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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바둑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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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상 일기(3월 8일) - 오늘의 바둑 앞에서
어둠 속에 아침이 숨어 있다. 잠에서 깨어난 나. 나는 오늘 대국이 있다. LG배 세계기왕전 1차 예선.
나는 요즘처럼 바둑을 많이 접해본 적이 별로 없다. 3번째 정도 되지 싶다. 첫 번째는 충암고등학교 시절. 두 번째는 입단을 전후한 시절.
그래서인가, 최근 나는 내가 프로라는 생각을 가끔 자각하고, 놀라기도 한다. 예전에는 없었다.
오늘, 어떤 바둑을 두어볼까.
답이 주어졌다. 실전 흑17처럼만 두어보자. 그 기세로만 두어보자.
실전
무서운 기백氣魄이다. 나는 저 흑17을 두어 볼 수 있을까.
그래, 나는 둘 수 있다. 두어볼 수 있는게 아니라 둘 수 있다. 그렇게 두고 싶다.
저 흑17에는 9분 52초가 들어갔다. 9분 52초.
아니다. 흑17에는 9분 52초가 들어가지 않았다. 저 흑17을 얻기 위해 소비한 시간은 최철한 6단이 태어난 이후부터 셈을 해서 착점한 그 순간까지이다.
말장난일까. 아니다. 그렇다면 진실인가? 실재인가?
제4국도 저렇게 흘렀지. 8분 32초를 썼지. 흑17에. 그렇구나. 참으로 어렵구나. 시간만 보아도 알겠다. 흑17은 참으로 어렵구나. 어렵다. 흑17이 어려운 수인가, 아니면 흑17을 착점하는 것이 어려운가.
참고도1
돌이켜보면, 무서운 긴장이 이미 반상에는 海溢해일처럼 넘치고 있었구나. 참고도1 백4에 들인 시간을 보자.
제2국에서는 3분 26초.
제4국에서는 9분 42초!
제5국에서는 백4를 선택하지 않았다!
저 시간이 이 국수의 그 어떤 내면을 반영하는 걸까. 아니면 백4가 그토록 어려운 수일까.
…아니다. 이건 따로 다뤄야겠다. 여기서 다룰 문제가 아니다. 다른 지면에서 다른 주제로 다뤄야겠다. 아주 기본적인 것이겠지만, 무겁다. 백4의 무게는 매우 무겁다.
나는 日記를 쓰고 있다. 論点은 피하자. 아니, 그건 언젠가 하고 싶을 때 하자. 지금은 하고 싶지 않다. 오늘 나는 바둑을 두러 나가야 한다. 벌써 창밖은 밝아졌다. 6시 41분. 밝은 하루에 생각은 단순한 것이 좋다. 생각이 단순하면 행동은 가볍고 태도는 명쾌해질 수 있다. 반상의 돌도 가볍게 나를 어루만져 주겠지.
흑17에 들인 시간은 어떤가.
여기서는 9분 52초.
2주의 시간이 흐른 다음 개시된 제4국에서는 8분 32초.
뭘 생각한 걸까. 생각이나 한 걸까. 뭔가 딴 생각에 빠지지는 않았을까? 흑17은 거의 절대의 한 수처럼 보이는데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참고도2
참고도2는 어떤가? 흑이 불만이구나. 상변의 흑이 쉽게 무너졌구나. 좁구나.
참고도3
참고도3은? 역시 상변이 크구나. 하변 흑1은 너무나 맛이 담백하구나.
참고도4
참고도4는? 흑이 활발하긴 하구나. 그러나 초점을 벗어났구나. 백이 강한 좌변에서 흑이 싸움을 걸 이유가 없지 않은가.
참고도5
모르겠다. 대체 뭘 생각했을까. 참고도5 흑5에 7분 31초. 흑7에 12분 05초. 그리고 10수를 지나서 흑17에 9분 52초. 흑7을 두면 백8도 당연한 갈라침이고, 그러면 실전까지 거의 필연이 아닌가. 그리고 흑17도 필연 아닌가? 그 수밖에 없지 않은가?
도전 4국에서는 흑5부터 백16까지는 시간이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참고도6
돌아가보자. 흑7은 이해할 수 있다. 참고도6도 참고도7도 가능하지만 참고도5 흑7 중국식 포진도 아주 좋은 구상이다. 아니다. 참고도7은 흑이 약간 불만일 수도 있겠다. 적극적인 구상이 엿보이지 않는다. 이래 가지고서 덤 6집반을 낼 수 있을까.
참고도7
그런데 왜 흑17에 9분 52초일까. 흑7에 12분 05초가 붙는다면 흑17에 9분 52초가 들어간 것은 이해하기가 힘들다. 백16까지는 거의 필연의 수순인 듯한데, 아닌가?
나는 최근의 바둑을 널리 살펴보지 않았구나. 흑17은 필연이 아닌 모양이다.
시간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좋았을껄!
이런!
내가 뭐하는 거야?
시간만 눈여겨보지 않았으면 이런 고민은 없을 것 아닌가 말이다. 세상에 시간만큼 고민을 주는 것은 없다. 그 진실! 나는 오늘 아침의 시간에 있다는 그 현실.
