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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의 승부 - 논문을 썼다 -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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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상 일기(2월 2일)
5년간의 승부 - 논문을 썼다 - 노력했다
오후 3시 36분.
이창호와 최철한의 국수전 도전 2국이 진행 중이다. 재밌다. 어렵다. 팽팽한 바둑. 그러나 최철한이 다소 두텁지 않나 생각되는데 어떨까. 최근 이 국수의 바둑을 보면 예전과 같지 않다. 자유로운 착상이 예전만 못하다는 느낌을 준다. 다소 무겁다. 달리 말하면 고졸古拙한 바둑을 둔다.
누구나 변한다.
87년 3월.
마지막 학기로 생각했다.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매듭은 하나 지어야겠다는 마음은 분명했다.
강의는 하나만 남겨둔 상태. 사회학과에 가서 방법론 강의를 들었다. 편하게 듣고만 앉았다. 읽어야 할 것도 별로 읽지 않고, 그저 편하게 앉아만 있었다. 내 발표할 것만 읽었다. 참 한심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논문에 대해서는 집중했다.
논문을 써야 한다는 강박은 의외로 대단했다. 시간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우선 주제를 뭘로 잡아야 할까. 그것이 제일 큰 고민. 주제를 적절히 잡는다는 것은 질문을 잘 잡아낸다는 것을 말한다. 질문을 잘 잡으면 답을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마치 한판의 바둑에서 포석 구상을 잘 해 놓으면 그 다음은 훨씬 쉽게 국면이 풀리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논문 하나에만 몰두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논문을 쓰는데 약 5개월이 걸렸는데, H. Herbele - 이름 맞는가 모르겠다 - 의 책을 그 사이에 읽었다. 읽다가 쓰고 쓰다가 읽고 그러는 와중이었다. 논문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해서 그 이전에 아무런 훈련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논문을 끝내고 난 다음에야 알았다.
아니다. 논문을 쓰는 과정 그 자체가 훈련이었다. 분명한 그 과정, 그 훈련. 그래, 그 Herbele라는 학자의 논문은 나찌즘에 대한 것이었는데, 정당 정치로 시작한 히틀러가 어떻게 권력을 잡아가는가에 대한 대단히 실증적인 논문이었다.
현실을 파악하는데 들어간 노력이 내 좁은 눈에도 대단했다. 물론 지금, 그가 이론적 구성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자료를 찾아서 재구성하고 그것을 기초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 그 노력.
얼마 전에 장하준 교수의 kicking away the ladder를 가볍게 읽었는데 그가 만든 몇 가지 실증적인 표만 보아도 그의 학자적 재능과 성실성을 알 수 있었다.
자료를 구성한다는 것은 말이 그렇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경험적 자료를 제시하지 않고 역사에 대해서 떠드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표를 만드는 것도 재능에 속한다. 아니, 그런 것이 재능이다. 1급의 학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이론의 힘과 학문에의 기여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사회과학에서 이론은 경험적으로 뒷받침되는 것이 바람직하고, 이론 없이 모아진 경험적 증거는 쓸모가 거의 없다. 물론 1급의 학자만이 할 수 있는 이론적 기초 세우는 것은 예외가 되겠다.
나는 뒤졌다.
연감, 신문, 잡지, 기존의 논문 등등. 정치인들과 인터뷰도 몇 번 했다.
기존의 논문에서는 쓸모 있는 자료라고는 하나도 찾지 못했다. 주장만 나열하는 그런 논문들. 주장의 근거가 엉성한 논문들. 그런 것들만 있었다. 내 주제로 잡은 분야에 있어서는.
아 참. 내 주제는 파벌에 대한 것이었다. 논문의 제목도 “한국의 야당과 파벌: 1963-1987”이었다.
의문을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는, 그런 한심한 논문들도 많다는 것을 알았다.
유명한 학자가 써도 한심하면 한심한 것이다.
예를 들면, 야당 파벌 현상의 원인을 정치인의 이기주의적인 행동에서 찾은 분도 있었는데, 만약 그렇다면 왜 여당에는 파벌 현상이 적게 나타나는가를 설명할 수 없다. 야당정치인과 여당정치인은 인격이 다른가?
의문은 모든 학문의 근본에 자리 잡아야 하는 덕목이다.
참, 이갑윤 선생에게 감사해야 할 다른 하나도 있다. 정당에 대해 쓰려면 먼저 정당을 한 번 찾아가라고 충고해 주었다. 실로 대단한 가르침이었다! 정당에 대해 쓰면서 정당 한 번 가보지 않는다면 그건 좀 곤란하다. 실로 그러하다.
