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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날에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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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날에 문득,
2010-03-31     프린트스크랩
▲ 한나라의 미녀, 왕소군의 초상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그런 말이 있죠? 시절이 하수상해서 그런지 봄이 왔는데도 봄 같지가 않고 차가운 바람이 사방을 횡행하더니 문을 나서는 아침 출근길, 비가 내립니다. 구질구질한 기분이 들지 않는 이유는 이 비가 참으로 봄을 알리는 전령사이길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봄은 왔는데 봄 같지 않다. 요즘은 암울한 시대상황을 묘사하는 데 많이 사용되지만 이 말이 원래는 대단히 애처로운 유래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바로, 중국 고대의 사대미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왕소군(王昭君)의 일화입니다.

봄비가 그 애달픈 기분을 일깨우는군요. 왕소군은 한(漢)나라 원제(元帝) 때의 궁녀로 절세미인이었죠. 원제는 후궁이 워낙 많아 일일이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궁중화가 모연수(毛延壽)에게 후궁들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한 뒤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후궁을 낙점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많은 후궁들이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면서 잘 그려주도록 간청하였는데 유독 왕소군만은 뇌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모연수는 그녀의 얼굴을 매우 추하게 그렸고 황제 역시 당연하게 추녀로 알려진 왕소군을 곁에 두지 않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습니다. 최고 통치자가 국사에 전념하지 않고 그런 일에 심력을 낭비하고 혈안이 돼있으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습니다. 백성들의 살림은 피폐해지고 외적의 침략이 빈번해집니다.

흉노족의 왕 호한야(胡韓耶)가 ‘한나라의 미녀로 왕비를 삼고 싶다는 간청을 올린’것은 사실, 청이 아니라 겁박이었겠죠. 황제는 추녀로 잘못 알고 있던 왕소군을 호한야에게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 내몽골 오르도스지역 호화호특시에 있는 왕소군 조각상

왕소군이 흉노로 떠나는 날, 처음으로 왕소군의 실제 얼굴을 보게 된 황제는 격노하여 모연수를 처형합니다. 쯧쯧,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들입니다. 설마 이국만리 낯선 타국으로 떠나는 왕소군의 처지가 가엾어서 화를 낸 건 아니겠지요.

그저 뇌물을 주지 않았다는 죄 아닌 죄로 졸지에, 말도 통하지 않는 흉노의 왕에게 끌려가게 된 왕소군. 가는 길에 서글픈 심정을 금에 담아 연주하였는데 그 구슬픈 소리와 처연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날아가던 기러기가 날갯짓을 잊고 떨어졌다고 하네요. 빼어난 미인을 지칭하는 ‘낙안(落雁’이라는 표현이 여기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오랑캐 땅인들 화초가 없으랴만,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즉, 오랑캐 땅에도 화초는 있겠지만 정 붙이지 못하는 이역에서 꽃을 대하니 봄이 되어도 봄날의 설렘이 없다는 뜻입니다. 왕소군은 죽어 흉노의 땅에 묻혔는데 겨울이 되어 모든 풀이 시들어도 왕소군 무덤의 풀만은 늘 푸르렀다고 하여 그 무덤을 ‘청총(靑塚)’이라 부른답니다.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 실은, 다른 이야기를 하려던 것인데 ‘봄이 왔는데 봄 같지 않구나’라는 그 말에 그만 삼천포로 빠져버렸네요.

비 내리는 날 아침에 문득 떠오른 것은 사이버오로에 연재 중인 이청 선생의 ‘바둑의 노래’ 그 안에 소개된 옛사람의 일기 ‘갑오음청록(甲午陰晴錄)’입니다.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옛사람들이 어떻게 바둑을 즐겼는지, 사대부가 아닌 평범한 서민들이 즐긴 바둑은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는 생생한 기록이기에 남다른 감흥이 있습니다.

