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타산과 삼화사 | 나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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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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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타산과 삼화사
2009-05-10 오후 10:46 조회 4686추천 12   프린트스크랩
 

 동해시 하면 대의(大義)가 떠오르고, 대의 하면 두타산과 삼화사가 생각난다. 이 대의는 애국하고 애향하는 따뜻하면서도 굳건한 지역민들의 우국충정이다.  원래 동해시 하면 먼저 떠오르는 순서는 두타산이 첫째이고, 다음이 삼화사이며 대의는 그 다음 순이다.

 

 물론 두타산하면 무릉계가 들어있다. 박달골 계류와 사원터계류를 모아서 용추폭포에서 무릉반석까지 이어가는 4키로의 무릉계곡은 또 다른 두타산의 대명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무디다 해도 무릉반석에 양사언이 썼다는 武陵仙源(무릉선원) 中臺泉石(중대천석) 頭陀洞天(두타동천)에서 절정을 이룬 절경을 못 본 척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더 아름다운 것은 풍광 속에 내재된 우국충정이다. 두타산과 삼화사가 있었기에 지역민들의 대의를 볼 수 있었고, 이 대의 때문에 사실은 떠오르는 순서가 따로 있다고 할 수가 없다.

 

 지금도 동해에만 가면 두타산과 백봉령에 등을 기댄 체 끝없이 출렁이는 대양을 가슴에 품게 되고, 여기에서 쌓이는 호연지기에서 대의를 배우게 된다. 바로 이것이 오랜 세월 주민들의 가슴속에 싹을 틔워 임진왜란 때 삼화사와 한 몸이 되어 이 지역을 지켰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써 오기도 했고, 또 동해시를 순산하게 한 주연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두타산과 삼화사는 그래서 동해시의 또 다른 이름이요, 동해문화의 뿌리이기도 하다. 이 지역을 지켜온 역사의 현장이었든 삼화사는 두타산의 산색에 꼭 절이 있어야 어울릴 불연승지였기에 주저함이 없이 생겨났고. 또 두타산이 가장 두타산 다울 수 있었던 것도 빼어난 풍광 때문이 아니라 두타행의 본산인 삼화사가 있었기에 비로소 이름값과 품위를 갖출 수 있었다고 하니 지역민과 더불어 이어온 이들의 역사와 조화는 동해의 역사가 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모두가 다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쩜 이 기막힌 연은 동해시의 대명사가 된 두타라는 산 이름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두타(頭陀 : dhuta)는 범어로 “의식주에 대한 탐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행위”를 말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두타행이 바로 스님들이 가야하는 수행길이고 보면 두타산은 스님들의 수행도량이 마땅히 있어야 했고, 그 도량이 되돌아 두타산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불가분의 연이 시작된 게 아닌가 싶다. 닭과 계란처럼 무엇이 먼저인지는 알 길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삼화사 또한 이름이 붙혀진 연부터가 그리 가볍지가 않다.

 서기650년(진덕여왕 4년)이후 신라의 자장율사에 의해 조그만 움막으로 시작하여 851년(문성왕13년)에 와서야 삼불 또는 삼선이 묵었다 해서 처음 삼공암이란 이름으로 역사에 등장했다고 하는데, 현재의 삼화사란 이름은 고려태조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고 조칙을 내려 하사한 것으로 삼국을 아우른다는 뜻이었다 한다.

 

 삼화사의 이름 못지않게 역할도 보통이 아니었다고 하는데, 다 철불인 비로사나불의 특별한 가피력 때문이 아닌가도 싶다.

 고려 왕건이 영 넘어 산골구석 이름도 없는 절에 특별히 조칙을 내린 것도 다 이 절의 영험이 컸다 해서이다.

 

 그래서 통일전쟁 때 수없이 죽어간 원혼들과, 가족과 재산을 잃은 유민들을 달래기 위해 천도재 까지 지내게 한 것도 이 절의 특별했던 역할이었다고 한다. 삼화사가 지금도 해마다 지내고 있는 수륙재의 시원이기도 하다.

 

 왕조가 바뀌어 불교를 탄압하는 조선시대에 와서도 탄압은커녕 조정으로부터 사랑받은 사연은 심상치도 않지만 가슴도 아프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면서 고려 왕씨 일족을 강화도와 거제도로 유배시켰고, 공양왕과 두 아들은 원주, 고성을 거처 삼척으로 보냈다가 살해하고 만다. 태조 3년의 일이다.

