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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정이라는 말은 가용성이 큰 단어이다. 그런즉 세상에는 함정이 넘쳐난다고 볼 수 있다. 사랑의 함정, 논리의 함정, 착시의 함정, 믿음의 함정, 법률의 함정, 민주주의 함정, 종교의 함정, 본능의 함정, 미각의 함정, 다이어트의 함정, 언어의 함정, 돈의 함정, 대출의 함정, 직분과 직함의 함정, 텔레비전의 함정, 책의 함정, 철수가 파 놓은 함정, 함정의 함정, 기타 등등...... 기타 등등의 함정. 등등등. 아무튼 함정이라는 단어는 어디에 갖다 붙여도 의미가 생기면서 이해 적용이 가능하다. 함정은 곧 ‘역설’이라는 단어의 짝이며 우리 삶이 역설로 가득 차 있듯이 함정 또한 삶의 도처에 널려 있다.

 함정은 바둑에도 있다. 아니 바둑이야말로 온통 함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국에 임하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긴장의 끈을 늦춘다거나 방심하면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한 판의 바둑은 인생과도 같다’는 말에 비추어 볼 때 인생과 바둑은 같은 종류의 함정을 공유한다.

 바둑에서 기술적으로는 자충의 함정, 축의 함정, 세력의 함정, 실리의 함정, 정석의 함정, 모양의 함정, 형세의 함정, 패의 함정, 귀의 함정, 1선의 함정, 젖힘과 끊음의 함정, 수읽기의 함정, 사활과 맥의 함정, 선수의 함정, 빵때림과 먹여치기의 함정, 치중의 함정, 빈삼각의 함정 등이 있으며, 기술 외적으로는 컨디션의 함정, 초읽기의 함정, 속기와 장고의 함정, 손 따라 두기의 함정, 스타일의 함정, 상대성의 함정, 징크스의 함정, 면대면 바둑의 함정, 접바둑의 함정, 치수의 함정, 덤의 함정 등이 있다. 그밖에도 바둑을 두다 보면 의욕이 넘쳐서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있고, 때로는 실리를 챙기지 못해서 허무하게 지는 경우도 있으며, 때로는 게으르거나 오만하여 자멸하는 경우도 있다.

 바둑은 철저하게 논리이며 사고를 바탕으로 한 게임이자 생각을 넓혀나가는 훈련이다. 따라서 바둑을 두는 것은 실수를 줄일 줄 알게 되는 일이며 함정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기도 하다. 바둑을 두다보면 바둑판을 뒤집어 엎어버리거나 컴퓨터 모니터를 주먹으로 치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는 일을 종종 겪게 된다. 주로 상대방의 기풍이 나와 상극을 이루어 자꾸만 함정에 빠지게 될 때 그처럼 평정을 잃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바둑이라는 소우주 안에서 새로운 함정에 빠지고 극복하고 하는 일을 겪어 나간다는 것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그것은 인생의 예고편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찬돌이 백주임의 함정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것은 백주임 스스로 판 함정이 아니었다. 어떠한 일이든 자발적이며 의욕적일 때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는 법이다. 백주임의 함정은 그런 측면에서 허술했다. 백주임을 뒤에서 조종하려던 자들은 그 부분을 고려하지 않았고, 찬돌을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화곡동에 있는 청솔 기원을 드나드는 구회장이 목표였다. 구회장은 40대 중반의 비교적 젊은 나이였으며 회장이라는 호칭은 여러 친목 모임을 이끌던 경력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뿐 별다른 직업은 없었다. 다만 듣기론 구 회장의 와이프가 돈을 잘 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소문에 걸맞게 구 회장은 평소에 돈 씀씀이가 큰 편이었다.

“찬돌아. 화곡동 구회장 있잖아. 요즘 포커에 미쳐서 수천 날렸다더라. 딱 지금이 엮을 기회지 않냐? 바둑에서 회복하려고 할 거 아냐.”

찬돌이 역곡 기원에서 오랜만에 정석 책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백주임이 넌지시 건넨 말이었다. 찬돌은 백주임이 먼저 작업 이야기를 꺼내는 게 이상했지만 내색은 않고 평범하게 답했다. 