야당 중앙당에 가보니, 하하하. 철제 책상 몇 개. 여직원. 책상 위에는 전화번호부와 너절한 서류철 몇 개. 그것이 전부였다. 아, 책상 위에 전화기는 있었다. 하하. 요즘은 어떤가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정당을 가벼이 봐서는 안 된다. 정당의 힘은 그런데 있지 않다. 그 점을 아는 것은, 먼저 정당을 한 번 찾아가서 어떤 환경에서 일하는가를 보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다. 그것이 바람직하다. 자주 갈 필요는 없다. 한 번 정도 가서 표면적인 인상을 잡아놓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산울림 소극장 1층에 자리 잡은 카페 산울림을 즐겨 찾았다. 하숙집에서 코 앞. 머릿속으로 생각을 많이 굴려야하는 할 때, 때로는 번잡한 때로는 조용한 장소가 필요하다.
내 거기서 한영애를 지겹도록 들었다. 4인조 해바라기 때의 노래가 아닌, 솔로 가수로서의 한영애. 당시는 노래를 신청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완행열차, 여울목, …. 한영애를 노래도 얼굴도 다 좋아했다.
노래와 생각, 커피. 참으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간략히 낙서. 그리곤 자료를 찾아 도서관으로 떠났다. 많은 실패가 뒤따랐다. 그러나 실패는 다른 아이디어를 다시금 건져주었다.
의문을 풀어서 세상의 숨겨진 논리를 찾아내는 즐거움은 양보하기 싫은 것이다.
선생은 나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그런 지도를 해주지 않고, 그저 내가 써간 논문을 보고 한 줄만 써 주었다. 대부분의 경우, “독단적”이라는 단어가 평에 들어갔다. 참 많이도 읽어주셨다. 분명 귀찮았을 터인데.
제일 나중에는, “또 읽어?” 그리 말씀했다.
논문을 쓸 때는 선생을 괴롭혀야 한다.
만약 이론의 힘을 내 일찍 잘 배웠더라면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고생했다. 여기 저기 산재한 자료를 찾아서 꿰어 맞추고 퍼즐을 조각 조각 이어가는 과정은 정말이지 힘들기 그지 없었다.
나는 내 스스로 의문을 만들고 그 의문의 해결을 실증적으로 - 이게 중요하다 - 뒷받침하는 자료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좌우간 시간은 흘러갔다.
도서관과 하숙방, 카페 산울림.
그러던 어느 날 전체가 연결되었다. 그것이 7월 말. 논문 제출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남겨둔 상태였다. 그리고 이론의 힘에 대해서도 순간 약간이나마 알게 되었다. 몸으로 때워 알게 되었다.
논문 심사 때 선생들이 말할 것이 없으니 바로 나가라고 했다. 논문이 매우 짧았다. 아마도 사회과학 분야에서 그렇게 짧은 석사 논문은 드물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족했다.
자평自評은 자만에 가까운 것이지만, 내 그 때 만족했다. 지금도 유쾌하다.
무엇보다도 논문을 벗어 던질 때의 그 상쾌한 기분이란!
벗어 던졌다!
바둑은 아니 두었을까?
두었다. 지금 찾아보니 3월부터 7월까지 열 서너 국 두었던 것으로 나온다. 3차 예선에 올라간 것도 두세 개가 있다.
논문에의 집중과 대국이 상충되지 않았던가?
그렇게 상충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지금 - 지금 - 본다.
왜냐?
석사 수준이었으니까.
나중에 박사과정 때 경험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공부를 하려면 먼저 머릿속을 점거하고 있는 바둑을 지워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책을 읽어도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머리 한 쪽에서는 여전히 바둑이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 바둑을 지우는데 들어간 시간은?
2-3년 걸렸지 싶다.
나 개인의 경험일 뿐이다. 일반화하고 싶지는 않다.
아 참! 재밌는 사실 하나.
제3공화국 때 정치부기자들이 많이들 정당으로 옮겨서 국회의원이 되었는데, 하나 같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정당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글을 쓴 기자들만이 국회의원이 되었다! 하! 물론 잘 알고 있는 기자들 중에 정치판으로 몸을 옮기지 않은 분들도 많다. 그러나 어정쩡하게 알아서 정치판으로 옮긴 기자들은 없었다.
어떻게 알았느냐? 기자들이 쓴 글을 보고 알았다. 알고 쓴 글, 모르고 쓴 글, 다 차이가 있었다. 내 기자들이 쓴 거의 모든 글을 다 읽어봤다. 왜 읽었느냐? 자료를 찾기 위해서 읽었다. 논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실증적 데이터라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읽었다. 자료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 그리고 이것은 3공화국 때에만 국한되는 평가다.
실로 세상에 공짜는 없는 것이다.
오후의 한 때다.
5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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