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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에겐 각자의 세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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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상 일기(3월 12일) - 각자에겐 각자의 세상이
이 국수의 바둑. 최 7단의 바둑. 그것을 나는 들여다보고 있다.
2월 7일의 함양에서 나는 그들의 바둑을 보았다. 메모도 매우 세밀하게 했다. 그들의 바둑을 언제든지 찾아볼 수 있도록. 나는 그들의 바둑을 메모해 두었다.
그러나 그들의 바둑이 있는가. 이미 그들은 떠났다.
나는,
나는 내 바둑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바둑은 내가 두는 내가 상대하는 바둑이다. 상대는 누구인가.
덫에 걸린 느낌도 없지 않다.
日記라는 形式. 그 덫에 걸린 것을 며칠 전부터 느끼고 있다.
日記…
보통 일기 쓰는 사람들은 日記를 밤에 쓴다. 그렇게 알고 있다. 하루의 기록이니 밤에 고요하게 앉아서 자기 전에 하루를 반추하는 것이 당연하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 여러 가지 방식이 있으리라. 시간을 따른 사건의 간결한 메모. 감정의 메마른 기록. 감상적인 회상. 후회. 반성. 희망. …
日記라…
나는 반상을 대상으로 쓴다. 日記라는 形式으로. 形式의 무서운 힘! 물을 담는 것은 그릇.
反省의 여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회상은? 그건 있다. 희망으로 日記를 뒤덮을 생각은 정말이지 추호도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고 믿는다. 누가 희망으로 하루를 채우는가. 나는 그런 詩人이 아니다. 그렇다고 절망의 시인도 아니다. 그냥 일상의 인간일 뿐이다. 바둑의 프로라는 것은 나에 관한, 나에 의한 일부의 記號作業일 뿐이다.
반상도 나도 모호하다. 이 글을 쓸 때는.
이창호도 그랬으리라. 최철한도 그랬으리라. 그들이 바둑을 둘 때, 누가 그들 옆에 있는가. 그들 옆에는 아무도 없다. 단지 바둑판만 앞에 있을 뿐. 일상적인 감정이 감히 끼어들 여지나 있을까? 내가 보기에 그건 없다.
지나고 나면, 표현이 개입해 過去를 재구성할 뿐이다.
밤이다. 잘 시간이다. 9시 19분. 3월의 11일.
어릴 적, 정말 신기한 것 중의 하나는 잠과 시간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치르는 날. 중3이던 작은 형과 나는 새벽에 일어난다. 몇 시였을까. 4시 쯤 아니었을까. 세수를 하고 책상에 앉는다.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서. 읽고 가는 것이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은 작은 형이다. 어머니로부터 독특한 유전자를 이어받아서 그런지, 초저녁부터 아침 늦게까지 잘도 자는 형이다. 낮잠? 형에게는 그것도 자신만만한 과목 중의 하나다. 하긴 큰 형도 그 점에선 다르지 않다. 그런데 말이다. 시험 당일 날은 어떻게도 그리 잘 일어나는지! 물론 부모님이 깨우신다. 그런데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형은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우리 집에서는 잠이 별로 없는 축에 속한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 용직이 저 녀석은 잠도 없어. 자주 듣는 말이었다. 시험날 나는 잠에 겹다. 그러나 작은 형은 다르다. 겨울이라도 세수하고 딱 자리에 앉는다. 아침 먹을 때까지. 나는 옆에 앉아 자꾸만 흐려지는데. 야, 공부 좀 해라. 작은 형이 한 마디 한다. 반드시 한 번은. 좌우간 나도 앉아는 있다. 그 참!
물론 더 신기한 것은 부모님이다. 새벽에 깨워줘. 공부해야 하니까. 걱정마라. 공부만 한다면 왜 안 깨우겠니. 일어나기만 해라. 어김이 없으신 두 분. 그 참!
