 돌을 놓는다. 이제부터 그 길고 긴 해답이 풀리는 순간이다. 백 선수, 45수가 걸린다.

백 한수..

흑 한수..

소녀의 차분한 착점과 달리 호철은 마음이 급했다. 빨리 그 통쾌한 최후를 보고 싶었다.

39.

40.

41.

42.

43. 백이 꼬리쪽을 먹여친다.

44. 흑이 2선에 늘어선 백 두점을 따낸다.

백 한점이 꼬리쪽에 먹여친 상태고 2선은 백 두점을 따낸 상태다. 드디어 마지막 수.

45. 백은 흑이 두점 따낸 곳에 다시 먹여친다. 먹여친 자리가 두 곳이다. 1선 꼬리쪽. 2선에 두점 따낸 곳.

흑은 어느 곳도 따낼 수 없다. 양 환격.

마지막 수를 놓았는데도 소녀는 아무 말 없이 바둑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소녀를 본 호철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다. 혹시 이게 정답이 아닌가. 그럴 리가 없다. 다른 수는 없다.

그 순간 소녀가 가만히 고개를 들어 호철을 보았다.

정답이어요.”

소녀의 말에 호철은 자신도 모르게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통쾌한 웃음이다. 이런 웃음을 언제 웃어봤는지 기억도 없다. 한참을 웃던 호철이 웃음을 그치자 소녀가 여전히 그 단조로운 억양으로 말했다.

바둑 고서 현현기경에 나오는 문제여요.”

현현기경?”

현현기경은 호철도 들어본 적이 있다. 1400년대에 만들어진 바둑의 성서라고 불리는 현현기경은 온갖 기기묘묘한 사활문제지로 바둑을 두는 사람에게는 필독서로 알려져 있다. 호철은 책이름만 들었지 본 적은 없다.

현현기경이어요. 이 문제는 강무세여요.”

그 오랜 옛날에 이런 문제를 만들었다니 정말 대단하군.”

호철은 다시 한번 음미하듯 바둑판을 보았다. 자신이 풀었다고 하기에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문제였다. 문제는 아무리 봐도 신기하기 그지없다. 바둑판을 보던 호철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문제를 풀면 소녀는 자신에게 선물을 준다고 말했다. 무슨 선물인지 궁금한 호철이다.

문제를 풀면 선물을 준다고 하지 않았나? 뭐지?”

이미 줬어요.”

언제 줬다는 거야?”

이름을 가르쳐줬어요. 강무세여요.”

강무세?”

이름이 강무세여요.”

호철은 다시 한번 너털웃음을 지었다. 문제의 이름을 가르쳐준 것이 선물이다. 소녀의 순수함이 호철을 웃게 만든다.

금방 비라도 한바탕 쏟아질 듯이 우중충한 하늘이다. 한눈에 봐도 꽤 고급스럽게 보이는 등산복을 입은 남자는 북한산 등산로를 오르고 있었다. 등산로는 한가했다. 목요일은 일주일 중 가장 등산객이 적은 날이다. 더군다나 곧 한바탕 비라도 쏟아질 것 같은 날씨는 더욱 등산객의 발길을 뜸하게 만들었다. 시간은 940분을 넘고 있었다.

등산로를 오르던 남자는 어느 한곳에서 철조망을 들어 올리고 밖으로 나왔다. 울창한 숲속으로 겨우 한 사람 지나갈만한 좁은 오솔길이 보였다.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사람의 발자국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길이다. 남자가 만든 비등산로다.

