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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動搖가 있었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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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상 일기(3월 16일) - 내면의 動搖가 있었을 법하다
오랜 만에 밤에 쓰는 日記다.
日記라고 하지만, 그 동안 대부분은 아침에 썼다.
하긴 日記는 그냥 그 날의 기록이니 사실, 밤에 쓰던 낮에 쓰던 새벽에 쓰던 무슨 관계랴.
밤 8시 09분.
5개월 전만 해도 이 시간대가 되면 나는 술집에 있는 것이 일이었지. 언제나는 아니었지만, 대개는 그랬지.
나는 소주도 탁주도 고량주도 좋아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낯선 곳에 가면 그 고장의 탁주를 맛보는 것을 제1의 과제로 삼았다. 대체로 버스 터미널 옆 식당에서 그 과제를 해결했었다. 20대 때에는 내리자마자.
高粱酒도 좋아했다. 독하면 더욱 아꼈다. 위스키는 香은 사랑했지만 맛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香으로 말하면야 꼬냑도 좋고 葡萄酒도 좋다. 돈이 없어서 못 마시고 몸이 강건한 체질이 아니어서 못 마셨다. 시간이야 있었고 즐길 재주도 있었다.
그러니까 얼마 전이다. 친구 K를 만나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예전에 했던 말을 다시 끄집어냈다. 風流歲時記나 한 권 써보지 않겠느냐고. 아니 꼭 쓰라고 권했다. 삶을 바라보는 타고난 재치가 있고, 또 지식도 광범위한 K이기에 권했던 것이다. 그는 거절했다. 아니, 그게 무슨! 나에게 한 마디로 무안을 주었다.
사실 좋은 歲時記를 만난 기억이 별로 없다. 아마도 그 탓은 나의 寡聞에도 있겠지만, 그러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일 게다. 세상이 워낙 빨리 변해서 抒情을 불러내는 여건이 개인에게나 사회에게나 조성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도 酩酊30년이나 써볼까? K는 아까보다 더 심한 무안을 준다. 야! 말 되는 소리 좀 해라! 그렇다. 맞다. 돌아보니 말도 안 되는 주제다.
自重하자. 自重해라, 용직아. 네 주제를 알라.
너의 이 순간엔 반상이 구원이다. 반상을 봐라. 오늘 너는 대체 뭘 했니? 원고 하나 쓴 거 외에 대체 한 게 뭐냐? 잠, 밥, 明末淸初 國手였던 過佰齡의 저서 四子譜를 본 것 외에 뭘 했니? 커피를 석 잔 마셨다고? 그래 잘했다. 오로에서 이겨보아 님의 대국을 관전했다고? 그거 외엔? 창밖도 내다보았겠지. 전화도 했겠지. 인터넷에 들어가 뉴스도 보았겠지.
아냐. 난 잠도 꽤 자 두었지. 잠이 부족하면 머리가 맑지 못하잖아? 난 아까 잠들면서 뭘 다짐했지? 그래, 나중에 저녁 때 그 책을 읽자고 다짐했지. 그 책을 읽자고. 그래. 나는 프리랜서 아니냐? 그리고 꼭 생활에 의미를 붙여야만 하나?
가만 있자… 시간 기록표가 어디로 갔지…
그렇군. 여기 있군. 가만…, 중요한 거 하나 빠뜨렸구나.
지난 번에 보여드렸던 실전에서 시간을 만져보지 못했구나. 대국장과 대국자에 대한 그 어떤 描寫보다도 더욱 實感을 전해 줄 수 있는 時間. 착점 하나 하나에 들어간 時間. 착점의 과정을, 대국자의 고뇌를, 바둑의 흐름을, 그 어느 설명보다도 더욱 생생히 전해줄 수 있는 時間. 그 時間의 記錄.
실전1
흑27에 14분 17초
백28에 3분 26초
흑29에 2분 11초
백30에 3분 10초
흑31에 1분 59초.
나는 무미건조한 글을 좋아한다. 읽는 것이라고는 그저 그런 딱딱한 내용만 잡아서 그런가.
실전에서 백32부터는 착수에 시간이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기록표에도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이 때는, 내가 대국장에 들어가지 않았을 때다. 밖에서 폐쇄회로 TV를 통해 두 대국자의 손길만 보고 있었다. 반상이 저러하니 사실 대국장에 들어가도 별다른 느낌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뭔가 얻으려는 맘은 있었지만 말이다.