새벽 2시 57분. 3월의 12일. 10분 전에 일어났다. 내가! 내가! 오, 부모님. 저도 이렇게 됐습니다. 제가요!
이것이 보통 말하는 그 이해라는 걸까. 그 과정일까. 어둠 속 멀리서 닭이 홰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련하게 들려온다. 그렇군. 나는 아직 잠이 덜 깼군.
지난 밤에 내려두었던 마른 커피를 한 잔 마신다. 목이 말랐다. 나는 물을 좀 많이 필요로 한다. 아. 벌써 기억으로 들어간 술 마신 새벽의 그 물맛! 흐릿한 기억만 남는 그 물맛! 우리 어머니가 애지중지 하시는 외삼촌 말씀. 참! 왜긴 왜야. 술 마시는 이유야 하나지! 새벽에 마시는 찬물 한 사발, 참 - 그거 시원하단 말야. 그 맛으로 술 먹지.
잠이 좀 남아 있다. 3시 06분. 그만 잘까. 잠깐만 누워볼까. 속이 약간 쓰린데. 뭘 좀 먹어야하나. 우리 집에선 나를 독종이라 부른 적이 있다. 대학 4학년 때 고시 공부를 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제법 집중했던 것이다. 물론 나는 떨어졌다. 합격했어도 떨어졌으리. 科落! 나흘에 걸친 불면. 마지막 시험을 보고 한성대를 제일 먼저 걸어나오면서 직감했다. 科落이구나. 동숭동 그 鋪道에 깔린 가을들. 낙엽들. 한심하고 한심하고 또 외로웠다. 괴로웠던가?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시험 기간은 너무나 길었다. 1년에 한 번밖에 안 보니 말이다. 3개월이면 정말 좋았을 걸. 대학의 마지막 1년은 그 올가미에서 지쳤다. 괜히 3학년 말에 1차를 봐서. 1년을 지쳤다. 정말 뭘 해야 좋을지 몰랐던 대학시절. 술을 앞에 두면 내용 없는 논리가 저 혼자 떠들던 시절. 바둑 공부라도 좀 할 걸 그랬나. 뭘 했을까.
기보1
대학 시절. 바둑은 저 멀리 잊혀졌다. 친구와 선배들과 담배내기나 했었지. 꽤 강한 선배가 있었는데, 이름은 잊었다. 기보1이 기억난다. 백1이 실수. A에 젖혔으면 그만이었다. 감각적으로 폼 좀 잡느라고 턱 하니 두었는데….
서강대 라운지에서 - 1970년대 말의 서강대 C관 라운지는 참 아름다웠다. 의자는 낮고 길었으며, 창은 건물의 두 면을 확 열어주었다. 제 멋대로 놓여진 의자들. 의자밖에 없었다. 그래서 좋았다. 녹색의 의자. 나는 다른 건 다 맘에 안 들었지만 - 학사관리는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방침에는 혐오증을 갖고 있다. 그게 뭐야. 평균화는 이미 시작되었던가. - A관 뒤뜰 그 자그만 뒤뜰도 맘에 들었다. 그 옆을 지날 때면 고개를 나도 모르게 갸우뚱하곤 했었다. 나홀로 흐뭇한 미소도 가지면서. 나머지는 정말 귀찮았다. 아니다. 도서관. 그 때만 해도 아마 거의 유일했던 開架式 도서관. 그건 정말 좋았다. 책을 읽던 안 읽던 그 속에 가끔 들어가는 건 괜찮은 산책이었다. 4학년 때 아르바이트도 했었지. 書路班. 開架式 도서관이니까, 학생들이 책을 꺼내놓고 여기 저기 그냥 놔두는 것이었다. 그건 당연했다. 학생들은 책을 다시 書架에 꽂으면 안 된다. 왜냐? 책이 꽂혀 있어야 하는 순서가 있기 때문이다. 書路班 학생들은 그 흩어진 책을 모아서 書架에 정돈하는 것이 일이다. 가끔은 書架에 꽂힌 책들을 쭉 훝는 작업도 했다. 순서대로 꽂혀있는지 그걸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좌우간 나는 바둑을 가끔은 두었다. 담배를 걸었던가? 담배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나는 담배 값이 기억나지 않는다. 1학년 때 어둡던 그 왕자다방의 커피 값은 80원이었던 듯한데….