 

 국기를 다지는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아무 힘도 없는 사람을 살해한 것이 이성계의 양심을 괴롭혀, 이곳 삼화사에 원혼을 천도하는 수륙재를 지내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것도 배불시대에 삼화사가 특별히 사랑받은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삼화사가 조선왕조의 사랑을 받은 속사정은 태조 이성계의 개인적인 내력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삼화사가 있는 두타산 자락에 이성계의 5대조 묘(준경묘, 영경묘)가 있었고, 이 자리에 묘를 쓰면 4대후에는 새 왕조를 세울 큰 인물이 난다는 풍수설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삼화사가 소장하고 있는 금자, 은자의 불경이 이성계 4대조인 목조가 손수 베낀 것이라는 것들이 다 조정의 지원을 이끌어 낸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누구든 신분이 달라지면 달라진 신분에 맞는 가계의 포장은 시세말로 당근이다. 이 대목에선 5천년 역사를 굴절시킨 지도자의 이기가 신라의 김춘추, 김유신과 더불어 또 한번 가슴을 치기도 한다.

 

 중국의 양자강 이북, 산동반도, 요동, 요서, 만주, 동몽고, 시베리아 그리고 구주를 포함한 서부 일본까지 관할했던 단군조선의 영광을 되찾고, 그 통치영역을 되돌려 받겠다는 고구려의 원대한 국가목표를 그대로 이어받은 고려의 건국이념을, 위하도 회군으로 끝내 망쳐버린 이성계의 이기심 때문이다.

 

 당시 권력 중심에 있던 고려의 최영이 만주수복을 시도한 것은 고구려의 건국이념을 받들어 북방세력권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는데, 이때가 우리 역사상 500년 만에 겨우 찾아온, 하늘이 내린 절호의 기회였다니 어찌 땅을 치고 가슴을 칠 일이 아니겠는가?

 

  당시 만주를 차지했던 몽고(원)가 물러가고, 새 주인을 자처한 명(주원장)은 나라를 세운 직후라 변경을 돌볼 여력이 없었으며, 특히 만주의 정치적 중심지인 요양(요령성 일대)의 평장 왕우승이 성문을 열고 고려에 내부 할 것을 자청해 왔다니 이 얼마나 좋은 기회였던가?

 

 더 안타까운 일은 당초 만주수복에 최영이 앞장 설 계획이었으나, 유약한 우왕 때문에 이성계를 시킨 것이, 결국 우리가 지금까지 조그만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니 어처구니없는 운명과 기구한 국운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이런 이성계를 우리는 부패한 고려를 뒤엎은 영웅으로만 알고 있다. 이성계의 회군은 그래서 오늘날 정치꾼들의 거짓말과 철저한 이기주의의 시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삼화사와 지역민들 간에 얽힌 연은 또 어떤가?

 삼화사와 지역민의 연도 깊지만 오늘에 와서 시민정서가 되기도 한 대의정신을 싹틔운 상생의 극치는 임진왜란 때 지역민의 의병활동과 삼화사의 병참지원이 백미가 되고 있다.

 

 적당히 하는 활동과 지원이 아니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한 활동이요 지원이었다. 당시 의병들은 왜군의 한양 진출을 막기 위해 두타산성에 진을 치고 항전했고, 왜병은 험준한 지형으로 공격로를 찾지 못해 발이 묶여 고전했다.

 

 이때 삼화사가 지원한 병참은 주로 식량과 의복이었다. 나중에 이를 안 왜병은 삼화사에 불을 질러 병참선을 끊었고, 삼화사는 자신을 죽여 의병들을 지원한 순국열사가 되었다.

 

 이런 가슴 아픈 상황 속에서도 의병들은 풀을 뜯어 만든 신장상으로 군사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면서 저항했으나, 무지한 한 노파에 의해 배후공격로를 알아낸 왜군의 공격으로 끝내 전멸되는 비극을 맞이한 의병사는 가슴을 치게 한다.

 

 당시 죽은 사람의 피가 모인 소라 하여 “피소굽”이 아직도 남아있고, 화살이 떠내려 간 냇물이라 하여 전천(箭川)이 아직도 흐르고 있다. 왜군에게 배후공격로를 일러준 노파를 “마고할미”라 부르며 저주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그 노파는 무지는 했어도 인자했던 우리네 어머니였었던 사연은 가슴이 더 아플 뿐이다. 