“형. 접바둑은 조심해야 해. 은근히 엮는 게 힘들다니까.”

그러자 백주임이 적극적으로 찬돌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야. 솔직히 구회장이 두 점 바둑이냐? 너하고 두려면 넉 점은 깔아야 할 걸.”

“청솔 기원은 카메라 설치 못 해. 거기 천장엔 석고보드 없이 바로 콘크리트인 거 몰라?”

“그럼 니가 선수로 직접 뛰면 되잖아. 강서 쪽에선 니 얼굴 아직 안 팔렸으니까. 내가 밑밥을 뿌려 놓은 뒤에 바로 낚으란 말야.”

“내가 전에 얘기했잖아. 토끼는 집 주변의 풀을 먹지 않는다고.”

“야. 부천에서 화곡동이 거리가 얼만데.”

찬돌은 잠시 말이 없었다. 백주임은 그러한 찬돌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찬돌은 백주임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번엔 조금 노골적으로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전했다.

“참. 나. 형 좀 이상하네. 지난번에 붙잡혀 들어갈 뻔 했으면 오히려 추위를 타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백주임은 반응이 빨랐다.

“얌마. 그깟 일로 무슨...... 짭새들 별 거 아냐. 증거와 자백 없으면 깨갱 한다니까.”

지난 번 난곡에서의 일로 구속될 줄 알았던 백주임은 무혐의로 풀려났다고 했다. 기원 원장이 형사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돈 치우라고 소리친 덕에 현장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고, 백주임 자신은 얼른 자석으로 귀의 리시버를 뺀 뒤 삼켜 버렸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강단이 있는 안사장이 딱 잡아 때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용기를 얻어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는 말은 설득력 있게 들렸다. 하지만 서울 지방 경찰청 지능범죄과 조사실로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던 백주임이 그 후 열흘도 안 돼서 건수를 만들어 보자고 찬돌에게 제안하는 건 납득이 가지 않은 일이 분명했다.

 찬돌은 바둑을 둘 때도 뻔히 보이는 성동격서를 작전이랍시고 공을 들이는 상대를 혐오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 백주임의 의도는 축이 나올만한 접전 지역에서 일부러 손을 뺀 뒤에 다른 곳에서 싸움을 거는 척하며 축머리에 돌을 놓는 방식과 흡사했다.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딴청을 피우면서 제 2의 분쟁지역에만 몰입하는 척하며 나름대로 연기에 열중하는 모습 같아서 안쓰럽기까지 했다. 찬돌은 잠시 백주임을 바라보면서 착잡한 심정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제대로 겁을 먹었구나.’

그러나 배신은 어디까지나 배신이었다. 용서는 할 수 있으되 배신자를 계속 친구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찬돌은 좀 더 생각을 정리하는 듯 하다가 일단은 백주임이 듣기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기로 하였다.

“그래. 알았어. 구회장 밑 닦는 걸로 알고 있을게. 준비 다 되면 알려 줘.”

“오케이. 그럼 난 내일부터 화곡동으로 출근한다. 나중에 보자.”

백주임은 화색이 도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둘러 떠나고 있었다. 찬돌은 그러한 백주임의 뒷모습이 밉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가 나가고 난 뒤엔 금세 평정심을 되찾고 있었다. 자칫 미움이 커져서 분노가 싹트게 된다면 이로울 게 없었다. 어차피 게임을 시작하기로 하였으니 이제부터 차분히 생각만 하면 될 일이었다.

