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마 시절 - 76년, 마지막 고교생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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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상 일기(2월 10일) - 나의 아마 시절 - 76년, 마지막 고교생 대회
오후 3시 54분.
乙酉年의 둘째 날이다.
오늘, 날이 매우 춥다고 하던데 그래도 낮이야 다르구나. 청명한 날씨. 외출을 나갈까 말까 고민하게 만드는 밝기. 이런 날 이런 날씨. 이런 활기와 이런 투명함.
76년 봄에는 고민했다.
아무래도 그냥 지내서는 대학 가기는 요원한 것이 분명했다. 그래 학교 수업에 한 번 들어가보기도 했다. 선생이 기미독립선언문을 외우라하기에 외워도 봤다. 참으로 멍청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시험도 한 번 봤다. 이번에는 132등. 540등에서 132등이니 그런대로 쓸 만했다. 내 동기 중에서 약 70명이 서울대로 갔으니 심리적 안정감을 약간은 얻었겠다. 시간이 지나면 되겠군. 그런데 그것도 잠시.
입단대회 낙방하고 돌아서는 순간 고교생 대회가 열렸다. 기억도 뚜렷하게 5월 17일. 그 날이 바로 제9회 학생왕위전이 열렸던 날이었다. 고교생대회라 ….
난 나에게, 그리고 가족에게, 그리고 충암학원에게 빚진 것이 있었다. 난 바둑을 두려고 서울 오지 않았던가. 빚은 갚도록 하자. 충암은 나에게 바둑의 공간을 주지 않았던가. 나는 나에게 자존심을 낮추도록 허락한 적이 없었다. 가족은 내가 그래도 바둑을 좀 두는 줄 알고 있었다.
지난 해 나는 6명 중에서 6등. 이번에 그래도 3등이라도 해야 되지 않겠는가. 사실 3등은 할 수 있을 듯도 했다. 난 고교 3년생. 1년 후배인 조대현 군과 강만우 군을 제외하면 나에게 상대는 없었다. 그건 알 수 있는 일. 지난 75년엔 참가생이 약 60명. 대구 MBC나 마산 학초배 등을 다녀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입단대회만 나가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누가 어느 정도 두는가를. 나는 누구보다는 약하지만, 누구보다는 약간 강하다는 것을. 그것을 수치화할 수 있을 정도로 판단할 수 있었다.
사실 그냥 학교 수업은 들어갔어도 되었으리. 그래도 3등은 했으리. 대만에 한중고교생 대표로 나갈 수 있으리. 그것으로 체면은 세울 수 있었으리. 고교생 대회 대표 정도면 당시로서는 아마추어로 충분한 실력이었다.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러나 묘한 것이 심리. 바둑이 맘에 다시 잡히니까 수업에 들어가기가 싫은 것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다시 두자.
바둑을 두었다. 불과 2주 정도의 수업은 잊혀지고 나는 돌아갔다. 내 생활로 돌아갔다. 역시 바둑은 재미있는 것.
5월 17일과 18일. 나는 조대현과 강만우보다 약했지만, 그들이 가볍게 두어주어서 공동 1위를 했다. 임선근 군이 부산에서 지난 해에 이어 다시 올라왔지만, 아직은 약간 약했다. 충암 출신 3명에게 한 판씩 고루 맛을 본 것은 매우 아쉬웠으리. 나는 임선근 군에게 지금까지 2승 이후 이겨본 적이 한 판밖에 없었는데 3번째 이긴 것은 입단 후 87년의 신왕전 바둑. 2승은 75년과 76년의 고교생대회에서 얻은 것. 몇 판을 졌느냐고? 그런대로 기억력이 좋다고 평을 받는 나지만, 그건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혹시 한 번도 안 진 거 아닐까? 하하.
임선근(白)과 문용직의 대국
나는 76년 여름엔 입단대회 본선 문턱까지의 실력은 되었다. 그건 다음 바둑이 일부 증명한다.
박병학 선배(黑)와 문용직의 대국
75년과 비교해서 분명하다. 75년 제8회 고교생대회에서 나는 6등 꼴찌를 했는데 당시 박병학 선배는 5등을 했다. 바둑을 보면 멀었다.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임선근 군은 나보다 빨리 80년에 조대현 군과 함께 입단했으니 재능이 상당했다. 그건 뚜렷했다. 그는 바둑도 중학교 때 배웠으니 늦어도 한참을 늦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입단 후 25연승도 기록했다. 강만우 군은 78년 입단. 과연 당시 고교생의 실력을 알 만하다.
바둑의 내용을 보니, 지금의 우리들보다 당시의 우리들이 좀더 재주가 있는 듯이 보인다. 시간의 힘 때문일까. 수순에 활력과 힘이 담겨져 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서 헤맨 흔적이 엿보인다.
그러나 76년엔 나도 임선근도 부족했다. 그건 여전히 저 앞의 기보가 말해준다. 입단실력이 될 때까지는 실로 77년의 봄까지 나는 기다려야 했는데 그건 5월에 둔 저 앞의 기보로부터 약 8개월이 흐른 다음이었다.
5월 고교생대회가 끝나니 다시 돌아온 것은 기다림. 바로 그것이었다. 가을의 입단대회. 그 때까지 또 몇 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과연 그 시간 동안 나는 나를 이겨낼 수 있을까. 나는 대학 4년 때 고시공부도 한 번 해보았는데 정말이지 그 1년이란 시간은 너무나 지리한 것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건방질지도 모르지만, 사실 3개월만 주어졌다면 고시를 합격했을 것도 같다. 하하. 그 녀석. 떨어진 놈이 말은 잘하는군. 그래도 말이다. 때로는 운이라는 게 묘하게도 작용한다. 넘쳐나는 시간은 괴로운 것이다. 그것을 넘치지 않게 쓸 수 있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을 확률이 크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건조한 겨울이 지나가나….
어두운 터널의 앞에는 언제나 환한 햇살이 있을 것이지만….
때로는 그 터널이 너무나 길게 잡혀있을 때도 있다.
어둠에 익숙해져 버릴 수도 있다.
지쳐서 걸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
걸어갈 수밖에 길은 없다.
오후 4시 51분.
밝은 乙酉年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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