북한산 관리소에서는 등산로외의 다른 곳으로 산을 타지 말라고 수없이 경고하지만 일부 등산객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이다. 일부 몰지각한 등산객들은 조급하게 산을 오르겠다는 조급함이나 은밀하게 자신만의 등산로를 가지고 싶어 하는 성취욕으로 이런 비등산로를 만든다. 그런 비등산로를 다른 등산객이 따른다. 북한산은 이런 비등산로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남자는 평지와 오르막길, 내리막길을 자신의 등산 취향에 맞게 6개월 동안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 남자의 등산로는 인기가 있는지 꽤 많은 등산객들이 이용했다. 역시 남자는 그것에도 희열을 느꼈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지나고 이제부터 완만한 경사가 이뤄진다. 격렬하게 운동하고 잠시 휴식을 갖는 그런 기분으로 이런 코스를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후덥지근한 날씨에 급경사를 오른 남자는 온통 땀으로 젖어있었다. 기분 좋은 땀이다. 같은 땀이라도 등산으로 흘린 땀은 기분을 상쾌하게 만든다. 이런 맛에 등산을 한다. 잠시 목이라도 축여야겠다고 생각한 남자가 막 걸음을 멈추려는 순간 뭔가가 보였다. 저 앞쪽에 누군가가 막 커브길을 돌아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남자는 멈추려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분명히 지난주에 봤던 그 여자다.

남자가 지금까지 자신이 만든 길에서 등산객을 만난 건 고작 네다섯 번에 불과했다. 등산객이 적은 목요일인데다 비등산로인 게 이유다. 그런데 지난주에 앞서가던 여자를 봤다. 여자를 본 건 처음이다. 도대체 어떤 여자길래 혼자 등산을 하는가 싶은 궁금증에 남자는 빠른 걸음으로 여자 옆으로 따라붙었다. 좁은 길에 어깨가 닿을 정도였지만 여자는 그저 묵묵히 땅만 바라보며 걸었다. 뭔가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였다. 나이는 20살쯤, 사실 20살이 안될지도 모른다. 그저 이런 시간에 등산을 왔다는 선입견이 여자의 나이를 좀 더 많이 봐준 건지도 모른다. 아주 짧은 시간 스쳐지나가며 봤지만 남자의 뇌리에 꽤 깊숙이 인상을 남긴 여자였다.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커브길을 돌자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여자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여자를 만난 남자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마치 소년이 된 듯한 기분이다. 남자는 빠른 걸음으로 여자를 따라붙었다. 여자와 어깨가 닿으면서 체취가 느껴졌다. 기분 좋은 향기다.

지난주에도 봤었죠?”

남자가 달콤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지만 여자에게서 돌아오는 건 침묵뿐이었다. 여자는 여전히 땅만 바라본 채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등산을 좋아하나 봐요. 여자 혼자 이런 길을 즐기는 걸 보면...사실 여자가 등산하기엔 꽤 어려운 코스죠. 지금까지도 힘들었지만 이 다음이 문젭니다. 여길 지나면 급경사가 나와요. 암벽길이죠. 거기가 고빕니다. 나도 거길 오르다 몇번 주저앉은 적이 있어요. 한번 앉으면 그대로 눕고 싶을 정도입니다. , 지난주에 왔으니까 잘 알겠군요. 하하하...이거 내가 말해놓고도 민망합니다. , 목 마를 텐데 물 한잔 마실래요. 여기서 목 좀 축이고 올라가죠.”

남자가 아무리 떠들어도 여자는 여전히 침묵이다. 혹시 벙어리가 아닌가 싶다. 다른 여자 같으면 벌써 강제로 어떻게든 했을 남자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 여자한테는 함부로 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여자가 대답을 하든 말든 여자와 어깨를 닿고 걸어가는 것만으로 즐거운 남자다. 남자가 다른 얘깃거리를 만들어 입 밖으로 내려는 순간 여자가 걸음을 멈췄다. 따라 멈추는 남자의 다리가 경직됐다. 여자가 남자를 보았다. 마치 깊은 심연처럼 검은 눈동자였다. 여자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남자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여자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지난주에 봤어요.”

특이한 억양이다. 감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목소리다.

...그래요. 지난주에 봤죠.”

남자는 말을 더듬거렸다. 전혀 자신답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맘에 들어요.”

맘에 든다고?”

언뜻 남자는 여자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밑도 끝도 없이 맘에 든다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뭐가 맘에 든다는 거죠? 내가?”

여자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이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뭔가. 혹시 이 여자 귀신 아닌가. 그런 황당한 생각까지 들었다. 귀신이든 뭐든 상관없다. 이런 여자라면 목숨을 걸어도 좋다. 남자가 잠시 넋이 빠져있는 순간 참고 있던 하늘이 후두둑 빗방울을 쏟아냈다.