 리무진은 장충단 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장충 체육관을 지나자 왼쪽 차창 밖으로 신라호텔이 보이기 시작했다. 차민은 전에도 신라호텔에 몇 번 와 보았지만 기사가 딸린 리무진을 혼자 타고 호텔로 들어가자니 어딘가 어색했다.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일처럼 느껴졌다. 다른 때 같았으면 리무진은 필요 없으며 내 차를 타고 가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했을 테지만 이번엔 사정이 달랐다. 차민은 자신을 초대한 사람의 신분을 고려해서 친절과 격식에 맞는 응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방은 현대 도시문명에 적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름을 기억할 만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차민으로서는 그러한 인물이 자신을 초대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에도 기업 총수들이 바둑 한 수 배우자고 종종 초대장을 보내온 경우가 있긴 했지만 이번엔 성질이 달랐다. 혹시 영어에 능통한 프로기사를 원했던 걸까 생각해 보았지만 바둑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꼭 대화에 비중을 둘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든 차민은 만 달러라는 거금을 쉽게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아 버리기가 아깝기도 했지만 절반은 호기심으로 개인 지도대국에 응하기로 하였던 것이었다.

 얼마지 않아 신라호텔의 도어맨이 리무진의 뒷좌석 문을 허락도 없이 열고 있었다. 차민은 자꾸만 손이 뒤통수로 가려는 걸 참으며 차에서 내렸다. 주변에 지나치는 호텔의 내왕객들이 리무진에서 나오는 차민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최고급 리무진을 타고 온 사람 얼굴이나 한 번 구경하자는 심리들일 테고 혹시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인물일 것 같으면 즉각 관심을 거둘 게 분명했다. 하지만 차민이 모습을 드러낸 뒤 사람들의 시선은 한결 같았다. 개중에는 일행과 대화를 하는 중에 앞에 선 사람을 밀쳐내고 바라보는 여자도 있었다.

 차민은 훤칠한 키에 단단한 체구였으며 서글서글한 인상의 미남자였다. 그리고 40대 중반의 나이에 걸맞은 스타일 좋은 수트를 입고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이른 성공을 이룬 기업가의 전형에 딱 들어맞아 보였다. 하지만 그가 한 때 라스베이거스에서 활약하던 갬블러였으며 지금은 귀국하여 프로 바둑 기사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전후 사정과 남들의 오해야 어떻든 차민은 그를 초대한 사람의 친절과 배려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젠 아예 상황을 즐기는 게 낫겠다 싶어졌다. 리무진에서 내린 그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호텔 지배인이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직접 길 안내를 자청하며 앞장서서 걷고 있었던 것이다. 차민은 주변에서 쳐다보는 사람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지배인을 따라 호텔로 들어갔다.

 신라호텔의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을 거쳐간 세계적인 명사는 고르바초프나 클린턴 같은 각국의 대통령들을 비롯해서 기업인과 연예인 등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으며 지금 그곳에 머물고 있는 인물 역시 명성에 있어서만큼은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엘리베이터 앞에까지 나와서 차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을 맞잡기는 했지만 차민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그의 안내를 받아 거실로 들어가면서 억지로라도 생각을 정리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결국 생각해 낸다는 것이 ‘잃어버린 아들이라도 찾고 계시나요? 혹시 제가?’ 하는 혼자만의 농담이었다. 하지만 차민은 곧 영 싱거운 생각이었다고 여겨지자 비약을 접고 가장 단순한 곳에서 답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의외로 답은 쉽게 나왔다.

‘이 인간. 정말 바둑을 좋아하나보구나.’

그랬다. 그를 초대한 장본인 필 소더버그 회장은 오랜만에 수준 높은 대국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급히 다 마신 커피의 잔향이 목젖 언저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을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에 소더버그는 자신의 기대를 차근차근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고 있었다. 

 소더버그의 방에 머물고 있는 사람은 차민을 제외하고도 세 사람이 더 있었다. 건장한 체격의 백인 남자는 고든이라는 이름의 보디가드였고 매혹적인 미모의 동양계 여성은 카나에라는 여비서였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뒤통수가 하나 더 있었다. 그 뒤통수는 족히 마흔 평은 되어 보이는 광활한 거실의 구석에서 위성 방송을 시청하고 있었으며 이름은 미구엘이라고 했다. 그리고 바둑판 위에서 포석이 끝마무리되어갈 무렵 소더버그는 카나에를 불러 미구엘을 데려오라고 지시하였다.

