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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의 승부 - 한 세상 산 기분 - 낯선 곳에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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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상 일기(2월 3일)
5년간의 승부 - 한 세상 산 기분 - 낯선 곳에 내리다
아침 7시 49분.
창窓에 성에가 앉았다. 두텁게도 앉았다.
다시금 인사하는 겨울인가. 내 겨울의 추상화는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어제 왕밍완과 조치훈의 바둑은 오랜 만의 감상품이었다. 오로 대국실에서 관전하셨는지? 흑의 독특한 포석이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물론 운영은 매우 어려운 포석. 결과는 못 봤지만 실패했을 것으로 예상한다.
그래도 재밌었다. 나는 급한 싸움으로 일관되는 바둑에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 바둑이 옛날 바둑인 탓이겠지만, 그래도 어쩌랴. 나의 과거는 나의 현재를 상당 부분 지배하는 것을.
87년 8월.
석사를 마치고 돌아섰다.
그래도 몇 개월간 집중했다고 마치 한 세상 흘러가버린 듯한 기분이 밀려들어왔다.
특히 한국기원에 들어섰을 때 그런 기분이 강하게 흘러들어왔다.
시간은 마치 나를 딴 세상에 데려다 놓은 듯했다. 낯설다는 그런 느낌. 아니, 낯선 곳에 다녀온 느낌. 그런 감각이 당분간은 나를 지배했다.
나도 한 때는 바둑에 미친 사람 아니었던가.
바둑계 돌아가는 형편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차창車窓 밖 풍경을 내다보면서 사라져간 고향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묻고만 싶은 기분.
세 개의 기둥이 바둑계를 떠받치고 있었다.
조훈현과 서봉수.
도전5강과 그들의 세대.
유창혁으로 대표되는 신세대.
그렇지만 나는 둔했다. 흐름에 둔감했다. 기사들은 이미 유창혁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에 대해서 긴장감을 갖고 있었던 듯한데, 나는 그 의미를 당시는 잘 몰랐다. 곧 이어 이창호가 80%의 승률을 거두면서 놀라운 성장을 보여주었을 때도 나는 잘 몰랐다. 그 의미를.
다만, 잘 두는구나. 그렇게만 느꼈다.
아마도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여전히 왕위전과 같은 큰 기전의 본선에서는 - 리그전이다 - 앞 세대들이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기현, 하찬석, 홍종현, 김희중, 서봉수, 장수영, 유건재, 정수현.
당시의 왕위전 본선 멤버다.
나는 왕위전 리그에 한 번 올라가보고 싶었는데, 지금까지 3차 결승에 단 한 번 올랐을 뿐이었다. 3차에는 한두 번 더 올라가 보았고.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왕위전이 상금과 대국료가 가장 컸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도 여전히 타이틀 무대는 조훈현과 서봉수가 장악하고 있다는 현실이 더욱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확실히 서봉수와 조훈현은 남다른 바둑이었다.
어디 당시의 바둑 한 판 맛을 보자.
(국수 도전 1국)
제30기 국수전 도전1국. 1987. 2. 4.
白 九段 서봉수
黑 國手 조훈현
흑138 이하 생략. 백 2집반 승.
백의 양 3三이 눈에 뜨인다. 요즘은 아무도 두지 않는 포석.
그러고 보니 3三은 192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약 70 년간을 풍미했다. 물론 화점이나 소목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일본의 사까다와 오청원은 유명하며, 우리 나라에서도 서봉수가 특히나 많이 애용했다.
두 기사가 상대를 의식하고 두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피차 서로 지고 싶지는 않았을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 흐름이다.
요즘과는 확실히 다른 흐름인데, 역시 시대의 자식임이 분명하다.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아 참. 김희중 사범님의 바둑도 한 번 보고 싶다.
(KBS 속기 결승 3국)
제8기 KBS바둑왕전 결승 제3국 1987. 8. 3.
白 七段 김희중
黑 九段 조훈현
흑145 끝. 흑 실격승.
어지럽다.
요즘의 속기보다 더 어지럽다.
먼저 결과부터 보면, 백144로는 A에 두어야 했다. 우상귀는 그것으로 잡았으며 좌변 백 대마와 우변 흑 대마를 교환했으면 백이 이겼을 것이다.
그러나 흑145가 두어진 다음에, 백은 마지막 초읽기임을 잊고 착점하지 않았다. 실격패.
바둑의 승부란 것이 묘해서 - 아마도 모든 승부가 그렇겠지만 - 한 번 무너지면 그 타격이 큰 것이라 다시 일어서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가만, 그렇다면 - 바둑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2년 반을 허송세월 했으니, 승부에서 멀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을까. 타이틀과는 어차피 거리가 먼 실력. 먼 재능.
나는 그리 본다. 당연하다.
어쩌면 승부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낮았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더욱 정확한 묘사가 될 거 같다.
그렇다면 왜 이 일기의 제목이 5년간의 승부인가?
자화상을 왜 그런 표현으로 그리려고 했던가?
분명히 뭔가 있었다. 승부에 대한 나의 견해. 그런 것이 있었다.
그러나 벌써 3년 반을 보냈다. 과연 남은 1년 반 동안에 나에게 5년간의 승부를 마무리 지을 그런 계기, 또는 그런 희망, 그런 과정이 있었던가? 아니면 3년 반마저도 승부의 과정 속에 포함되었던가? 일기의 앞에 삽화로 넣었지만, 박수동 화백에게 내가 답했던 말, 그런 것과 관련된 것일까.
아니면 실로 말하고 싶었던 것이 남아있는 걸까. 그래서 이 일기를 쓰는 걸까.
바둑이란 이런 것이다, 그런 것을 말하고 싶은 걸까.
바둑꾼이란 이런 것이다, 그런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아침 9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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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릿글 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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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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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주제는 아니지만 과거는 나의 현재부분을 상당부분 지배..동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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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hj080 |
｜ 2006-09-06 오후 7:43:00 [동감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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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의견에 한마디 |
김희중님의 바둑을 tv로본 기억이 납니다 계시원 착각은 아닌지//초읽기 1번더 남은 거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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