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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의 승부 - 설명의 방식이 중요 - 내 바둑책의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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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상 일기(1월 22일)
5년간의 승부 - 설명의 방식이 중요 - 내 바둑책의 기초
오후 3시 16분.
문득 가을이 그립다.
낙엽. 들녘. 달. 그림자. 바람. …
뭘 해야 할지 잘 모를 때, 나에 대해서 회의가 고개를 들 때, 나는 변화를 택하는 편이었다.
당시 나에게 변화는 아니 하던 학업을 다시 하는 것.
가을에 학교를 다시 다니게 되었을 때, 기억에 남는 강의를 하나 들었다.
정치분석.
웬 강의 제목이 그런가도 했다. 분석 아니 하는 학문도 있는가?
공공선택론 public choice이라고 불리는 그런 분야를 중심으로 다루는 것이었는데, 독특했다. 시장 밖의 분야를 고전경제학적 방식을 통해 분석하는 것이었으니, 정치에 대한 경제학적 접근이라고 할까. 요즘엔 이 접근법이 정치학의 핵심 중의 하나로 자리 잡았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국내에는 전공자가 거의 없었다.
다루는 대상 중의 하나로 대중에게 잘 알려진 것은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누구나 들어보았을 홉즈 J. Hobbes의 자연상태를 공식公式적으로 기술한 것인데, 자연상태에서 왜 우리는 정부를 필요로 하는가, 왜 집단적 합의를 필요로 하는가, 거의 모든 도덕철학에서 발견되듯이 반사회적인 행동은 왜 제재되어야 하는가, 그런 문제의 출발과 내재된 함의를 간결하게 기술記述하고 형식화 하는 것이었다.
깔끔했다.
논리적 전개과정이 마음을 잡았다.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각자의 취향에 맞는 것이 있는 법. 나는 나에게 잘 들어맞는 방식을 하나 찾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한 학기 정도의 강의로서 깊이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정치학을 하면 뭔가 얻을 수 있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은 갖게 되었다.
한 학기의 강의만으로.
재밌던 것이 기억난다.
중간시험을 써내고 나갔다.
선생이 시험시간 중에 들어왔다. 답안지를 슬쩍 훑어보더니 이리 말했다 했다.
이게 뭐야?
하하. 내 쓰는 방식이 대단히 허술했던가. 나는 꼼꼼히 쓰는 타입은 아니었다.
아마도 내 유일하게 A를 받았던 과목이 아닌가 싶다. A+였을까.
다른 학생들도 대부분 A를 받았을 것이지만 나에게는 유쾌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그런 유쾌한 인상이 나에게 그 분야에 대한 흥미를 좀더 돋구어주었는데, 그 인연으로 뒷날 정치분석을 강의하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나의 전공은 아니었다.
그 분야를 발견한 것은 그 후의 내 인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논리 뒤에 숨겨진 진실, 아니 논리만이 찾아낼 수 있는 사회의 역설적인 진실. 그런 것이 있구나. 그런 이해는 그 후의 내 책읽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제, 가정, 추론, 설명, 결론, 이해, 모델, 역설, … 그런 것들이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거나 잠겨있는 책이 의미 깊게 다가왔다. 물론 나는 그런 것 말고도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이 다양하게 있음을 알고 또 믿는다.
바둑은 무엇일까.
그에 대해서 처음 생각해 본 것도 아마도 바로 그 시점이었을 것이다.
바둑은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고 이해되어 왔는가.
설명의 방식이 결론과 이해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비로소 약간 알게 된 때문이었다.
물론 뒷날 쓰게 된 ‘바둑의 발견’에 대한 구상은 그 때 잡혀진 것은 아니었다. 85년 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었을 때 이미 대략적인 구상은 한 눈에 잡았다. 대부분의 바둑 지식은 이미 머릿속에 갖고 있었지만 그것을 하나로 묶는 도구가 없었던 상태였기에 도구만 발견하면 그것으로 끝낼 수 있었다.
패러다임, 그것은 설명의 한 도구 a tool of explanation였을 뿐이다.
바둑의 발견에서 패러다임은 바둑의 발전을 거시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 하나의 편리한 방식이었을 뿐이다.
오해도 적지 않은데, 예컨대 오늘 바로 이 순간 한국 바둑계에서도 다양한 패러다임이 존재한다는 말은 그리 맞는 이해는 아니다. 다양한 수법에 대한 다양한 평가는 존재할지라도. 그리고 유행은 다양할지라도. 한국류라는 말도 패러다임이 지시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개념이다.
바둑에서도 설명의 방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그 하나로, 나는 맥과 묘수를 구별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맥: 조건이 일반화된 상황(또는 형태)에서 얻어지는 결론(또는 답)
묘수: 조건이 일반화되지 않은 상황(또는 형태)에서 얻어지는 결론(또는 답)
실로 그러하다. 우리가 바둑에서 일반화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많이 만들어낸다면 그 때는 답도 존재한다. 언제나 새롭고 특정한 형태만이 등장한다면, 그 때는 답을 잘 발견할 수 없다.
왜 저런 구별이 필요할까?
무엇보다도 그건, 특정의 학문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가르쳐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 분야가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바둑은 바둑계라는 사회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나도 다르지 않다. 이리 쓴다. 무의식적으로.
멋진 맥을 만나면 - 미처 내가 예측하지 못한 것이면 더욱 더 - “묘수!” 그런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설명하기 위해서 강의한다면 구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책이라면 더욱 더.
물론, 묘수 좋아할 거 없다. 내 한 때를 유쾌하게 만든 그 어떤 묘수가 나를 그 후 얼마나 힘들게 했는가를 생각한다면, 나는 내 정치학 공부 시절을 그리 즐겁게 떠올리지 않는다.
그러나 미래를 내다보고 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학문이 궁극적으로 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거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는 내 미래를 제대로 예측 못했다. 왜냐? 세상의 변화를, 변화의 조건을, 내 미래를 결정하는 모델에의 변수로 제대로 집어넣은, 그런 모델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나중에 알게 된 일.
나는 공부를 좀 했다. 86년 가을에는.
최루탄이 거리를 덮는 때가 더욱 잦아졌지만, 나는 여전히 정치적 현실에는 거의 무관심했다. 다행일까. 부족했던 공부지만 그래도 공부를 위해서는 다행일 것이다.
현실에 일찌감치 깊이 뛰어드는 사람은 학문하고는 거리가 멀게 된다. 이건 사실이다. 현실에 민감한 친구치고 공부 제대로 한 사람 못 봤다. 왜냐? 세상에 공짜가 없기 때문이다. 정치학 공부하면서 세상에 직접 뛰어들어 정치까지 하는 사람들에게 시간이 두 배로 주어지는가? 머리가 두 배로 좋은가?
그렇게 돌아보니, 나는 처음부터 학자로서는 한계를 깊이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내 모르고, 내 부정했을 뿐.
그러나 지금도 인정하기는 그 얼마나 싫은 것인가!
오후 4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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