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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와 조수미의 비교, 그 달콤한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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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자동차와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이 공동이벤트로 마련한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만든 인물’ 최종 선정투표에서 이창호 9단이 득표율 35%로 2위에 머물렀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는 가벼운 일과성 이벤트였지만 바둑을 사랑하는 많은 팬들에게는 아쉬운 결과였을 것 같다. 그러나 또 달리 생각하면 최종 선정투표에 함께 올라 1위를 차지한 상대가 세계적인 성악가 조수미 씨였다는 것, 그리고 클래식과 바둑의 사회적 위상이나 영향력을 비교할 때 이 결과가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자위하고 싶다.
바둑을 업으로 하는 사람으로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분명히 이창호와 조수미 사이에는 그만큼의 거리가 있다. 세계 최고의 소프라노와 세계 최고의 프로기사라는, 단순비교의 거리가 아니다. 클래식과 바둑의 사회적 위상과 영향력이 다르다는 현실을 접어두더라도, 조수미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가 우리에게 그저 세계적인 성악가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클래식이라면 백지에 가까운 기자에게도 조수미란 이름은 그리 어색하지 않다. 그는 몇 해 전 1만3천여명의 네티즌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문화예술인’으로 선정된 바 있다. 그는 제도권의 온실 속에서 안정된 전성기를 누리다가 퇴역에 즈음하여 대중무대를 기웃거리는 화초 같은 성악가가 아니다. 세계적인 지휘자 카라얀으로부터 ‘100년만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신이 내린 목소리’라는 극찬을 받은 그는 절정기에 스스로 대중의 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이전의 그 어떤 성악가도 보여주지 못한 마력적인 고음으로 대중을 끌어당겼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가 대중의 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대중이 그의 품으로 이끌려간 것이다. 80만장 이상 팔려나간 ‘온리러브’에 이어 MBC 드라마 ‘허준’의 주제가 ‘송인’을 불러 클래식의 영역을 훌쩍 뛰어넘으며 대중스타를 무색케 하는 인기를 누렸다. 특히, 고음부분에서 소름이 돋을 만큼 짜릿한 감흥을 안겨주는 KBS 드라마 ‘명성황후’의 O.S.T ‘나가거든’은 발표 사흘만에 14만명의 네티즌이 감상, 일시적인 ‘조수미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였다.
어쩌면 이창호 9단이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만든 인물’의 최종 선정투표까지 올라 조수미 씨와 겨룰 수 있었던 것은 시기적으로 운이 좋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연초, 금강산대회전에서 전통의 최고(最古) 타이틀 국수를 잃으며 1승 5패의 참담한 성적으로 바닥을 친 직후 적지에서 연출한 두 편의 대역전 드라마, 제6회 농심 신라면배 5연승 우승과 제5회 춘란배 우승의 뜨거운 감동이 팬들의 가슴에 고스란히 남아있었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드러난 ‘바둑의 한계’라고 말하면 너무 자조적일까. 그렇지 않다. 적지 않은 팬들이 해당 이벤트의 참여자 성향(젊은 여성이 주류를 이룬다는)과 선정 절차의 공정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가벼운 일과성 이벤트의 결과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기자는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만든 인물’ 이벤트에서 오히려 바둑의 가능성을 보았다. 이번에는 조수미와 이창호라는 특정인을 접고 성악과 바둑을 비교해보자.
성악은 이미 까마득한 옛날부터 음악교육의 하나로 제도권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 육성돼왔고 바둑은 이제 막 그 바깥에서 체육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으나 아직 그 정체성조차 제대로 규정되지 않았다. 한국기원이 ‘바둑은 스포츠’임을 천명하고 전국바둑교실협회와 백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며 바둑 스포츠화에 매진하여 대한체육회 인정단체로 진일보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후의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두 분야의 사회적 위상과 영향력의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성악과 바둑의 세계대회도 비교해보자. 성악의 세계대회라고 할 수 있는 세계 유수의 콩쿠르 우승자는 말 그대로 ‘세계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세계 최고’로 통하며 거기에 상응하는 예우를 받는다. 바둑은, 바둑의 세계대회 우승자는 어떤가. 오래 전 바둑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친구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바둑의 세계대회가 무슨 세계대회냐? 솔직히 그건 한중일 3국이 겨루는 세 개 대회 아니냐?’는 비아냥거림이었다.
기자는 바둑의 발상지와 문화적 특성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지만 그 친구를 설득하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기억한다. 솔직히 고백하거니와 ‘한중일 3국이 세계바둑의 사실상 전부라는 현실’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만이 가세하여 4개국이 된다 한들 무엇하겠는가. 유럽이나 미주지역에서 보자면 결국은 아시아 지역 4개국 프로들의 잔치일 뿐 아니겠는가. 아시아권을 벗어나면 이창호와 조수미의 거리는 더 크게 벌어질 것이 틀림 없다. 그게 바둑의 현주소다.
 자, 여기서 원점으로 돌아가보자. 기자는 앞서, 이창호 9단이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만든 인물’ 최종 선정투표에서 조수미 씨에 이어 2위를 차지한 것에서 오히려 가능성을 보았다고 했다. 바로 그것이다.
바둑은 누천년의 역사가 무색하게도 아시아의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것도 아시아 전체가 아니고 한중일 3국을 중심으로 이제 막 대만이 눈높이를 맞춰 올라서는 정도다. 세계대회는 있지만 아직 진정한 세계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미완의 세계라는 얘기다. 그런 상황에서 이창호 9단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문화예술인’으로 선정된 바 있는 조수미 씨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사실은 추호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일이다.
바둑은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초고속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비로소 진정한 세계화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바둑 프로그램이 개발되면서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벗어나 세계 어느 국가, 어느 사람과도 바둑을 둘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누가 알았겠는가. 언어의 벽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바둑의 특징이 초고속 인터넷시대의 가상공간과 절묘하게 매칭될 지를).
그러나 아직은 걸음마단계다. 젊은이들은 물론, 노인들까지 능숙하게 유럽, 미주지역의 바둑 애호가들과 활발한 교류를 갖고 한국기업의 후원으로 전세계에 바둑대회가 열리고 푸른 눈, 금발의 프로기사가 우리의 눈에 익숙해 질 때, 그때가 진정한 세계바둑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황홀한 세계바둑시대를 이끌어갈 향도는 바둑의 세계최강국이면서 세계 최고수준의 초고속 인터넷 저변을 가진 한국이다(사이버오로는 유럽, 미주지역을 겨냥한 바둑 프로그램 영문버전을 출시, 시범서비스중이다).
그런 세계바둑시대가 되었다고 가정하고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만든 인물’ 이벤트를 다시 해보자. 달콤한 기자만의 상상이지만 이번에는 조수미 씨의 팬들이 항의하지 않을까. 선정절차에 문제가 있다고. 도대체가 바둑 두는 사람들은 ID가 몇 개냐고. 연령 제한을 둬야 한다고(할아버지부터 아이들까지 온 가족이 다 찍는다고).
덧붙이는 글: 저를 포함한, 바둑을 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피가 뜨겁습니다. 기아자동차와 다음의 이벤트, 조선닷컴의 이창호 9단 인터뷰 안팎을 지켜보며 다시 한번 느낀 사실이죠. 팬 여러분, 바둑은 누가 뭐래도 폭력적, 선정적 동영상게임이 난무하는 시대에 온 가족이, 전세계인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사회적 기여가 높은 정신의 문화입니다. 긍정적인 눈으로 수읽기에 여유를 가지면 무한한 자부심이 생겨납니다. 이 시대에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행복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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