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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化石) 속의 초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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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보를 모아두었다가 한 번에 보는 습관이 있다. 매일 매일 약간씩 들여다보는 것은 인내를 요한다. 그래, 오늘 모아 보는 일을 했다. 그러다가… 그만 다음 기보를 봤다. 뜨거운 바람이 가슴을 훅 훑고 지나갔다.
지난 6월 15일 안조영 8단과 김주호 4단의 왕위전 본선. 우하귀 흑5가 놓여졌을 때 안조영은 가슴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아니다. 그 이전 흑3 젖힘 당하는 순간, 그 순간에 알았으리. 반상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리. 백2를 받다니! 저런!
흑5가 절묘했다. 다음 백A는 흑B 백C를 선수한 후 흑D로 빠져나가 그만이다. 백E 단수는 흑J까지 흑1 백2 교환의 덕으로 백이 잡힌다. 흑5에 대해 백D는 흑A로 E와 a를 맞봐 잡힌다. 그래서 실전은 백E 흑a 백A 패가 되었지만, 그래서는 이길 수 없다. 3집 반을 졌다. 백2를 E에 두었다면 1집반은 이겼을 터인데! 이런! 이런!
안조영은 김주호에게 지난 4년간 4연패를 당하고 있었다. 그런 입장이라면 이 바둑에 실린 부담이 적지 않았을 터인데. 10시간에 걸친 압박을 막 벗으려는 순간 저런 실수로 진다면 그 심리적 쇼크가 적지 않을 터인데.
시간이 약이 될까. … 안 될 것이다. 아니 되리라.
저 바둑부터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열흘이 지났다. 시간은 기억을 갖고 사라졌을까. 아니다. 시간은 살아있다. 관전자인 나에게도 그의 시간은 살아있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초읽기에 쫓기며 백2를 착점한 직후 흑3을 당할 때의 충격, 순간 온몸의 힘이 쭉 빠져 달아나는 그런 시간이다. 어떻게 아느냐? 흑5는 프로라면 한 눈에 보이는 것. 안조영은 발군의 수읽기 능력을 지닌 기사. 그가 저 수를 놓쳤다. 초읽기에 쫓기지 않았더라면 있을 수가 없는 사건.
반상의 돌은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돌의 수순을 따라가 보면, 이미 화석(化石)으로 굳어진 기보만이 남았더라도, 우린 언제나 그 때의 진상을 알 수가 있다. 하긴 바둑만 그러랴. 우리의 모든 과거라는 건 빛을 남기면서 사라지는 것. 우주 저 끝의 빛줄기가 우주 탄생기의 모습을 100억 년이 지난 후에도 우리에게 남겨 주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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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릿글 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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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4로 A에 두면 패가 되지 않나...그냥 죽는 것 보단 그게 나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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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ne |
｜ 2004-07-07 오전 10:57:00 [동감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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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의견에 한마디 |
거의 철학자 수준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감정도 기록된다는 것이죠. 진리 앞에서 그저 가슴 뭉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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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A로 두어도 패고 백 E로 두어도 패입니다. 그냥 살아야줘 패가나면 손해를 감수 해야 하니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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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ofuqhek |
｜ 2004-08-26 오후 8:15:00 [동감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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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견에 한마디 |
오호! 말없는 반상에 아무렇게나 놓여진 돌 하나 하나에 담겨진 무게는 과연 몇근이나 갔던고...그때의 스쳐간 온갖 감정의 여진이 아직도 생생하건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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