이런, 비가 오는데...빨리 가야겠어요.”

남자가 급히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여자가 남자 쪽으로 한발 앞으로 내밀었다. 뜻밖인 여자의 행동에 남자가 몸을 뒤로 주춤했다. 남자의 등 뒤로 나무가 걸렸다. 나무에 기대선 남자를 무표정하게 바라본 여자가 말을 이었다.

키스해요.”

여자의 말에 남자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남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키스를 하자니...설마 다른 말을 한 것을 잘못 알아 들은 거겠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여자의 얼굴이 천천히 남자한테 다가왔다. 남자는 마치 여우한테 홀린 듯이 넋이 빠져있었다.

여자의 눈동자가 바로 눈앞에 보였다. 여자의 향기가 느껴졌다. 여자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열린 입술이 보였다. 남자는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다. 남자는 여자를 격렬하게 끌어안으며 입술을 덮쳤다. 남자의 혀가 성급하게 여자의 입안으로 들어왔다. 남자의 혀를 마중한 건 여자의 혀다. 여자의 혀가 남자의 혀 곳곳을 정성스럽게 애무했다. 남자는 마치 머릿속에 구멍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처음 느껴보는 황홀감이다. 정신이 아득했다. 그 순간 여자의 왼쪽 옷소매에서 뭔가가 기어 나왔다. 하얗게 빛나는 칼날이다. 칼날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소매에서 나와 급기야 손잡이가 보였다. 하얗고 섬세한 여자의 손이 칼 손잡이를 움켜잡는다.

7번과8번 늑골 사이.

그곳이 어딘지는 눈감고도 알고 있다.

수십, 수백 번 연습했다.

여자는 칼을 움켜쥔 손을 서서히 들었다. 여전히 남자는 황홀경에 빠진 상태다. 칼을 들은 여자의 손이 서서히 뒤로 물러섰다가 남자의 신체 한 곳으로 치달았다.

콰르르르릉 쾅쾅...

뇌성벽력이 치는 것과 남자가 황홀경에서 빠져나와 눈을 부릅뜬 건 동시였다. 짧은 순간 여자도 이상한 걸 느꼈다. 칼이 완전히 박히지 않았다.

아차, 지갑에 걸렸다.

등산복 안주머니는 일반 주머니보다 깊다는 걸 계산에 넣지 않았다.

지갑의 저항으로 칼은 반밖에 박히지 않았다.

그 순간 남자의 손이 본능적으로 여자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운동으로 다져진 만큼 완력이 대단했다. 여자의 손은 마치 수갑이라도 찬 듯이 꼼짝할 수 없었다.

칼이다. 누군가가 날 찔렀다. 도대체 누가 날 찌른 거야?

여자의 무심한 눈동자가 바로 눈앞에 보였다.

아직도 여전히 키스중이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날 찔렀지?

나를 찌른 손을 잡고 있다.

그것을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남자는 자신의 신체에서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느꼈다. 여자의 입안에서 혀가 절단됐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고통이다. 아니, 죽어서도 느낄 수 없는 고통이다. 혀가 없는 남자는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입에서 피를 뿜어냈다. 남자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순간 여자는 마지막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마무리 짓는다. 나머지 칼이 남자의 몸속 깊숙이 박혔다. 남자는 부릅뜬 눈으로 이 세상 마지막을 본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무심한 여자의 얼굴이다.

남자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자 여자는 몸을 옆으로 비켜서서 칼을 빼냈다. 칼을 빼내자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여자는 자신의 몸에 피 한방울 묻히지 않았다. 앞으로 고꾸라진 남자는 끝없이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를 무심하게 내려다 바라보다가 입안에 있는 남자의 혀를 뱉어냈다. 생수로 입안의 피비린내를 없앤 여자는 피 묻은 칼을 수건으로 정성껏 싸서 배낭에 넣었다. 배낭을 다시 맨 여자는 묵묵히 가던 길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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