좌우간 2점 바둑의 선배가 한 분 있었다. 3점 정도의 차이겠지만, 나는 바둑을 멀리 해 상당히 약해진 상태. 실전 감각이 없어진 상태.
기보2
아, 그런데 내가 묘수라고 턱 하니 직감으로 던진 수에 대해 이 선배가 장고를 하는 것이었다. 그 참. 두어 놓고 보니까 실수했다는 생각이 이미 나에겐 있었는데 말이다. 삼청동에 집이 있던 그 선배는 타개의 묘수를 찾아냈다. 백은 악수를 둔 셈이었다. 흑2가 좋은 맥점이다. 잘 두었다. 다음 백A 흑B 백C 흑D까지.
3시 29분. 내가 언제 이렇게 시간을 單線的으로 사용하는가. 多脈絡의 時間文化를 가진 우리의 過去는 어디로 갔는가.
실전1
프로의 바둑은 어떨까. 그들도 시간을 그냥 單線的으로 사용하는가? 모르겠다. 매우 어려운 주제를 또 끄집어내는구나. 어디 다시 함양으로 돌아가보자. 실전1 백24는 이 한 수의 자리.
참고도1
참고도1은 백이 좌변에 치우친 局勢가 되어 좋지 않다. 흑은 상변과 우하귀의 두 진영이 꽤 넓다. 상변은 굳어져 있고. 백이 못 당하는 그림이다. 아닌가. 백5 모자가 아주 좋은 삭감의 급소군. 흑2는 A에 두어야 하나? 음, 어려운 문제다. 넘어가자.
실전2
실전에선 다음 흑의 한 수가 어렵다. 좌변이냐, 우하귀냐. 7분 25초가 흘러갔다. 실전2 흑25가 최철한 6단의 손끝에서 풀려났다.
참고도2
해설하던 김승준 8단은 참고도2 흑1이 제1감이고 무난하다고 했다.
대단히 어려운 장면이다. 참고도2가 좋은지 실전2가 좋은지.
실전3
흑도 어렵고 백도 어렵다. 다음 실전3 백26에 3분 26초. 짧은 시간인가. 꽤 긴 시간인 듯도 하다. 그 수밖에 없는 듯도 하니까 말이다.
참고도3
참고도3 백1은 없을까? 있을 듯하다. 흑2의 침입이 필요한데 백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좌우로 두간 벌릴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과연 저 흑을 공격하는 마땅한 수가 있나? 백도 마뜩찮은 기분이 든다.
다음 흑27에는 14분 17초의 長考가 들어갔다. 짧지 않은 長考다. 나도 생각 좀 해봐야겠다. 그 수가 어떨까. 김승준 8단은 참고도4를 제시하고 있었다. 가벼운 착상. 흑백이 바뀌었다면 帽子는 깃털 같다고 할 수도 있으련만.
반상을 돌아보는가. 아니면 …
3시 47분. 잠도 살아있지만, 책 좀 읽던가 아니면 어제 자기 전에 생각하던 것을 정리 좀 해야겠다. 5집반의 덤과 6집반의 덤이 승패의 차이를 가져오는가? 아니 가져온다. 증거가 뚜렷하다. 찾았다. 그러니까 3일 전에 내가 쓴 거.
덤이 6집 반이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 걸까.
1) 먼저 두는 흑이 6집 반 정도 유리하다.
2) 덤을 6집 반으로 하면 흑백의 승부가 公正性이라는 기준을 충족시킨다.
1)과 2) 어느 것이 맞는 표현일까.
답은 2)이다.
