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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판타지] 늙은 엘프의 이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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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슬쩍 느릅나무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가, 이내 포기하고는(잘 한 일이다) 다시 나를 향해 말했다.
「정말 그 친구는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더란 말일세.」
「도대체 뭘 고민하더란 말입니까? 이민이라도 가고 싶어 하던가요?」
「아니, 자살 말일세. 결국 그렇게 되었지.」
「하루살이가 자살을 했다고요?」 나는 아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줄무늬호박거미가 쳐놓은 거미줄을 향해 뛰어들었다네. 깨끗한 죽음이었지. 나름대로 영웅적인 최후였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그에겐 생일이 곧 장례일이 되었군.」
됐다고 해주십쇼. 제발.
「결국 이 얘기지. 하루살이나, 나 같은 엘프나, 자네 같은 인간이나 … 삶은 매한가지란 거야. 다를 게 없다네. 결국엔 다들 줄무늬호박거미의 거미줄을 향해 뛰어들게 되는 거라구.」
「…」
일순간 느릅나무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과연.
또 한 차례 바람 한 줄기가 우리 둘 사이를 가로질러 숲을 향해 날았다. 그 뒤로 눈선인장의 냄새가 짙게 따라붙었다. 11월 밤 모닥불에 밤을 굽는 듯한 그 냄새.
「자넨 엘프의 긴긴 수명을 부러워하고 있지?」
「부인하진 못하겠군요. 흐르는 강처럼 오랜 세월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요?」
「어떤 기분일 것 같은가?」하고 노인이 대답했다.
과연 어떤 기분일까? 마음 같아선 노인 엘프 뒤에 묵묵히 선 채 ‘침묵은 금’을 실천하고 있는 느릅나무 옹에게라도 묻고 싶었다. 하긴 그처럼 오랜 세월을 살아갈 수 있다는 ‘장수학’이야말로, 느릅나무 옹의 전공과목인지도 모른다.
「좆같이 짧고도 허무하다네.」
내 대답이 늦어지자, 노인이 자신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내놓았다. 그렇다. 그는 지금 자신의 긴긴 삶에 대해 좆. 같. 이. 짧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 장구한 세월을 살고도(적어도 천년 이상은 살았을 것이다) 자신의 지극히 짧은(!) 운명에 대해 저주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 같아선 신을 향해 특정 행위(오른 주먹을 바깥쪽을 향하게 한 뒤, 왼손바닥으로 주먹의 겉을 아래로 훑는 행위. 이때 오른 주먹을 빠른 속도로 위를 향해 솟구치게 하는 것이 포인트이다)라도 해 보이고 싶을지 모른다.
「속으로 나를 욕하고 있을 테지. 자네 같은 인간들로선 상상도 못할 만큼 장구한 세월을 살아온 주제에 이처럼 부족하다고 투덜대고 있으니.」 라고 노인이 말했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나는 시인했다.
노인 엘프의 지저분한 잿빛 수염이 슬쩍 움직였다. 그 빈틈 사이로 수염만큼이나 비위생적으로 보이는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똑같다네. 다를 게 없어. 천년을 사는 놈이나, 백년을 사는 놈이나, 하루도 다 못살고 지겨워 거미줄로 뛰어드는 놈이나 …. 결국은 개인의 선택적 내재 취향 문제일 뿐이지.」
개인의 선택적 내재 취향!
세상엔 사람의 머릿수만큼이나 다양한 ‘선택적 내재 취향’이란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천년을 살고도 모자라 하늘을 향해 감자바위를 먹이는 놈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생일에 거미줄을 향해 다이빙하는 인생도 엄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예전에 필사가(筆寫家) 한 명을 알고 지냈지.」 라고 노인이 말했다.
「필사가의 하루는 참으로 단순하게 이루어져 있다네. 새벽부터 밤늦도록 경전을 베끼고 또 베끼는 일이 전부니까 말이야.」
사원에서는 경전의 보관과 복제를 위해 전문적인 필사가를 돈을 주어 고용하기 마련이었다. 필사가는 사원에 머물며 산더미처럼 쌓인 케케묵은 고대의 경전을 필사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필사가의 엄격한 생활과 일에 대한 열정에 대해서는 훗날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혹시 대사원의 도서관을 가 본 일이 있나?」 하고 노인이 물었다.
나는 있다, 라고 대답했다. 실은 내가 자란 곳 역시 사원이었던 것이다. 책장을 찢어 종이배를 접었다가, 공범자들과 함께 끌려가 늙은 수녀에게 회초리로 신나게 엉덩이를 두들겨 맞은 장소 또한 바로 도서관의 한 구석이었다.
「보통 필사가들이 1년에 필사하는 경전의 양을 알면 자넨 결코 믿지 않을 걸세. 다만 자네가 상상할 수 있는 양을 훨씬 넘어설 것이라는 것만은 보장하지. 하여튼 새벽밥을 먹고 나서부터는 두 번째 달 파미르가 중천에 솟을 한 밤중까지 희끄무레한 등잔불 밑에서 경전을 베끼고 또 베끼는 일을 하는 걸세.」
차라리 하루살이의 인생이 낫겠군.