반상은 서서히 긴장을 높이고 있었지만, 그건 그 때가 지나고 난 다음의 내가 돌아보는 感情移入的 表現이다.
2월 7일의 당시는 달랐다. 이미 두 기사의 내면에는 깊고도 넓은 수읽기가 넘나들고 있었겠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관전자에게 반상은 아직 고요한 호수만 같았다. 흑27이 호수에 파문을 일으켰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사실 흑27은 간단한 문제 제기로 끝날 응수타진 정도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아니다. 이런 것도 있다. 깊게 들어가면 한도 끝도 없을 것만 같은 문제. 그러기에 그냥 넘기고 싶은 문제.
실전2
승부를 생활로 하는 프로기사라면, 흑27을 깊이 연구할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리 깊이 연구할 꺼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後者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듯도 하다.
물론 나는 반상과 시간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입회인으로써 여전히 대국장의 소음 문제에는 신경이 쓰였다. 난방용 물이 배수관을 지나면서 거칠은 호흡을 간헐적으로 뿜어내는 그 소리는 사실 대국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물론 11시를 넘어서면서 잦아들긴 했지만 말이다.
두 대국자는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소리에 민감한 편.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 특히나 큰 대국에서 대국자의 五感은 극도로 예민해질 것이다. 평상시에는 그냥 넘어갈 사소한 소리나 빛의 변화에 대해서도 당연히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두 대국자는 그러나 그런 내색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대국 직후 그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은 無用한 일이었다. 대국 내내 두 대국자의 氣色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대국장의 난방과 소음이 얼마나 대국에 불편을 주었는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대국이 끝난 다음 승자와 패자가 갈렸는데, 어디서 누가 그런 질문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질문은 다음 대국에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제3국에선 좀더 주의를 미리 기울일 수밖에 없는 문제이고, 제2국에선 대국 중에 복도의 발소리를 조금이라도 죽이기 위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정숙을 요청하는 것밖에 할 것이 없었다. 다행히 예리하면서도 소탈한 함양군수가 이 점을 빨리 해결해 주었다. 직원에게 대국장을 지나는 복도 멀리서부터 통제를 하도록 했던 것이다. 군청 직원들은 대국실 가까운 문으로는 아무도 나오고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래, 그건 그랬다.
실전3
반상은 실전3 백36의 응수타진으로 넘어갔다.
흔히 보는 응수타진. 습관처럼 一過性 目禮처럼 던져지고 지나가는 한 수. 그런 점, 백36.
참고도1
참고도1은 물론 백이 원하는 바. 이 국수도 그저 그렇게 생각했으리. 작은 증거가 있다.
백36에 1분 44초.
짧다면 아주 짧은 시간 소비다.
참고도2
참고도2가 된다면 백A를 남겨두어서 확실히 백이 좋다. 흑이 당한 꼴이다.
참고도3
참고도1이 흑에게 불만인 것은 참고도3의 패맛을 남겨두었다는 점에서 뚜렷하다. 아니, 그 이상이다. 참고도1 백3이 오면 반상의 구도가 매우 넓어진다. 좌변과 중앙에서 백의 품이 넉넉해진다. 하변과 좌변의 폭을 주의 깊게 돌아보는 것도 좋으리.
참고도4
참고도4는 흑의 무리. 백4 이후 흑A는 백B 흑C 백D까지 흑이 못 견딘다.
참고도5
참고도5가 흑에게는 깨끗한 모양을 주지만, 억울할 것이다.
어느 것도 불만이다.
당연히 최철한 6단의 長考가 이어진다.
흑37, 8분 35초.
실전4
짐작컨대, 이 국수에게 아차! 하는 심정이 조금이라도 스쳐지나가지 않았을까.
백32부터 흑35까지는 노타임.
백36은 1분 44초.
흑37은 8분 35초.
8분 35초는 긴 시간이다. 왜냐? 백36을 놓을 때의 시간이 말해주듯, 백36은 매우 가벼운 판단으로 결정한 착점이다. 그런데…, 그런데 상대는 長考를 한다!
나는 가벼운 맘으로 손길도 빨리 두었는데
상대는 착점에 무게를 두었다.
상대는 시간을 무겁게 사용했다.
이런 때, 내면의 動搖가 과연 없을 수 있을까.
나는 그럴 때 약간의 불만을 가진다. 나 자신에게. 분명하다. 바둑을 한창 열심히 둘 때의 나는 그랬었다.
밤 9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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