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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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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상 일기(4월 13일) - 오후에
낮잠.
피곤해 자리에 누우니, 잠은 수직으로 떨어지고 귓가에는 바람 부는 소리가 수평으로 높이 흐른다.
정말 피곤해 누었는가.
아니다.
낮에 친구가 보낸 책을 택배원이 전해주었다.
읽고 싶었던 책.
그 책을 읽을까,
내일까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송고해달라는 월간 바둑 편집부의 경고를 받아들일까,
바둑 책을 볼까.
그 즐거운 고민 속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결정을 유보하는 것이었다.
물론, 원고 쓰는 것은 참 재미가 없다. 안 쓸 수도 없고.
프리랜서라는 건 이래서 좋다.
학교 선생이 그래도 할 만하다는 이유 하나는 방학이 길어서라든가.
깨어나니 3시 30분.
지금은 4시 07분.
그 사이에 원고에 넣을 통계치를 뽑았다. 음, 매우 흥미있는 사실이군. 그런데 chi-square를 계산해야 하는데, 하지 말까. 안 해도 뻔한데. 계산기도 없으니 계산에 들어가는 시간이 2시간은 되지 않을까.
잠에 들까 말까 하다가 들었었다.
얼마 동안 잤는지는 모르겠다.
잠에 들락말락 할 때, 그리고 잠에서 깨어날락말락 할 때 보이는 건 엉킨 관념들이었다.
저번에 보았던 goedel's proof에서 받은 인상이 남았었다. 이해도 못한 상태에서도 구겨 넣어진 관념이란 게 참 대단하다. 읽다가 말았는데도 말이다.
그것 말고도 뭐가 또 있었는데, 그게 뭔지는 꿈결에는 알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잊었다. 메모해 둘 걸! 정말 잠결에 이어진 게 생각은 생각일까. 논리적인 이음새가 있었던 걸까.
그래! 하나는 기억났다.
내가 지금 연재하는 이 바둑. 이 바둑에 대해서 생각했었다.
참 귀찮다면 귀찮은 연재다. 그래도 내가 하고 싶어 한 것이니, 이런 푸념은 그야말로 투정.
실전1
저 실전1 다음에는 어떻게 꾸려가나….
그걸 고민했던 것이 분명하다.
실전2
그 다음이 실전2로 흐르긴 흘렀는데 말이다.
백90은 그렇게라도 두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흑91은 모양으로 이 정도 자세를 갖추면 잡히지는 않을 것이다.
백92는 어려운 점이다.
백92는 어려운 점이다.
실전에서 이 국수는 백92의 착점을 꽤 고민했는데…
가만, 그 소비시간표를 어디에 두었더라?
주변을 둘러보니, 찾을 희망을 버려야겠다.
쌓이고 쌓여서 퇴적층을 이룰 정도의 방.
프린트한 용지가 여기 저기, 책도 아무렇게나 뒤섞여 있다.
얼마 전에 임선근 9단이 들렀다가 이 방 안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았지.
그 친구 뿐이랴.
소비시간표를 찾지 않겠다는 맘이 사실은, 사실은 말이다, 벌써부터 있었다.
다른 건 다 핑계다.
이미 승부의 매가리는 많이 빠져있었다.
아니다! 승부는 이제부터다.
다만 관전자의 맥이 좀 풀렸을 뿐.
이게 진실이다.
지금이라도 내가 술을 한 잔 넘기면 당장 다르지 않을까?
그러면 나는 저 반상을 활기차게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일 것이다. 두 말 하면 잔소리다.
그래서, 사실은 그래서 잠에 빠져들고 싶었던 게 낮잠의 일 푼 핑계는 됐다.
자, 저 반상을 어떻게 꾸려가나...............
정말이지, 해석의 여지가 관전자에게도 열려있다는 그 말은 정말이지, 지금이야말로 정말이지 절실하구나.
역시 이 바둑은 나의 바둑이었다.
이창호의 바둑이 아니었다.
최철한의 바둑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과연 저게 내 바둑인가? 진실로?
시간을 벌어야겠다.
정말이지, 이제야 내가 관전일기를 쓴다는 게 실감이 난다.
지금까지 거의 50회는 넘게 연재했던 듯한데.........
그렇다면, 내가 실감도 없이 연재했단 말인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오후, 4시 30분의 시간이 포착한 그 오후가 핑계가 될지 모르겠다.
4시 30분.
실전3
그래, 저 실전3 흑91 다음 A냐 B냐, 그건 백에게 달린 문제다. 난 지금은 모르겠다.
이 글을 오늘 오후에 올리면, 그리고 읽는 분들이 있다면, … 꽤 불편해 하실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것도 걱정이 되는구나.
뭐 좀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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