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상에 명언이 하나 있다. 반전무인(盤前無人). 상대를 의식하지 않는 자세로 바둑을 두어라, 그런 뜻이겠다. 상대가 약하게 보이면 교만해지고, 상대가 강하다고 여겨지면 위축되는 것이 마음. 그러기에 마음에 상대가 사라지면 냉정하게 반상만을 주시할 수 있다. 관찰과 집중의 힘이 강해진다.

그러나 실로 가능할까? 프로들은 어떨까. 아마추어에 비해 훈련은 되어 있다고 하겠는데 수준은 모르겠다. 아니, 상대를 의식 아니 하는 것은 프로의 세계에선 더욱 어려울지도 모른다. 때로는 승부를 앞두고 기보를 연구해서 상대의 기풍과 장단점을 아는 것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의식치 못하면 승부는 훨씬 힘들지도 모른다. IBM 컴퓨터 딥 블루(Deep Blue)에 패배한 체스의 명인이, “감정이 없는 은산철벽을 대한 기분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다.”고 술회했으니 말이다. 하긴, 그것도 아니 느낄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반전무인의 단계라고 하겠다.

이런 건 어떨까. 임해봉이 대마 사냥꾼 오오히라 9단과 1972년 본인방전 리그를 두었을 때의 일이다. 오오히라는 잡을 수 있었던 대마를 잡지 못했는데, 까닭은 이랬다. 오오히라가 대마를 엿보고 한 수 두었는데 임해봉이 손을 뺐다. 그러자 오오히라는 “엇, 살아있었군.” 하고 자신의 실착으로 인정, 다시는 대마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임해봉도 며칠 후까지 몰랐고.

기보는 얼마 전 고근태 5단과 루이 9단(백)의 대국. 흑6은 실수였다. 그러나 맥점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드는 수로, 관전했던 나도 “야, 멋진 수인데!” 하고 감탄했었다. 루이는 흑6 이후 알파벳 순으로 두었는데, 흑a 백b 흑4가 흑의 선수라 큰 손해였다. 백이 A가 아니라 a에 두었으면 오히려 흑6은 1집 손해의 수였는데 말이다. 그러나 고근태는 스스로 맥점이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했다. 루이도 그리 믿었을 것이고.

대국 후 루이가 알았다면 씁쓸한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그래. 프로들의 세계, 마음으로 이루어진 세계. 그래서 마음과 마음이 이래저래 통하는 세계.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세계. 프로도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