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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병이 쏟아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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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6월 5일 저녁 6시 43분 중국 북경.
1940년 12월 늦은 밤 일본 가마쿠라(鎌倉).
6시 45분의 나는 여기에 앉아 글을 쓴다. 북경의 저 4단젖힘을 보고.
1939년 7월 28일에 시작한 기타니와 오청원의 치수고치기 10번기는 그 이듬해 10월 기타니가 1승 5패를 기록하면서 치수가 호선(互先)에서 선상선(先相先)으로 고쳐졌다. 일본의 1인자에서 몰락으로 떨어진 치욕. 머리를 밀면서까지 투혼했던 기타니는 쓰러졌던 것이다. 그러나 승부는 끝났으되 10국을 다하겠노라는 약속은 지켜야 했다. 12월 제7국. 가마쿠라 신사(神社).
기록은 하기와라 초단. 17세 소녀는 시간이 지나면서 압박감으로 안색이 변해갔다. 어둑한 전등불 아래, 종반에 접어들면서 기타니가 흑101, 103, 107 세 수로 3단젖힘을 두었다. 순간 소녀는 깜짝 놀라 앞에 놓인 잉크병을 쓰러뜨렸다. 3단젖힘은 듣지도 못한 것. 오청원은 백108에 1시간 30분을 소비한다.
기보를 보자. 오늘 난 저 4단젖힘을 인터넷으로 감상하면서, 과연 오늘도 잉크병이 쓰러졌을까 했다. 물론 난 안다. 잉크병은 쏟아지지 않았다. 쏟아질 잉크병이 없어서 쏟아지지 않았을까. 아니다. 난 안다. 쏟아질 긴장감은 이제 사라진 시대가 된 것이다.
저 바둑을 둔 요다 9단과 이창호 9단(흑)에게 실례가 될지는 몰라도, 이미 바둑은 다른 시간에 들어섰다. 1940년대 일본은 전쟁 중. 그 와중에서도 바둑을 예도(藝道)의 자화상(自畵像)으로 받아들인 중국인과 일본인, 그들이 어두운 전등 아래에서 혼신을 다한 그런 시간은 지나갔다.
이제 그런 시간은 없다. 치수고치기 10번기와 같은 절박한 대국이 없어서가 아니다. 바둑은 이제 한국은 물론 일본과 중국에서도 고독한 수도자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있다. 이런 때에 어찌, 두 기사는 물론이고 기록자에게도 잉크병이 있겠는가.
그건 저 대국을 대하는 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은가. 저 대국을 대하는 우리만 보아도, 우리는 알 수 있다. 바둑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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