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현현기경은 모두 여섯 권으로 되어있는 방대한 분량의 바둑총서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기기묘묘한 사활 문제들은 위 여섯 권 가운데 세 권에 각각 나뉘어 수록되어 있는데 ,나머지 세 권 속엔 우집 등의 서문(序文)과 더불어 바둑에 관련된 문학 작품들과 오늘날의 정석(定石)이나 포석(布石)에 해당하는 변각정식(變角定式)등이 들어있다.

현현기경의 구성과 편집 체제, 그 내용 등에 대해서는 차후 설명을 하겠지만, 오늘날 현현기경이 제각각 이상하게 변형된 형태로서 중국과 한국, 일본 등에 널리 퍼지게 된 연유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기록에 의하면 명(明)나라 때 현현기경 판각본을 만든 휘주(徽州) 휴녕(休寧) 사람 왕창조(汪昌朝)는 본명이 왕정눌(汪廷訥)이라고 하였으니, 창조(昌朝)는 그의 이름자가 아닌 자(字)이다. 그러나 중국 위기협회에서는 ‘왕창조 판각본’이란 명칭을 학술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혼돈을 피하고 통일을 기하는 의미에서 그를 왕창조라 칭하기로 하겠다.

그의 호는 좌은선생(坐隱先生) 또는 무무거사(無無居士)로 통하였고, 남경(南京)에서 살았으며 1596년경을 전후로 염운사(鹽運使), 즉 소금을 운반하는 직책을 맡았던 관리였고, ‘사후기(獅吼記)’ 같은 희곡도 지은 극작가로도 알려져 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연고로 그는 현현기경 판각본을 만들어낼 궁리를 하였고, 또 실제로 판각본을 만들어서 오늘날까지 현현기경 원본 모습이 그나마 전해질 수 있도록 하는 공을 세우게 되었을까?

그는 명사들과 더불어 좌은원(坐隱園)에서 연회를 자주 열곤 하였기에 좌은선생(坐隱先生)이란 호를 얻었다는데, 좌은(坐隱)은 곧 수담(手談)과 같이 바둑을 뜻하는 명칭이니, 적어도 그는 바둑을 잘 두었거나 친구들과 더불어 취미로서 바둑을 즐겼으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간단히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정도만으로는 그가 어려운 현현기경 판각본 작업을 시도하고 실천하였다고 단정짓기 어렵다. 왜냐하면 판각본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노력과 경비가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에 그에게 뭔가 강력한 동기 유발이 있지 않고서는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직책이 소금을 운반하는 염운사(鹽運使)로서 부득이 외적인 활동을 많이 해야만 한다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그가 현현기경 판각 작업을 시도했었다는 것 자체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필자는 학위 논문을 쓸 때에 좀더 정확한 정보를 알아내고자 현현기경의 서문들을 모두 복사해서 중국고문학(中國古文學)을 전공한 교수를 찾아가 보여주며 자문을 구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필자가 복사해간 현현기경 서문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난 교수(고교 동창생)는 한마디로 딱 잘라 말했다. 이것은 원나라 시대의 문장이 아닌 근고문(近古文) 즉, 명 청 시대의 문장에 해당된다고.

“그럴 리가... 그렇다면 원나라 때 문장과 명나라 때 문장은 차이가 많이 나는가?”

의아해하는 내 물음에 그는 또 간단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러고보니 현현기경 서문에 원나라 지정 7년(至正 七年)과 지정 9년(至正 九年)이니 1347년, 1349년이고, 명나라때 왕창조가 판각본을 다시 만드는 등 그가 활약했던 시기는 1596년 전후로 추정되니 햇수로도 약 250년 차이가 난다. 그러니 이 기간 동안 이민족의 지배 체제가 바뀌었고 언어의 변천 과정이 이루어진 데다가 각 지방마다 언어가 달랐던 커다란 나라인 점 등등을 고려해 본다면 문자로만 되어있는 현현기경의 서문부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서문부가 원나라 시대의 문장에서 명나라 때 사용되는 문장으로 바뀌어지게 되었을까?

중국고문학 교수는 의아해하는 나에게 다시 말해 주었다.  아마도 원나라 판본을 보고서 누군가가 명나라 시대 문장으로 일일이 재번역하였을 거라고.

그렇다면 왕창조가 원나라 때에 나온 현현기경 정본(正本)을 번각(飜刻) 했다는 뜻인데, 과연 그가 이에 걸맞는 상당한 수준의 학문과 재력, 그리고 이를 반드시 행하여야만 할 동기 유발 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는 말인가?

무릇 어느 한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꽤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연구해야만 한다는 건 기본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런데 소금을 싣고서 각 지방 마다 돌아다녀야만 하는 염운사 직책을 가지고서 희곡을 쓰고 바둑을 즐기면서 게다가 원나라 정본 현현기경까지 시간과 돈을 들여서 번역하고 판각본까지 찍어냈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하기가 어려운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북송시대 심괄(1031-1095)이 자기 저서 몽계필담에서 지적했듯이 임모(臨摹-진품을 아래에 놓고 바로 그 위에 종이를 댄 후 완전히 똑같게 베끼는 것) 문화는 일찍부터 행해졌었다.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똑 같이 베껴내는 건 능숙한 솜씨가 요구될는지 모르나 현현기경 속의 사활 문제들 같이 흑돌과 백돌만이 어우려져 있는 모양만을 임모(臨摹)한다는 건 그다지 기술을 요하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바둑 실력 향상과 직접 관련도 없는 서문부(서문, 바둑에 관련된 문학작품들) 속의 어려운 한자들을 그대로 옮겨 놓는다는 건 임모를 해서 돈을 좀 벌고자 하는 사람들의 입장으로 볼 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언어의 변천 과정을 거쳐서 뜻조차도 제대로 알 수 없게 된 어려운  원나라 때의 문장을 그대로 베낀다는 건 실용적인 면으로 봐서도 별로 득이 되지 않는 일 아니겠는가?

이런 점들 놓고 볼 때, 원본 현현기경 여섯 권 가운데 시공간을 초월하여 이해가 가능하고 또 상업적인 가치가 높은 사활묘수 문제들과 변각 정식(요즘의 정석, 포석)등이 담겨있는 부분들은 명나라 때에 들어와서도 이어져 내려왔을 가능성이 있는 반면, 어려운 원나라 문장이 담겨있는 문자부는 어쩌면 소멸의 위기로 까지 몰렸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일개 하급 관리에 불과했던 왕창조는 매우 다행스럽게도 그 당시의 현대어(명나라 언어)로 원판 현현기경의 서문부를 모두 번역하였고, 게다가 판각본으로 만들어서 현현기경의 원본 모습을 그럭저럭 유지해 놓았다. 바둑인으로서 크게 환영하고 다행스런 일이긴 하다만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