 처음 바둑을 시작할 당시에 테이블 위에 두 개의 바둑판과 각각의 돌통이 놓여 있던 것을 보고 차민은 소더버그가 바둑을 좋아하다 못해 바둑판 모으는 취미도 갖고 있으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미구엘이라는 이름의 라틴계 소년이 다가와서 소더버그 옆자리에 앉더니 새로운 바둑판 위에다가 지금까지 차민과 소더버그 사이에서 두어진 대국 내용을 그대로 복기를 하는 것이었다. 대국 내용을 지켜보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30여 수의 수순을 정확히 놓는 게 신기하기도 했지만 열서너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라틴계 소년이 바둑돌을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은 이색적이었다.

 그런데 차민을 기암하게 한 것은 그 다음 일이었다. 미구엘이 복기를 다 마치자 소더버그는 그 쪽 바둑판 위에 돌을 올려 놓아가며 자신의 흑돌들이 포진 된 변 쪽에 침투한 백돌을 상대하는 방법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었다. 차민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아무리 바둑 저변이 얕은 서양이라지만 기본적인 매너는 동서고금에 큰 차이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건 어때?” “글쎄. 기세를 생각하면 위로 뻗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하며 소더보그와 소년이 이젠 대화까지 나누면서 의논하는 모습을 보자 차민은 짜증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그래서 그는 목을 만지작거리면서 고개를 이리 저리 움직여 보였다. 소더버그는 옆으로 크게 돌아앉은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한 차민의 반응을 느낄 수 있었을 테고 차민이 어디 언짢은 데라도 있나 하고 생각해 볼 법도 하였다. 그러나 소더버그는 미구엘이라는 소년과 돌을 놓아보는 일을 마저 끝내고 있었다.

“오케이. 그럼 변 쪽은 그렇게 처리하는 걸로 하자.”

그렇게 말을 하고는 소더버그는 흑돌을 하나 집어 차민이 아까 놓았던 백돌에서 한 칸 떨어진 곳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 흑돌은 아까 옆 자리의 미구엘과 시험적으로 놓아보던 돌들 중에 하나였다.

 차민은 과거 20대 시절에 바둑을 두던 도중에 그만 화를 이기지 못해 팔을 휘둘러 바둑판 위의 돌들을 쓸어버린 적이 한 번 있었다. 지금 차민은 그 때만큼 이성을 잃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바둑판 위의 돌들을 쓸어버리고 싶은 욕구는 그 때보다 지금이 더 컸다. 하지만 차민은 지난 20여 년 간 마인드 스포츠를 전문적으로 공부하였고 이미 마스터의 위치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를 주름잡다가 출입금지 조치를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그 후 각종 포커 대회에서 강자들을 물리치고 챔피언이 된 게 여러 번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고국으로 돌아와 그토록 어렵다는 프로 바둑 기사가 되었으며 2년 만에 4단에 올랐다.

 차민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조용히 백 돌을 하나 집어 들어 방금 놓인 흑돌 밑으로 붙여 놓았다. 원래는 초반부터 3선에 놓여 있는 상대방의 돌 밑에 2선으로 갖다 붙이는 것은 좋은 시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차민의 의도는 상대방이 어디로 젖히든 끊어서 판을 어지럽게 만들려는 시도였다. 그것은 ‘흔들기’라고 불리는 일종의 심리 전술이었다. 그리고 초반부터 그런 식으로 몸싸움을 걸어가는 일은 바로 몹시 화를 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소더버그는 백의 도발에 대해 평범하게 받아둘 작정이었는지 흑돌에 붙여진 백돌의 밖으로 젖히는 위치로 손이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옆에서 ‘딱’ 하며 바둑돌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차민과 소더버그는 동시에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옆 자리의 미구엘이 복기를 해 놓은 바둑판 위에다 흑 돌 하나를 내려놓은 뒤에 막 손을 떼고 있었다. 그 흑돌은 소더버그가 차민의 손을 따라 두려고 했던 변 쪽과는 거리가 먼 반대 쪽 변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확실히 그 곳에 놓인 흑돌은 좋아 보였다. 아까 차민이 흑돌의 밑으로 붙여 놓은 백돌에 대해 흑이 반응을 하지 않아 백이 한 수 더 놓게 된다면 그 일대는 완전히 백의 진영으로 굳어져버리면서 대여섯 집의 실리를 챙길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바둑 판 위에서 포석이 완전히 끝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미구엘이 선택한 곳은 흑돌이 놓을 수 있는 마지막 큰 자리였다. 더구나 그곳은 백의 진영을 이루는 돌보다 한 칸 아래인 3선이었기 때문에 흑의 진영을 만들기도 하면서 백의 진영 밑으로 파고들어갈 수도 있는 좋은 위치였다. 그러고 보면 그 자리는 차민이 먼저 돌을 놓았어야 할 곳이었다. 그러나 차민은 소더버그와 미구엘이 대국 도중에 신경 거슬리는 행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그만 가치가 덜한 곳에 가서 서둘러 싸움을 걸었던 것이다.

