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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1997 · 검토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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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봄. 한바탕 꿈을 꾸고 난 뒤 창밖으로 밀려들던 파란 여명을 잊지 못합니다. 이 짧은 단편은 그날 새벽, 마치 불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들여다 본 정물화와 같았던 꿈의 조각 모음과 같은 것입니다.
눈을 떴다.
세 스톱 이상 노출이 오버된 슬라이드 필름을 보듯 온통 흰빛으로 가득 찬 세상.
나는 손을 내밀어 흰색 빛 무리 속을 조심스레 만져 보았다.
손끝에는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 아침 안개 속을 더듬듯 축축한 물기만이 손에 느껴질 뿐.
나는 ‘쿰, 쿰’ 하고 목소리를 내어보았다. 목소리는 마치 방음시설이 잘 된 녹음실에서처럼 메마르게 울렸다. 이 공간 어딘가에 소리란 소리는 모조리 흡수해버리는 장치가 설치돼 있는지도 모르겠다.
잠시 후 짙은 안개처럼 한 치의 거리감도 느낄 수 없었던 전방이 조금씩 유색을 띄어갔다. 그리고 여명이 밝아오듯 서서히 눈앞의 형체가 윤곽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어쩌면 누군가가 기계실에 앉아 나를 위해 페이드인의 레버를 조금씩 올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커다란 방이었다. 방안에는 사람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몇 개의 커다란 탁자와 의자. 탁자 위에는 역시 몇 개인가의 보드가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큰소리로, 또는 조근 조근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심각한 표정을 한 채 보드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내 이 방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이 방은 프로 바둑기사를 위한 검토실이었다. 프로기사가 중요한 경기를 가질 때, 주최 측에서는 대국장 외에 별도로 검토실을 제공하게 된다. 경기에 참여하지 못한 프로기사들이 모여 경기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공동연구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방의 한 켠에 놓인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모니터에서는 두 기사가 지금 두고 있는 바둑판이 비치고 있었다. 카메라는 바둑판 위쪽 2m 정도에서 바둑판의 한가운데에 핀트를 맞추어 놓고 있었다.
하지만 대국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보통은 모니터 위에 대국자의 이름을 적어 놓기 마련인데 오늘은 웬일인지 눈에 띄지 않았다. 진행원이 깜박 잊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이 방에 모인 사람들에게 있어 대국자의 이름이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나는 연기와 같이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담배를 피우며 연신 바둑판 위의 돌을 놓았다 쓸었다 하는 전(前) 국수의 모습이 보였다. 충혈된 눈을 바둑판에서 떼며 옆 사람의 의견을 묻는 사람. 식은 커피를 입에 털어 넣고 새로운 커피를 담기 위해 컵을 들고 자리를 뜨는 사람. 바둑에는 관심이 없는 듯 지난주 경마와 간밤의 포커에 대해 연신 떠들고 있는 사람.
나는 그들에게 있어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으며 눈길조차 보내지 않았다. 프로기사들만을 위한 검토실인 만큼 일반인의 출입은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음에도 나는 제지조차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나의 존재를 혀에 알알이 돋은 혓바늘과 같이 느끼고 있음을 눈치챘다. 껄끄럽고 불쾌한 공기가 내내 그들과 나 사이의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고유의 영역을 침범한 낯선 이방인의 무례에 대한 보이지 않는, 그러나 강렬한 배척감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옆구리에 큼직한 가방을 들고 있었다. 가방 안에는 조잡한 구조로 만들어진 공구와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공구는 망치, 드라이버, 펜치 등 가정용 공구를 하나로 묶어 놓은 듯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한쪽 끝에는 날카로운 날을 가진 톱조차 달려 있었다.
