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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선분(線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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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무변(廣大無邊)이야, 광대무변.” 52분의 장고 끝에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뇌더니 힘차게 돌을 밀었다.
1979년 2월 21일 일본 기성전 도전 제4국. 이시다 9단을 도전자로 맞은 후지사와 9단은 그 한 수로 반상의 한 줄을 그었다. 그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인 착상. 그 이후로 이제는 우리도 갖게 된 기하학적 상상력.
세상은 평면이 아니다. 그건 가을 햇살을 맞은 우리가 더욱 잘 안다. 아침마다 창을 열면 뭉텅 뭉텅 들어와 나를 풍선처럼 감싸는 선선한 바람, 바람. 창밖으로 눈을 돌리면 대지(大地)의 그릇으로 내려앉은 여름의 뜨거운 관념. 다시 돌아보면 어느새 겨울의 품이 그리워지는 내면.
깊어가는 가을을 맞아, 나는 가을을 표현하는 바둑을 하나 찾고 싶었다. 과연 그런 바둑이 나에겐 있는가. 있었다. 여기 이 기보. 흑2로 밀어간 바로 이 장면이 나의 가을, 나의 바둑이었다.
가을은 무상한 계절. 조락(凋落)의 의미를 앞서 깨우쳐주는 계절. 저 깊어가는 숲의 이야기들도, 저 마을 앞 펼쳐진 논밭의 풍성한 색상에서도, 우린 시간을 엿듣는다. 시간을 의식한다는 건 우주의 무상을 의식한다는 것. 가을은 결실의 길목에 서 있기에 우린 우리 태어난 뜻을 비로소 새겨보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반상으로 돌아가자. 나는 저 흑2를 내가 만난 바둑에서의 드넓은 선분(線分)이라고 부른다. 점(点) 하나로 한 줄 선분을 완성했다. 잎새 하나 하나에 연연하지 않고 가을 하나를 그냥 그어 버렸다. 돌연 완성되는 산과 들과 하늘의 크나큰 우주.
반상의 언어로 말하면, 저 흑2는 우변과 하변의 흑돌(▲)이 엊혀 있는 두 개의 선분을 잇는다. 반상의 입체감을 완성하는 하나의 교차로이다. 그렇다. 흑2는 우리의 안목이다. 세계는 우리 인간의 안목으로 열리고 닫힌다. 흑2에 굳이 백이 ‘가’로 틈을 비집으면 흑은 그저 ‘나’ 이하 ‘바’까지 상변 두점을 양보해 충분하다. 큰 관념과 자연의 틀을 바둑 하나에 담았거니, 굳이 다른 뜻이야 또 얻을 게 무어랴.
깊은 우물 속 푸른 하늘의 넓이를 증거(證據)하는, 바둑사(史)에 남을 독창적인 선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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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릿글 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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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hj080 |
｜ 2006-07-14 오후 3:14:00 [동감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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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의견에 한마디 |
후지사와의 대표적 한수라며 떠들석하던 전집의 해설이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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