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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론은 쓰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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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한 잔 홀로 즐기다가 불현듯 쓴다. 이 때가 유일한 때리. 이 글엔 이 때밖에 없으리. 이 때가 이 글을 쓸 때리.
순풍에 돛 달고서 배 떠나간다 물 맑은 봄바다에 배 떠나간다 저 배는 달 맞으러 강릉 가는 배 어기야 노 저어라 배 떠나간다 - 난 가끔 우울에 젖는다. 그런 때 그런 밤 입에서 흘러나온 노래. 까닭 없이 서러운 꿈에 젖는 그 때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책을 한 권 뽑았다.
서러울 때도 시를 읽지 않는 나에게 바둑이야 무엇 하리. 그런데 내 손에 잡힌 건 하시모토 선생의 대국집. 책을 펼친다. 펼쳐지지 않고 드러낼 책이 어디 있으랴만 본래 두 개 이상의 죽간(竹簡)을 책(冊)이라 하니, 합하면 책이요 펼치면 글이고 뜻이다.
좌우간 펼쳤다. … 내 노래 소리가 들어갔다. 쑤욱 들어갔다.
노래 대신에 자리를 잡은 게 있었던 것이다. 무엇일까. 그게 무엇일까. 하시모토 우따로 선생의 세계. 그 세계가 자리를 열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난 프로. 프로의 눈에는 한 눈에 들어온다. 기가 막히다. 수순이 필요 없다. 돌의 형태만 보아도 천재의 세계가 한 눈에 잡힌다. 감사! 감사! 천재가 펼쳐주는 그 세계에 감사!
노력해서 될 일이 있고 노력해도 안 될 일이 있다. 바둑의 세계도 그러하다. 재능이 첫째. 근성이 둘째. 노력이 셋째. 운은 넷째. 그게 내 보는 바다.
그러니 천재의 일을 감상하는 것도 복이다. 그렇고 말고. 하시모토 선생은 탁 트인 사람이다. 바둑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기보를 자세히 보라. 하시모토 선생이 흑인지 백인지 내 모르겠다. 아니다. 안다. 또 안다. 천재 아닌 상대도 천재처럼 안목이 넓혀졌구나. 하! 그렇구나. 동화가 되는구나!
천재가 세상을 연다. 인정하자. 천재의 기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바둑에서도 우린 지금보다 훨씬 왜소한 바둑만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런 천재의 작품에 말을 더하면 범상(凡常)으로 끌어내리는 우(愚)를 범하리. 내 아무런 말 더하지 않고 저 기보를 그냥 남기는 이유다.
그래, 그래서 난 기사론은 안 쓴다. 안 쓰겠다. 기보만 보겠다. 저 기보만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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