 바둑판을 잠시 응시하던 소더버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구엘이 보여준 것과 같은 위치에 돌을 올려놓고 있었다. 차민은 이제 정말 한계에 이른 것만 같았다. 지금 그는 자신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건 도저히 바둑 대국 중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체스나 장기 같은 다른 보드게임이라 할지라도 명백한 반칙이자 치사한 짓거리가 분명했다. 차라리 꼬마도 바둑을 두고 싶을 것 같으면 옆에다 새로 판을 짜면서 2대 1로 다면기를 하자고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대국 도중에 아이를 옆으로 불러다 앉히고, 그 애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훈수를 두기 시작하다니. 이게 뭔 짓거리인가. 차민은 빌어먹을 애새끼가 어른들 노는데 불쑥 끼어들어서 잘난 체를 한 것만 같아서 생각 같아서는 녀석의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고 싶어졌다. 아니면 보란 듯이 소더버그 회장 앞에서 바둑판 위의 돌들을 확 쓸어버리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을 실천하게 된다면 그 뒤에는 당연히 준비된 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 같이 기본도 안 되어 있는 인간이 어떻게 NS 사의 회장노릇을 해먹고 있는지는 몰라도 어쩌고저쩌고 어쩌고저쩌고. 울라불라 울라불라. 

 하지만 차민은 혈기왕성한 젊음 따위는 이미 오래 전에 떠나보낸 완숙미를 갖춘 사내였다. 더구나 아직 참아 볼만한 여지는 아주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다. 차민은 다시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상대는 다름 아닌 서양인이 아닌가. 어쩌면 자신이 미처 다 배우지 못한 문화의 차이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니 소더버그 회장의 환대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을 만큼 컸으나 대화는 인사말 몇 마디가 전부였다. 그렇다면 소더버그 회장의 진심어린 환대는 뭐고 지금까지 보인 매너 없는 행동은 또 뭐란 말인가. 순간 차민은 정신이 번쩍 드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뿔싸. 뭔가 오해가 있었구나. 협회에서 오늘 일정을 설명해 줄 때 중요한 내용을 빠뜨렸을 수도 있어. 두 사람이 함께 의논을 하면서 바둑을 두겠다는 말을 전했는데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몰라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전달하지 않은 거야.’

차민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차 있던 화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에 남몰래 실소를 한 번 하고는 말없이 백돌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방금 공격과 수비를 겸하는 곳에 놓인 흑돌의 밑을 파고들 수 있는 2선에 백돌을 내려놓았다. 그곳은 흑과 백 양쪽 모두 실리를 차지하거나 선수를 넘겨주거나 하게끔 결정되는 곳이었다. 그러자 소더버그는 바둑판 전체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방금 백이 놓은 2선을 막기보다 선수를 활용할 수 있는 다른 곳을 찾고 있음을 의미했다. 그러더니 소더버그는 잠시 숨을 고르려는 듯 손에 들고 있던 흑돌을 바둑통에 다시 내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오랜만에 바둑판에서 눈을 떼더니 차민을 바라보며 뭔가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고 있었다. 

“협회의 미스터 최라는 사람이 자세한 설명을 안 해 주었나 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