먼저, 이런 소중한 자료를 발굴해 이야기의 옷을 입혀준 이청 선생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선생과 마주앉아 이야기하다 보면 늘 공감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 이청선생의 칼럼에 소개된 갑오음청록(甲午陰晴錄) - 옛사람의 일기

바둑이 ‘스포츠’라고 합니다. ‘문화예술’과 ‘스포츠’의 사이에서 갑론을박, 말도 많았습니다만 이제는, 대한바둑협회가 발족하고 대한체육협회의 정가맹 경기단체로 등록된 데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의 정식종목으로도 채택됐으니 이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둑이 스포츠가 되었다고 해서 문화예술과 완전히 갈라서는 것은 아닙니다. 바둑의 특성 중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경쟁이라는 일면에서는 스포츠에 가깝지만 누천년 선각들의 연구와 통찰로써 쌓아온 바둑의 개성은 오히려 문화예술에 더 가깝습니다. 이청 선생과 기자의 공감은 그런, 바둑계(제도권)의 편향된 시각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국가의 해당 행정단체 그리고 한국바둑의 중추를 이루는 한국기원과 대한바둑협회가 바둑이라는 스포츠에 쏟아온 노력과 정성의 대부분은 일시적인 바둑대회나 관련 행사를 위해 소모돼왔습니다.

물론, 그런 노력과 정성을 무시하거나 그런 일들이 몰가치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둑대회도 관련 행사도 당연히 바둑저변 확대에 도움이 되고 바둑 발전에 힘이 됩니다. 오히려 거기에 쏟는 노력과 정성을 알기에 아쉬움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둑을 두는 행위’ 또는 ‘바둑을 더 잘 두기 위한 학습’에 치우친 ‘균형의 부재’에 있습니다.

바둑은, 대중의 눈에 보이는 ‘두는 행위’도 중요하지만 좀 더 중요한 바둑의 가치는 두기 이전의 사고(思考), 또 그렇게 누천년 쌓인 선각들의 연구와 통찰에 있습니다. 거기에는 인간과 우주를 아우르는 위대한 세계관(世界觀)이 존재합니다. 더러는 서적과 기록으로, 더러는 구전으로 이어진 그것들을 우리는 ‘바둑 문화유산’이라고 부릅니다.

눈 푸른 이방인들을 매혹시키는 바둑의 힘은 단순하게 ‘잘 두는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바둑에는, 물질문명의 폐해를 먼저 체험한 저들이 지향하는 정신의 세계가 존재합니다. 세계의 많은 바둑마니아들이 고대의 국수, 명인이 머물다간 고택(古宅)이나 유품에 열광하는 이유도 그 자리에 서는 순간, 그런 유품을 보는 순간 국수, 명인의 정신을 공유하는 그윽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둑을 국위선양의 주요자원으로 인정한다면, 글로벌시대의 국제무대에서 항구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세계가 좇는 바둑문화 강국의 위상을 구축하는 데는 일시적이고 소모적인 바둑대회, 관련행사를 양산하는 일보다 우리의 ‘바둑문화’를 장려하는 일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해당 행정단체의 명칭이 ‘문화체육관광부’라는 사실이 새삼스럽습니다. 그렇군요. 문화와 체육은 둘이 아닙니다.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한국기원, 대한바둑협회 등 바둑단체와 유관업체의 지원과 협력도 그런 균형을 갖추었으면 좋겠습니다.

◀ 이청 선생

“중요한 사료 같아서 바둑학회 학회지에 글을 실어보려고 문의했더니 회비를 내랍디다. 바둑사료를 찾아다니고 발굴하는 일만 해도 발품, 손품을 적잖이 팔아야 하고 경비도 수월찮게 들어가는데 그런 고생을 해가며 만들어낸 글을, 돈 내고 실으라니요. 제가 어디 글 싣지 못해 환장한 사람도 아니고…. 하하하.”