모르는 건 넘어가는 게 좋다. 세상에 나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가듯이, 세상에 너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가듯이. 모르는 건 그냥 넘어가는 것도 좋다. 안다는게 별 거냐? 그저 하나의 해석일 뿐이다.
자, 나도 독자를 이쯤에서 의식한다는 것을 확인하자. 독자들도 생각해보라. 생각의 기회비용은 엄청난 것. 나는 오늘 대국이 있다. 시간을 아껴야 한다.
나에게 오늘 대국은 올해 들어 4번째의 공식대국이다. 3전 3패다. 물론 핑계는 하나 있다. 날자를 깜박 잊고 기권패도 하나 했다. 약간은 창피하기도 하다. 어디 오늘, 한 판 열심히 두어보자. 그런데 하필 왜 오늘 아침에 흑17이 나타났는가?
참고도8
흑17. 기백이 좋다. 참고도8은 선생에게 혼좀 나야겠지? 그냥 아마추어 때 바둑 배울 때라면 참고도8도 좋겠지만. 감각이 깨끗하군. 그런 말을 듣고, 내심 의기양양할 수도 있겠지. 기본기가 좋은데! 그런 말을 듣고서는, 나는 책 안 봐도 둘 수 있었는데, 그 참. 나도 재주가 있단 말야. 그렇게 內心 하나가 不滿처럼 지나갈 수도 있겠지.
프로가 참고도8 흑1을 둔다? 우변 백에게 영향력이 없다. 다음 수가 밋밋해서야 어디 돌의 활력이나 제대로 펼쳐질 수 있겠나.
참고도9
참고도9 흑1 미는 수를 남겨두어야 한다. 이건 백이 못 견딜 것이다. 흑은 우상변을 키우되, 백에게 가능한한 최대의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상대가 손을 빼는 것이 곤란하다? 그러면 그 수는 프로에게 맞는 수다. 프로는 그런 수를 두어야 한다. 물론! 위험부담도 당연히 있다. 그러나 그게 프로의 자세다!
기원으로 가자. 바둑을 두고 난 다음 여유가 있을 때 어디 후배들에게 물어나봐야겠다. 흑17이 어떠냐고.
이런! 흑17에 대해서 묻는다고? 내 바둑은? 내가 열심히 두겠다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맘에 다짐했던 그 바둑은? 내가 프로 맞나? 하하하. 웃어야겠다. 그래 가서 생각하자. 아니, 가서 되는대로 지나가자. 바둑은 두고. 바둑판 앞에 앉아서 기분대로 두자. 열심히 두고 싶으면 그렇게 두고. 가볍게 두고 싶으면 관전이나! 하고.
대국을 앞두고 이겨야겠다는 생각은 가끔은 했던 듯하다. 1983년 1월 제3회 세실배 아마추어 결승을 앞두고 그 생각을 했다. 1983년 내 생애 마지막 입단대회 때, 이번에는 꼭 입단해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이 글자처럼 영상처럼 잡힌다. 그랬다. 분명히 그 때는 그랬다.
오늘은?
자, 용직아. 떠나보자. 다녀오자. 어디 한 번 오랜 만에 손맛을 느껴보자. 인터넷 바둑에서 느끼지 못하는 긴장감을 즐겨보자. 즐겨보자 긴장감을.
하하. 그래, 하하다. 그런데 과연, 한 방울의 긴장감이라도 나올 수 있을까? 나에게 그런 피가 남아 있는가? 있을 것이다. 약간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으로 만족하자. 가서 생각하자. 지금부터 그 생각에 잠기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겠나. 대국을 앞두고는 가볍게 無念으로 걷는 것이 여러 가지로 이롭다.
그런가…. 한 판의 바둑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 바로 그걸, 나는 제대로 배웠던가. 내용보다 방식에 주의해서 책을 읽었어야 했는데, 아쉽게도 그걸 안 것은 너무나 먼 시간을 지나서였지 않았던가. 바둑도 그러한 거 아니던가.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배우면 된다.
나는 바둑 둘 때 엽차라도 한 잔… 옆에 둘 수 있다면, 옆에 둘 수 있다면! 그것도 큰 행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 나는 그렇게 되고 싶었다. 싶었다. 그래서 때로는, 바둑보다 엽차에 신경을 써서 반상은 남의 일인양 나도 남인양 멀리 두고 가는 때도 있었지만. 앞으로도 당분간은 있겠지만.
다녀오자. 어디 진지하게 한 판을 마음껏 그려보자.
창문을 연다. 크고 깊게 호흡을 해본다. 겨울과 봄의 차가운 바람에 저 먼 산 쌓인 눈의 精氣가 실려 있구나.
상쾌한 아침이다. 가깝게 들리는 새의 지저귐도, 멀리 고개를 넘는 자동차의 소음도 반갑기만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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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릿글 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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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직 사범님 화이팅! ^^* 언제나 문사범님의 글을 보면서 긴 여운을 얻어가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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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수 한 수에 남모를 사연들이 숨어있군요.. 문사범님 잘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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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ss1234 |
｜ 2004-03-08 오후 7:39:00 [동감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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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의견에 한마디 |
....................................... ^^ .........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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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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