 

 의병으로 나간 아들이 보고 싶어, 옷과 먹을 것을 챙겨 산성으로 찾아가다가 왜군에게 붙잡혀 이기령을 넘어 중봉을 거쳐 산성으로 가는 길을 실토하고 말았다는 설화가 그것이다. 이 얼마나 가슴 칠 일이던가?

 

 자신의 아들은 물론 수많은 의병들을 전멸시킨 이 노파는 무지가 큰 죄업을 짓게 했다. 무지가 죄라는 것도 여기서 실감했고, 그래서 부처님은 치(어리석음)가 탐(욕심)과 진(성냄)과 더불어 무서운 독이라고 일찍부터 가르치고 있었던 이유도 알 것 같기도 했다. 바로 삼독의 독이다.

 

 어쨌든 지역민은 우국충정을 기리는 대의를 삼화사로 하여금 보여주었고, 삼화사는 우국충정과 지역민에 대한 사랑을 몸으로 보여 주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불가분의 연은 어짐과 지혜로 상징되는 산과 대양을 품고 있는 이 지역의 명운이 아닌가도 싶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전국에서 일어난 항일투쟁 때에도 삼화사는 의병들의 은신처와 병참기지가 되었고 이로서 또 다시 일분군의 방화로 전소되는 비운을 맞았다고 한다. 임란 이래로 구한말까지의 300여년간 산불과 산사태, 화재와 방화 등으로 도리 킬 수 없는 큰 재앙이 많았는데도 이때마다 관과 지방민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재건되었다니 이기가 판치는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이타의 연은 서로가 두타 행을 실증하고 있는 듯 하다.

 

 이처럼 민족의 기운과 연결된 삼화사는 또 제왕운기를 낳게 한 동기를 제공한 곳이기도 하다. 매사는 결과보다 동기가 중요하다 했다. 동기가 없으면 결과도 없기 때문이다.

 

 고려 충렬왕때 간관이자 시인이었던 동안거사 이승휴가 낙향하여 두타산 기슭에 머물 때 삼화사가 소장하고 있는 불경을 매일 빌려 10년 만에 완독한 것이 민족정기의 대 서사시인 제왕운기를 쓴 기량이 되었다고 한다. 저 영광스러웠던 단군의 역사를 되찾은 기량이었다.

 

 이게 제왕운기의 진정한 가치이기도 하다. 김춘추(김유신)-김부식-이성계로 이어진 사대모화사상을 질타하고, 윤관의 17만대병-묘청의 고토회복운동-최영장군의 요동정벌계획으로 이어진 선조들의 웅지와 기개도 모두 제왕운기가 찾아준 영광스런 단군역사에서 찾고 싶다.

 

 이일에 삼화사가 중심에 있었다니,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삼화사는 동해시 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자랑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동해시의 나이가 어리다고 가볍게 보지도, 시민정서가 어떠냐고 묻지도, 그리고 무엇을 했느냐고 알아보지도 않기로 했다. 모두 다 두타산과 삼화사의 역사가 웅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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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즌 |  2009-05-10 오후 11:59: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늦은 시간 잠시 배우고 갑니다~인사가 늦었습니다
건안, 건필 하십시오~*  
월력 감사합니다
youngpan |  2009-05-11 오전 12:27:2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탐진치 치심이라..애닯습니다..  
월력 그렇습니다.
소라네 |  2009-05-11 오전 3:12:48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국운을 좌우할 국제정세의 이해를 역사 속에서 배워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월력 감사합니다.
당근돼지 |  2009-05-11 오전 4:04:17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27.8여년전 동해시의 아는 선배님과 무릉계곡에 다녀온 기억이
당시엔 아무것도 모르고......오늘에야 잘 배우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월력 오래전에 다녀 오셨네요. 감사합니다.
고기뀐지 |  2009-05-11 오전 5:38:32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그 부근에 살았으면서도 가지못하고 말로만 듣던 무릉계 내력을 월력님 덕택으로 앉아서
환하게 알게되어 좋습니다. 나중에 진실로 사랑하는 자와 함께 꼭 한번 다녀올까 결심해봅니다. 남사고선생이 무슨 비서를 얻게 된 곳도 ...... 감사합니다.(_ _ )  
월력 꼭 다녀오십시오. 같은 구경이라도 아는것을 보면 맛이난답니다.
팔공선달 |  2009-05-11 오전 6:35:44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언젠가 선달이가 다녀 올곳으로 찍혔읍니다 ^^=

감사하고 건강 하시고 건필 하십시요 .굽벅 ^^=  
월력 선달님도 꼭 한번 다녀오십시오. 이런게 역사공부의 매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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