이 글의 동기가 된 이청 선생의 말입니다. 그날, 커피 한 잔의 상념이 비 내리는 아침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바둑을 사랑하고 지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10년 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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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ak |  2010-03-31 오후 2:42:46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동감입니다 바둑은 승부보다 수담의 즐거움이 더 근본입니다 더불어 수담과 커피한잔이
그리워집니다  
나무등지고 |  2010-03-31 오후 3:08:0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옳으신 말씀입니다.^^  
알프스소년 |  2010-03-31 오후 3:18:31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대한바둑협회나 바둑학회 들으라고 하는 소리군.
누가 반성이나 제대로 하려나.
글을 돈을 주면서 가져와서 실어야지 돈내면 실어주겠다니 ㅎㅎㅎㅎ
조남철 선생이 생전에 신문기전 창설할 때 신문사와 똑같은 소리하는군.
진정 문화는 버리고 금전만 남기고 싶은가 보구나...  
자객행 돈이면 최고지요^^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삽니다.
棧途 |  2010-03-31 오후 4:04:46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스포츠는 문화의 한부분입니다. 스포츠가 문화와 동떨어진 어떤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스포츠 문화하며 칸막이를 하는 뭐 그런 제도때문에 그리된것이지요. 모두 발전해야 합니다. 프로기사, 학회, 대학바둑학과등등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dugubee |  2010-03-31 오후 4:11:58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행여나 해서 적습니다. 학회지라 했나요? 학회지에 ,논문,을 게재할려면 페이지 챠지(page charge)를 지불해야 합니다. 유명한 nature, cell, science에 게재된 논문은 다 그런 과정을 거칩니다. 학회지란 구독층이 몇몇 전문가들에 한정되니까 학회지 발매로는 발간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주 ,아주 옛날부터 이런 식으로 운영해오고 있는 거지요. 특히 앞에 거명한 학회지는 게재료도 비쌉니다. 참고가 되었으면.  
문인 이야기를 듣고 보니 화가 좀 사그러집니다. 어느 독지가가 거금을 쾌척하여 운영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사정에 있는 학회지 측의 사정도 있었겠군요.
운영자W |  2010-03-31 오후 4:16:44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바둑학회 학회지 기고에 관하여 오해가 있어 정정합니다. 학회지 게재요청은 이청 선생이 하셨다고 합니다.  
dugubee |  2010-03-31 오후 4:20:35  [동감1]  이 의견에 한마디
위에 거명한 학회지에는 수많은 투고자가 돈내라는 통지가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것도 많은 돈을요. 그 통지는 자기의 논문이 심사를 통과했다는 것을 뜻하니까요. 그러나 초청된 경우(invited paper)는 어떤지 모르겠군요. 바둑학회지는 아직 일천하니까요. 손선생, 노여움을 푸시고 한번 알아보신후 한번 다시 오로 독자들에게 알려주시면 어떨까요.  
운영자W 학회지 게재요청은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둑학회지는 nature, cell, science와는 여러 면에서 다릅니다. 비용요구는 아무래도 좀...
Unify(S) |  2010-03-31 오후 4:38:44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안목이 부족하니 어떤글이 중요한지 아닌지를 모르겠지요...그저 학회지는 돈받고 글만 올리면 장땡이니..ㅎㅎ  
dugubee |  2010-03-31 오후 7:28:54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이청 선생의 이메일을 좀 알수 있을런지요. 운영자께서 알려 주실 수 있으시면 제 메일(haskim@pusan.ac.kr)로.  
운영자W 관심 감사합니다. 이청 선생께 연락드리겠습니다. 두 분의 교류는 그 이후에...
돌담yago |  2010-04-01 오전 1:49:37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정말 바둑을 사랑 하시는 분 이라는 것을 느낄수 있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자료 부탁 합니다. 사랑 합니다.
 
靈山靈 |  2010-04-02 오전 6:45:5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오.
영화인줄~ 왕산군 이쁩니다.

 
靈山靈 월간바둑 모아놓은거 보사 손선생님이 소설가인줄 알앗습니다. 늦게 알아보아 죄송^^;;
靈山靈 소설광이거든요. 망가도 촉산객을 가장 재미잇게 봤지요. 구영탄것도 ~
haemosu |  2011-02-09 오전 2:15:2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예전의 미녀는 요즘 미녀와 뭔가 그 풍기는 이미지가 달러뿌러...기품이...ㅎㅎㅎ..  
문인 증말?
문인 |  2011-12-07 오전 8:50:27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오랑캐 땅인들 화초가 없으랴만,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해석이 절묘하네요. 전 지금까지 <오랑캐 땅에 화초가 없어 봄이 와도 봄같지 않구나.>로 정말 맛대가리 없이 해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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