덤이 6집 반일 때, 그 6집 반은 매우 미묘한 숫자다. 바둑이 끝난 다음 흑과 백의 집차이는 6집이냐 7집이냐 또는 n집이냐, 등등으로 나타나지만, 그 집과 우리가 덤 6집 반이라고 할 때의 집은 다른 값을 지닌다.
바로 이 문제에 대한 증거의 일부를 어제 찾았다. 분석했다.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1997년엔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간단하지만, 日記에서 다루기는 좀 맞지 않다. 數式이 좀 들어간다. 솔직히 착안만 했다. 그리곤 후배에게 자료를 주었다. 내가 그 계산법을 잊었으니, 좀 계산해 달라고. 연필로 해야되는 것이니 1시간은 걸렸던 모양이다. 전화가 왔다. e-mail로 보냈으니, 나중에 印稅의 일부는 잘 남겨두라고.
나는 이런 분석에는 그렇게 싫증내지 않는 편이다. 常識 너머에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꽤 재미를 주기 때문이다. 상식이란 대부분 부정확한 것. 틀리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나의 반상일기는 뭘로 채워야 하나. 시간을 꽤 잡아먹는다. 이창호 국수와 최철한 6단의 함양대국은 끝난지 오래고, 그들은 이미 떠났는데 말이다. 메모에도 먼지 앉은지 오래다.
실전4
그래도 가보자. 실전을 실전4로 다시 보자.
이 장면에서 시간은 2월 7일의 아침 11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아침 9시 30분에 시작한 대국. 숙소가 바로 옆에 있어서 30분을 당겼던 것이다. 프로들은 대부분 늦게 시작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니, 모르겠다. 예전엔 그랬다. 강철민 사범님이 기사총회에서 말씀하셨다. 우리도 좀 부지런해보는게 어떻겠습니까. 그 특유의 느린 말솜씨로. 아, 세상은 다들 바삐 살아가는데 우리도 좀 달라지는 것도 좋지 않겠어요. 하하하. 결과는 뻔했다. 擧手를 할 필요도 없었다. 우선 먼저 웃고, 모두들. 그리고 끝났다. 여기 저기서 한두 마디 즐거운 농담이 터지고. 하는 수 없지, 뭐 다들 그러시면. 그 말씀으로 자리에 다시 앉으셨다. 하하하. 관철동 有田茶房 위 4층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마 어느 선배인가, 아, 11시는 어떻습니까. 그랬던 듯도 하다. 나? 나야 물론 11시에 찬성이다. 그리고 제한시간도 1시간이면 더욱 좋고. 난 점심 시간에 가까워지면 좀 정신이 맑아지는 편이었다. 요즘과 달리. 언제였을까. 90년대 초인가, 그 전인가.
오늘 日記가 길다. 읽는 분도 지쳤을 것이다. 다음 문제로 기분 전환을 하시는 건 어떠실지? 길 가다가, 차 안에서, 얘기하다가 그냥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런 문제 중의 하나.
문제
黑先으로 맥을 찾는 문제. 어떤 맥인가? 다음을 전제하자. 흑이 A로 이으면 다른 큰 자리를 백이 차지해 흑이 진다고 하자. 그렇다고 흑이 바로 그 큰 곳을 찾으면 백이 A로 한 점을 잡아 역시 진다고 하자. 흑은 A를 잇는 수순을 찾아야 할 것이다. 백의 응수에 따라 A에 잇는 대신에 좀더 이득을 보던지. 바로 여기서. 그 수순을 찾는 것이 문제. 답? 그건 다음에 드리겠다.
4시 14분. 單線的인 생활이다. 자! 눈을 잠깐 붙일까. 책을 볼까. 바둑이나 한 판 둘까. 어제 밤에 오로 대국실에 들어갔다가 잘 지고 나왔다. 인터넷만 아니면 나는 사실 바둑을 거의 두지 않을 것이다. 주위에 재미있게 둘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기원까지 찾아갈 열성은 없고.
읽는 분. 밝은 하루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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