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간의 승부 - 그런저런 와중에 - 필연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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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상 일기(12월 16일) - 5년간의 승부 - 그런저런 와중에 - 필연이 있을까
오후 12시 12분.
술은 여전히 마셨다.
그런저런 와중이었다.
친구 중의 하나가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나도 그거 한 번 해볼까 한두 번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내 망막 속에 들어온 선택과 해석의 여지 하나, 정치학.
나는 대학 다닐 때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사실 영문학에 대해서는 아무런 뜻이 없었다. 그냥 들어간 학과였다. 중학교 때는 문학에 관심을 가진 그저 그런 소년이었는데, 고등학교 때 바둑에 전념 하느라고 읽은 소설책은 겨우 두 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작가의 이름을 잊었지만,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나는 문학에 목말랐던 것일까. 그래서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학교 때 문학을 선택했던 것일까. 그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분위기도 사회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데 한 몫을 했다.
개인과 사회. 개인과 집단. 그 영원한 대조.
나는 문학이란 것이, 나에게는 맞지 않는 옷과 같다고 생각했다. 다만 군대를 가기 싫어서 대학을 미적 미적 다녔을 뿐이었다. 나중에야 어찌 되겠지, 그런 생각으로.
확신은 없었다.
정치학 해서 나중에 뭘 할까, 그런 점에도 거의 생각이 미치지 못했는데, 아마도 이 역시 당시의 학생들 사이에 나돌던 풍조 風潮를 따라한 것이 아닐까, 그리 생각된다.
사실, 학문에 대한 생각 또는 첫 걸음을 내딛게 된 것은 술을 잔뜩 마신 어느 날 아침의 사건과 관련이 있었다. 사건이라….
술을 많이 마신 추운 겨울 날, 남가좌동 술집 근방 여관에서 친구와 잠을 잤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그러나 아침에 목이 말라 눈을 떠보니, 그 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한심한 기분이 - 자조감이랄까 - 엄습해왔다. 부랴부랴 옷을 챙기고 여관문을 열고 도망치듯이 거리로 나왔다. 아! 이런! 세상이 온통 하얀 눈에 뒤덮여 있었다. 일요일이었던 듯하다. 시간이 이르지도 않았는데 거리엔 사람들이 없었다. 적막! 말 그대로 寂寞!
술 기운이 확 깼다. 명정 酩酊이란 온데 간데 없어지고 머릿속이 투명하게 변했다.
친구와 택시를 잡았다. 종로로 일단 나가자. 나가서 해장국을 하나 먹자. 그리곤 헤어지자. 그리 했다. 종로는 한국기원이 있는 거리. 기원 부근이 익숙하니 기원에서 출발하고 기원에서 헤어진다. 언제나와 다름 없던 그런 시작과 끝.
택시가 종로1가에 다다랐을 때, 불현듯 혼자 있고 싶었다. 나중에 보자. 먼저 내린다. 그 말을 남기고 먼저 내렸다. 여전히 거리엔 사람들이 드문드문 했다. 눈을 들어보니 철학관 간판이 보였다. 4층에 있는 조성우 철학관. 좁은 계단을 무작정 올라갔다. 내 처음으로 사주를 보러 간 것이었다. 뭔가 잡고 싶은 기분이었을까. 내면을 나눌 대화가 달리 필요했던 것일까. 그랬을 것이다. 사주가 인생을 잘 드러낸다는 생각은 그 때도 지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쉽게 단정할 수 없는 문제.
정보가 충분하면 그것으로 해석하고 판단한다.
정보가 불충분하면 지혜로써 해석하고 판단한다.
정보도 없고 지혜도 모자라면 그 때 점을 친다.
生年月日時.
정보일까.
그래, 뭘 알고 싶은가.
내 뭐하면 좋겠습니까. 바둑하고 있습니다만.
바둑 좋지.
학문은 어떨까요.
그것도 좋지. 공부하면 잘 할 수 있지.
돈은 좀 벌까요.
하하. 자네는 배추잎만 있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야.
배추잎?
돈이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산다는 말일쎄. 돈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일쎄.
이번에 대학원 시험 한 번 볼까요.
보게. 붙을거야.
뭘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군요.
하하.
안녕히 계십시오.
원서를 다음 날로 냈다.
서강대 대학원 정치학과.
시험은 한 달 후.
묘했다. 떨어졌는데, 내 앞에서 한 명이 등록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에게 입학할 기회가 주어졌다.
나에게 묘수였을까.
오후 12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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