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후 시골집 방구석에서 바퀴벌레와 대화를 나눌 정도의 수준으로 뒹굴기를 한달여쯤...

그날도 바퀴벌레 부부 한쌍과 역사와 민족을 토론하던 와중에 머리맡으로 뭔가 휘리릭~ 하고 떨어진다.

"이거 니 해라~"

꾸부정 누운 채 힐끗 보니 조훈현 프로가 그렇게도 좋아했다는 장미담배 한갑이다. 더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할머님이 방문을 열고 서계신 것이다.

"웬 담배를 다... 할무니나 피시잖쿠요."

말을 이렇게 하면서도 손은 이미 담배를 집어 호주머니로 들이 밀고 있는^^...
제대 1주차 때만해도 어머님께 용돈 얻어내는 거야 어렵지 않았지만, 4주차에 접어들어 이젠 밥도 스스로 챙겨 먹지 않으면 굶을 지경이었고 담배조차 아버님 화장실 가실 때 두어 가치씩 훔쳐 피고 있던 상황이었으니 말과 행동이 엇박자로 간 것이다.

내막을 알아보니 할머님은 경로당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10원짜리 민화투판에서 오랜만에 재미를 좀 보셨고, 쌈짓돈을 보태 손주에게 한턱을 쏘신 것이었다.

'오늘은 70원 잃었다.' '오늘은 130원 잃었다.' 하시며 손주의 질문에 담배 하나 물고 시름에 젖어 계시던 날이 어언 며칠이었던가?

게다가, 동네 경로당 그 쟁쟁한 고수 할매들의 틈바구니에서 흑자를 기록하고 의기양양하게 장미 담배를 손주에게 던지는 모습은 카리스마 그 자체!!

"할무니 따셨어요?"

대답은 미뤄둔 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시가 포즈'보다 백배는 더 멋진 모습으로 담배 한모금을 맛나게 빨아들이신다.

그리고는 고쟁이에서 화투 한목을 꺼내 정성스레 추린후 고무줄로 단단히 조여매어 반닫이를 열고 소중하게 넣어 놓으셨다.

"할무니 혹시 그 화투로 치셨어요 오늘?"

할머님은 나를 한번 흘끗 쳐다보시고는 바람처럼 마당으로 사라지신다.

아! 나는 그제야 사태 파악이 되었다.

할머님은 오늘 사기화투를 치시고 '타짜' 행세를 톡톡히 하신 것이다.

그 물증은 저기 반닫이에 들어간 화투 한목에 있었다.

할머님의 보물1호인 저 반닫이 안의 '화투 한목'은 48장이 모두 같은 종류가 아니다. 풍이 하나 없어지면 어디서 하나 구해서 채워 넣고, 국진이 하나 없어지면 빌려넣고...

게다가 같은 흑싸리 껍데기라도 하나는 똥이라고 써놓아 똥쌍피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고, 우하귀쪽이 조금 깨진 것은 사구라띠요 좌상귀가 더 둥그스름한 것은 솔광.

나는 이 모든 비밀을 할머님과의 심심풀이 친선 민화투에서 익히 알고 있었고, 기어이 할머님은 그간에 돈을 잃었던 울분을 자신만의 화투 한목을 들고 가서 모조리 털어내셨던 것이다.

저녁 늦게...

할머님이 가장 좋아하셨던 일일 연속극을 함께 보면서 난 비밀을 지켜 드렸다.

그리고 덧붙인다.

"할무니... 낼 또 따셔서 담배 사주세요~~"

귀도 어두워 연속극의 화면만 보시던 할머님은 나를 쳐다보며 그저 빙긋이 웃어 주셨다.

난 그렇게 그날 밤 "전설의 타짜"를 보았던 것이다.

(덧붙이며) 물론, 지금 글속의 우리 할머님은 저세상에서 그 미소를 짓고 계시지요. 전 할머님의 보물이었던 그 '화투 한목'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근데, 다음번 산소에 가서는 할머님께 돌려드리려고요. 할머님의 노년을 그나마 즐겁게 지켜준 것은 그 화투였기에요. ^^

2007-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