「그래서 내가 물었지. ‘도대체 어떻게 이 많은 경전을 베낄 수 있는가? 나 같으면 하루를 못 넘길 걸세’ 하고 말이지. 사실 자신이 완수해야 할 경전의 리스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혀올 지경이었거든.」
「뭐라고 대답하던가요?」 내가 묻자, 노인은 손가락으로 옆머리를 갉작대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응 … 그냥 한 글자씩 또박또박 베껴 … 라고.」
과연 그 친구의 친구로다. 나는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라는 옛 말을 떠올렸다. 신중하기 짝이 없는 느릅나무 옹에 이어 자신의 지루한 삶에 비관해 자살해버린 하루살이, 그리고 이 멋대가리 없는 필사가에 이르기까지.
나는 문득 이 노인이 다른 사람 앞에서 ‘언젠가 숲 입구에서 만난 젊은 친구 하나가 있었지 …’라고 말을 꺼낼까 싶어 두려워졌다.
「그런데 그게 진리더라고.」
「진리요?」
「그렇지. 결국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인 게야. 천권의 책을 베끼든, 백 권을 베끼든, 단 한 장을 베끼든 결국 책을 베끼려면 한 글자씩 써나갈 수밖에 없는 거지. 누구든 단번에 열 글자를 쓸 재주는 없는 거라구. 한 글자씩 한 글자씩 정성을 다해 써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흐르고, 한 주일이 가고, 가시나무의 잎사귀가 떨어지고, 눈이 내리고, 그리고 청목련이 피어오를 무렵이면 결국 알 게 되는 것이지. 자신의 눈앞에 놓인 완성된 경전 사본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말이지. 내 친구를 위해 건배!」
난데없는 그의 건배 제창에 나도 모르게 배낭에서 또 하나의 포도주 주머니를 꺼내 건네고 말았다(이럴 수가!). 그는 축제 사탕을 얻은 어린아이처럼 행복한 얼굴로 주머니의 마개를 땄다.
「삶은 길고 짧은 게 문제가 아니야.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거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반드시 한 글자씩 써 나가야 한다는 걸세. 부디 두자 세자씩 쓰려고 하는 부질없는 짓이걸랑 이제부터라도 그만두어주길 바라네.」
노인은 이 말을 끝으로, 마치 낡은 밀가루 부대가 쓰러지듯 스르르 옆으로 미끄러지더니 이내 눈을 감곤 코를 골기 시작했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숲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등 뒤에선 노인의 잠꼬대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자넨 이 묘수풀이의 답을 알 수 있겠나?」
물론이다. 나는 처음 그 문제를 본 순간 일감으로 답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미리 말했지만 그것은 그리 난해한 문제가 아니었다.
「4의 2로 흑이 치중하면 다섯 수만에 백을 잡을 수 있는 것 같은데요.」
「클클클 … 자넨 바둑을 좀 아는군? 하지만 말일세 …」
노인이 몸을 뒤채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잠꼬대가 계속되고 있는지 모른다.
「흑선이 아니라 백선일세. 그 문제는 …」
수만 볼트의 벼락이 뒤통수를 일격하고 지나치는 충격.
왜냐고? 당연하다. 백선이면 문제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 충격은 재차 떨어진 이차 충격에 비하면 낮모기에라도 물린 듯 간지러운 것이었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백선으로 흑을 잡는 걸세.」
꽈꽝!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잘못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방금 시퍼런 불꽃이 눈앞에서 튀었다) 이 문제는 분명 흑선으로 백을 잡는 문제였다. 귀의 백 일단을 흑이 꽉꽉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백선으로 외곽의 흑을 잡으라고?
머리를 돌려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바위 위에 물이 간 낙지처럼 엎드러진 채 여전히 잠꼬대를 웅얼대고 있었다. 묘수풀이가 올려진 바둑판은 그의 늘어진 뱃살 아래 가리워져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발길을 돌려 숲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몇 발자국이나 갔을까. 그의 마지막 중얼거림이 귓가에 머물렀다가 흐릿한 꼬리를 물고 사라져갔다. 한 웅큼 봄바람처럼.
「한 글자씩이야 … 고개를 숙이고 한 글자씩, 한 글자씩 … 고개를 드는 순간 끝장이라구 … 알아? 우린 그걸로 끝이야 … 미친 놈! 거미줄인 거지 … 하루살이인 거라구 … 끄으 … 쿨 ~」
한 걸음씩, 한 걸음씩 …
될 수 있는 한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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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릿글 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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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난해하군요...웰빙 판타지와 같은 아뎌는 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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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난해하군요...웰빙 판타지와 같은 아뎌는 내지 마세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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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이 많으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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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