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간의 승부 - 공부는 함께 해야만 - 유창혁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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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상 일기(1월 12일)
- 5년간의 승부 - 공부는 함께 해야만 - 유창혁의 도전
아침 8시 42분.
책에서 나오는 얘기일 것 같으면 동네 꼬마라고 해도 좋을 것인데,
이른 아침에 큰집에서 조카가 왔다. 곰탕을 삼촌에게 가져다 준 것이다.
어머니 모시고 사는 큰 형님 댁이 바로 옆이다.
덕분에 일찍 깼다.
조카가 그냥 가겠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책을 한 권 집어주었다. 중학교 2년생이 읽을 책으로서 어떤 것이 좋을까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냥 눈에 끌리는 데로 손에 잡히는 데로.
조카 녀석은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보나마나 컴퓨터가 가까이 있을 것이고. 공부하라는 말씀은 못들은 체 흘려보낼 것이고.
하하. 노는 것도 일일 것이다. 고민도 안고 있을 것이다. 심심한 것도 고민일 것이고, 공부에 대한 강박이야말로 21세기 한국의 고민일 것이고. 하하.
나도 고민이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
일기부터 써보자.
하루를 여는데 정기적인 일거리가 있다는 것은 매우 고마운 일.
86년이었을 것이다. 대략 그 정도였을 것이다. 아니, 그 좀더 앞이었다. 기사들이 개인 사무실을 갖기 시작한 것이. 홍태선 사범은 80년대 초에 낙원동 떡집 골목 2층에 사무실을 열었고 최규병 사범은 좀더 뒤, 그러니까 대략 86년 경에 인사동에 연구실을 가졌다. 홍태선 사범이 하던 연구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은 기원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는데 작년인가에 문을 닫았다.
해봉빌딩 5층이 최사범의 연구실이었다. 양재호 사범도 참여했으며 유창혁 二단도 그 멤버였다. 나는 아니었다. 海峰빌딩. 이름 그대로다. 약간 낡은 5층 건물로 종로에서 인사동으로 들어갈 때 인사동 네거리 못 미쳐서 왼쪽에 자리 잡고 있다.
공부는 그래야 제대로 할 수 있다. 혼자 하는 공부는 바둑에서도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아마도 그 이유는 두 가지 아닐까 싶다. 하나는 우리의 의지. 혼자 있으면 나태해지기 쉽다. 다른 하나는 공부의 폭. 자신만의 세계 속에 들어가면 스스로 울타리를 치는 경향이 있다. 자신만의 안목으로 세상을 평가하기 쉽다.
연구실 내면서 성적 나쁜 기사는 별로 보지 못했다. 물론 요즘 道場도장하고는 다른 성격. 자신의 공부를 첫째로 삼는 연구실. 그런 연구실이 최사범의 연구실이었다.
나도 가끔 들리곤 했는데 공부를 방해나 하지 않았는가 모르겠다. 프로만 들리지 않았다. 이광구 선생도 지나다 들렸고. 한국기원 편집부나 아마추어들도 오갔다. 공부하는 곳이기에 술은 없었다. 나도 권하지도 않았고. 그러나 최사범은 주인으로써 손님 대접을 해야만 하는 처지이기에 저녁 어스름에 한 잔 하기도 했다. 탁주. 그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이계훈 사범과는 그 부근에서 자주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놀랐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놀랐을 것이다.
86년 5월의 일이다.
유창혁 二단이 조훈현 九단을 이긴 것이다.
그냥 이긴 것이 아니라 딱 부러지게 이겼다.
자신감 넘치는 자세로, 반상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이겼다.
(유창혁의 신수)
白: 九단 조훈현
黑: 二단 유창혁(덤 없음)
제한시간 각 4시간 소비시간 백 1시간 42분. 흑 2시간 49분.
흑189 끝 흑 불계승
좌하귀 변화는 당시 유행하던 것.
흑39가 신수였다. 그 때까지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신수. 흑45까지 흑이 매우 유리한 결말이다.
흑39를 어떻게 두었는가. 그 전에는.
(흑39를 어떻게 두었던가)
흑1 가만히 젖혔다. 이 때 백2 끊는 수가 좋은 응수타진.
백4 이후 A와 B를 맞봐 백 유리.
흑2를 C는 백D 단수 당해 흑 불리.
간단한 듯하면서도 쉽게 눈에 뜨이지 않는 것이 실전 흑39였다. 일반적으로 저런 수는 속수라고 해서 프로의 생각에 잘 잡히지 않는다. 백34와 백36은 날일자. 날일자는 건너붙여라. 그런 지침이 있지 않는가. 바로 그 지침을 거슬리는 것이 실전 흑39이기에 프로들은 흑39를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다. 소위 맹점.
참신했다.
참신한 충격.
아니, 좀더 극적인 표현이 있으면 좋겠는데 아쉽다.
지금도 생생한 장면이다.
서 명인이 이리 말했다 한다.
“유창혁의 기재에 대해서 이제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남은 문제는 얼마나 꾸준히 정진하느냐는 것뿐이다.”
“오늘이야말로 조훈현이 무너지기 시작한 첫날이다.” 어느 기사의 말이었다.
동감한다. 덧붙여 나는 이리 보았다. 심리적인 저항선이 무너졌다고. 당시엔, 조훈현에게는 뭔가 안 될 것 같은 심리가 기사들에게 널리 퍼져있었는데 그것이 무너졌다고. 그랬다. 아니, 언제나 그렇다. 20대야말로 미래를 열어가는 세대인 것. 기성 관념에 대한 도전. 그것은 그들만의 자산인 것이다.
최규병과 유창혁이 문을 연 연구실은 그 후 젊은 기사들의 연구실로 자리를 잡았다. 젊은 후배들의 가세는 최규병과 유창혁에게 더욱 힘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어제 얘기했듯이,
변화. 그것이 불안정한 반상의 다른 이름이다.
변화. 그것이야말로 세상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변화는 어디서 오는가.
세대효과가 크다. 세대효과는 어디서? 교육과 기술혁신 등으로 인한 사회의 기반 변화에서.
…
나의 변화는?
나는 공부를 접은 것일까.
86년의 그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自問자문하는 바다.
관심가는 바가 없지 않은데 참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알아도 모르겠다.
의욕이란 것이 나이가 들면 사라진다는 말씀도 있는데 정말 그런 거 같다.
오전 9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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