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간의 승부 - 기사실의 문 - 관철동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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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상 일기(11월 3일) - 5년간의 승부 - 기사실의 문 - 관철동의 문
늦은 밤이다. 오전 12시 51분.
바둑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그러므로 전문기사 專門棋士.
전문기사라는 직업은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직종이었다.
조남철 선생이 일본에서 그 모델을 가져온 바둑이라는 직업.
내가 입단했을 때는 약 80명이 프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입단했을 때까지 프로는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가, 또는 프로는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저 바둑이 좋아서, 바둑 공부를 하다보니, 프로의 수준까지 왔고 운이 닿아 입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입단했어도 당장 “프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내면에 던져지지는 않았다.
실로 바둑을 본격적으로 둔다는 그 사실과
전문기사들의 사랑방인 기사실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그 사실이
“내가 프로구나”라는 인식을 주었을 정도였다.
그렇다.
기사실에 드나들 때야 비로소 나는 어디에 와 있는가를 느끼기 시작했다.
입단 전에도 기사실엔 가끔 갔었지만, 그러나 나는 외인 外人이었다. 외인이었다.
입단 후 1주일 쯤 지난 12월 중순으로 기억된다.
인사도 드려야 할 듯하고
또 바둑을 두고 싶기도 하고
나로서는 드물게 양복을 입고 넥타이도 골랐다.
오전은 너무 서두르는 듯도 해서 오후, 점심 이후를 시간으로 잡았다.
약간은 두근거리는 기분으로 기사실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관철동 한국기원 좁은 층계를 올라서면 4층 오른쪽에 위치한 남향의 작은 방.
탁자가 7개 쯤 될까. 그러니까 모두 14명이 바둑을 둘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었다.
간이 의자 두세 개와 철제 캐비넷 하나.
전화를 받으며 기사들의 편의를 도와주는 여직원이 한 명.
몇 분이 있었는데, 이봉근 사범과 나종훈 사범이 창가에 앉아 한가롭게 오후의 햇살을 쬐고 있었던 정경은 뚜렷하다.
반갑게 맞아주는 선배들.
입단은 모두에게 신선한 햇살과 같은 것. 맑은 물이 한 방울 흘러들어오는 것.
자신들의 입단 시절을 순간 회상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나중엔 그랬으니까.
나종훈 사범이 한 판 두자고 했다. 고마운 말씀.
프로와 호선으로 두다니! 흑돌을 하나 반상에 놓을 때의 그 기분은, 그러나 조심스러웠다.
태도에서 뭔가 실수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의무감이 들었다.
바둑의 승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리 말씀해 주셨다.
5단의 실력을 가지고 입단했네.
감사!
오래 머물 수가 없다는 느낌도 들었다. 여전히 뭔가 거북한 장소에 내가 있는 듯한 어색함 때문이었다. 한두 시간 머물었을 것이다.
첫 번째 기사실 방문은 그러했다.
내가 기사로써 인정받는다. 그러나 아직 기사로써 지녀야 할 자연스런 태도는 없다.
이런 기억도 난다. 연배라는 것이 있어서, 어려서 입단한 이창호 같은 경우는 기사실보다 바로 옆방에 있는 연구생실에 들러곤 했던 것.
기차의 작은 객차 같은 기사실은 포근했다. 딱딱하지도 건조하지도 않았다.
당시 한국기원 건물은 낡지 않았다. 1968년에 지은 것이니, 15년이 지난 건물.
3.1빌딩 뒤 두 번째 골목에 자리잡은 건물 주변에는 오늘과 달리 어지러운 네온은 거의 없었다. 건물 앞에는 원산정 元山亭이라는 설렁탕집과 커피숖 반쥴이 있었고, 막 자리잡기 시작한 도토루인가 하는 간편한 커피숖도 있었다.
돼지갈비를 굽는 연기로 검게 변한 창문을 지닌 음식점은 3.1 빌딩 바로 뒤 골목에 자리잡고 있었다. 한국기원 옆 좁은 골목엔 막걸리집도 적지 않이 있었지만, 그래도 한국기원 바로 앞 길거리에는 조용한 기운이 넘쳤다. 다니는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았다.
맘에 들었다.
드나드는 건물 주변이 어지러우면 건물 자체에 들어가기도 싫은 법.
관철동에 남은 한국기원이 바로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게 주변의 20대 위주의 맥주집과 소주집으로 - 그것도 유행이 하루가 멀다하게 바뀌는 - 덮여있는 것이 바로 오늘. 지나가다가도 발 길 한 번 제대로 들여다보고 싶은 기분이 없다.
그래도 기대는 해 본다.
요즘 청계천 주변에 노상카페도 생기는 등, 밝고 맑아지고 있으니 그 여파가 골목으로 들어와 줄 것을.
한국기원 관철동 건물은 여전히 아까운 건물인 것이다.
괜히 한 번이라도 더 들리고 싶은 건물이, 바로 주변의 여건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은 중요하다. 나는 1983년 겨울에 그 점을 느꼈다. 내가 기사실의 문을 열 때, 나는 관철동의 문을 연 것이다.
관철동의 일원이 된 것이다. 기사 생활은 관철동의 생활과 떠나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전 1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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