나는 이 이상야릇한 공구를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이 방안에서 내가 사람들에게 받고 있는 배척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회사 사무실에 속 보이는 미소를 띠고 들어오는 보험사 직원에 대한 반응과 유사한 것이었다. 내가 가방 안에서 공구를 꺼내자 사람들은 ‘그러면 그렇지’하는 눈빛으로 나의 작업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공구를 만지는 동안 이 공구를 사람들에게 팔아보고 싶다는 욕구가 강렬하게 내 의식을 사로잡았다. 어쩌면 애초에 나는 이 방에 공구의 세일즈를 목적으로 들어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람들이 어차피 나를 세일즈맨으로 파악하고 있는 이상 그 기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공구를 들고 사람들 사이를 천천히 돌아다녔다. 그렇다고 진짜 세일즈맨처럼 일일이 얼굴을 맞대고 미소를 보내며 팸플릿의 내용을 설명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묵언의 수행자처럼 차례로 자리를 옮기며 공구를 보여줄 뿐이었다. 내가 그저 공구를 펼쳐들고 하나하나의 기능을 시험해 보고 있자면 몇몇 사람들이 이를 지켜보는 식이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방안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소곤거림에서 웅성거림으로 바뀌더니 움직임이 빨라졌다. 사진기를 맨 몇몇은 서둘러 방안을 빠져나갔다. 모니터에서는 갑자기 손 두 개가 나타나 부지런히 바둑판의 구획을 정리하고 있었다.
바둑이 끝난 것이다. 사람들은 서둘러 탁자를 떠나 방밖으로 이동했다. 나도 사람들에게 밀리다시피 방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공구가 든 가방을 꼭 움켜쥐고 사람들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잠시 후 사람들의 움직임이 적어졌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대국장 문 앞에 몰려들어 승자를 환영하고 있었다. 승자는 피곤한 얼굴을 하고는 손을 들어 환영인파에게 답례를 보내고 있었다.
검토실 밖에서 서성이던 바둑팬들이 사인을 요청하며 달려들자 진행원들이 대국자의 다음 스케줄을 위해 그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래도 저지선을 뚫은 몇몇의 극성팬을 위해 승자는 펜을 들어 가볍게 사인을 마쳤다. 그리고 승자는 진행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건물을 빠져 나갔다. 검토실의 기사들도 그 뒤를 따라 모두 연기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공구가 든 허름한 가방을 든 채 한동안 맥없이 서 있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가방의 지퍼를 열고 다시 공구를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공구의 기능 하나하나를 시험해 보았다. 겉모습은 조잡하지만 나름대로 정성을 들여 만든 기계였다. 하지만 톱은 틀렸다. 공구의 전체적인 조화를 깨고 있었던 것이다. 지나치게 큰 데다 과연 톱으로서의 기능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누군가의 눈길이 느껴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나는 얼굴을 들어 눈길의 방향을 좇았다. 그는 계단에 앉아 초점 없는 눈빛으로 나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 속에서 나는 그 역시 톱의 부조화를 좋아하지 않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그렇다, 는 긍정을 위해 고개를 끄덕인 뒤 나는 다시 작업에 열중했다. 잠시 후 그는 나의 일에 흥미를 잃은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그는 오늘 시합의 패자였다. 물론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공구로부터 톱을 분해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렇게 해놓고 나서 공구가 전체적인 조화를 찾았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앞니가 빠진 모나리자 상을 보듯 그것은 처참하고도 우스꽝스런 모습이었다. 톱이 있었을 때 그것은 조화를 잃은 공구였으나 톱이 없는 지금에 와선 그것은 이미 공구로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이 지루한 작업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공구를 옆에 놓은 채 나는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나 · 는 · 누 · 구 · 인 · 가
나 · 는 · 왜 · 여 · 기 · 에 · 있 · 는 · 가
이윽고 나는 잠에 빠졌다. 그것은 심연처럼 깊고도 끈적한 잠이었다. 얼마나 잠들었을까? 나는 눈을 떴다.
눈을 떴을 때 내가 본 것은 ….
<1997년 봄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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