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서류 부피는 사건이 복잡 할수록 두꺼워 진다. 판사의 업무 중에 가장 곤혹스러운 것이 재판서류를 읽고 그 사건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형사사건에 있어서는 법률을 위반하였느냐 아니냐의 판단인 반면에 민사재판을 하는 경우는 곤혹스러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용재는 재산다툼의 민사사건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재판임을 아는 지라 그런 사건을 맡지 않으려고 하지만 초임 판사도 아니고 부장판사인 자신이 맡아야 하는 민사재판이 점차 많아지자 많이 힘들었다.

  바둑도 곤마가 많아지면 힘들 듯 재판도 복잡한 민사재판은 판사라는 직업이 남들이 보기에는 선망의 대상인지 몰라도 당자자인 용재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각종 증거자료를 보고,  이해당사자간의 다툼에 대해 재판상의 판결을 내리려면 그것은 중노동이었다.

  “띠리리링........”

  용재의 핸드폰이 울렸다. 용재는 자신이 사귀는 미선이가 전화를 하였을 것이라 생각하고 얼른 받았다.

  “나야, 이 시간에 웬일이야?”

  “용재 씨, 저 최 연희 기자입니다.”

  “네?!, 최 기자라고요.”

  “왜요, 전 전화하면 안 되나요?”

  “아뇨, 그게 아니라.......”

  “여자친구 전화 기다리시는 걸 눈치 없는 제가 전화를 했나 보네요!!”

  여자들의 직감은 이럴 때는 소름이 돋는다. 용재는 최 연희 기자가 어쩐 일일까 궁금해 졌다. 지난번 바둑을 둔 뒤로 그녀의 소식이 궁금했으나 자신이 먼저 전화를 하기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 뒤로는 최 기자에 대해 말이 없으시기에 그는 그만 그녀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에서 아주 커다란 박동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쩐 일이세요?”

  “제가 이번에 고교 동문 전 바둑시합을 사전에 취재를 하기로 되어있거든요. 출전고등학교와 선수명단을 보다가 용재 씨 이름이 K고등학교 선수 명단에 있기에 취재를 할까 하는데 괜찮으세요?”

  “절 취재 하신다고요?”

  “용재 씨가 주장으로 되어있던데 판사님이라 너무 바쁘신 것 아니에요?”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럼 가도 괜찮은 걸로 알고 내일 들리겠습니다. 내일 점심이나 한 끼 사주셔요.”

  “아, 네.......”

  용재가 미쳐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용재는 그녀의 행동이 무례하기 보다는 자신에 넘치는 행동처럼 느껴져서 내심 흥미를 느꼈다. 마침 내일은 목요일이라 재판도 없으니 점심시간을 내는 것은 무리가 아닌 듯 하였다. 사실 바둑을 두고 난 뒤에 최 연희 기자가 왜 일부러 자신이 진 바둑을 빅으로 만들어 주었는지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으나  아버지가 눈치를 챌까 걱정이 되어서 물어보지 못하였으니 이번에 만나면 그 이유를 물어보리라 생각하였다.

  용재는 최 연희와 통화를 한 뒤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머리도 맑아지고 재판 서류를 보는 것도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최 연희는 바둑을 둔 이후에 용재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렸으나 용재의 아버지는 그 뒤로 아무런 연락을 주지 않았고 차일피일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고교바둑 동문 전 선수명단을 우연히 살펴보다가 낯익은 이름인 용재를 발견하고는 쾌재를 불렀다. 용재와 인연을 이어갈 절호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최 연희는 이 기회를 놓치면 영영 용재를 만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원래 이 고교 동문 전 취재는 이미 보도국에서 다른 기자로 내정되어 있었다. 최 연희는 보도국장을 찾아가서 자신이 고교 동문전을 취재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니, 최 기자 고교 동문전엔 나이 드신 분들이 출전하는데 우리 최 기자 스타일과는 안 맞을 텐데.......어쩐 일이람?”

  “국장님, 제가 이번 고교 동문전에 취재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그게 뭐지? 말해봐 이유가 타당하면 내 들어주지”

  “지금은 뭐라 말씀드리기 곤란하고요 담에 일이 잘되면 제가 한턱 쏩니다.”

  “거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자넨 꽃 미남 프로기사 취재가 전문 아니던가?”

  “아니 해 주실 건지 아닐 건지 그걸 말씀해주세요 국장님.”

  “최 기자 떼쓰는데 안 해 주면 나중에 그 원망 내가 어찌 듣나”

  “감사합니다. 국장님.”

이렇게 어렵게 만든 취재의 기회를 최 연희는 최대한 살리고 싶었다. 용재라는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은 여자의 유혹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진하게 꿈틀대었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표범 같은 노림수를 그녀는 준비하고 있었다. 바둑을 빅으로 만들 때부터 시작된 그녀의 노림수가 용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용재와의 통화를 끝낸 최 연희는 피부메이크업을 받기로 하였다. 단 한번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는 평소의 그녀의 지론대로 그녀는 용재를 그녀의 사랑의 포로로 만들고 싶어졌다. 마치 엄청난 힘으로 상대방의 대마를 함몰 시키는 싸움꾼처럼 그렇게 그녀의 욕망이 가슴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계속)

5편

  용재는 아침부터 불안했다. 최 연희가 점심을 사달라고 하였으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어가자 혹여 미숙이 전화를 하지 않을까 그것도 염려가 되었다. 미숙은 가끔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서 용재와 점심을 먹자고 하기 때문이었다.

  “부장님, 어디 편찮으세요?”

  “아니야, 그냥 좀 기분이.......”

  총무과 직원이 결재를 받으러 왔다가 용재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말을 걸었다. 용재는 자신이 초조해 하고 있는 모습을 들킨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용재의 핸드폰이 거세게 떨었다. 최 연희였다.

  “여보세요. 연희 씨........지금 어디예요?”

  “어머 용재 씨, 제 전화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저 지금 법원 앞이거든요. 지금 나오실 수 있나요?”

  “아, 그러세요. 금방 나가지요.”

  전화를 끊은 용재는 지하주차장으로 차를 가지러 가기위해 승강기를 탔다. 그 때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미숙이다. 하필 이런 때 전화를 하는 것이 맘에 걸린다.

  “자기, 어디야?”

  “아, 나 점심약속이 있어서........”

  “누구랑?”

  “검찰청 부장검사 하고.........”

  “에이, 하필이면 오늘이야........”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자기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요?”

  “오늘?,  오늘이 무슨 날이지?”

  “어휴 누가 판사님 아니랄까봐...........오늘이 우리 만난지 삼백일 되는 날이잖아.......”

  “아.......삼백일.........이다, 저녁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알았어, 점심 맛있게 먹어.......”

  미숙의 전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승강기 문이 열렸다. 지하 주차장에는 사람들이 붐볐다. 오늘따라 외식을 하러 나가는 직원이 많은 모양이다. 용재는 자신의 차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법원의 현관 앞에서 기다릴 최 연희가 부담스러웠다. 사람들이 보면 또 머라고 수군거릴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었다. 판사라는 직업이 이럴 때는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현관 앞에는 법원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그녀는 그런 곳에서 기다릴까? 혹시 나를 자기와 사귀는 사람으로 인식시키려고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으나 그런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현관 앞으로 차를 몰았다.

  연희는 용재가 어떤 모습으로 자기를 데리러 올까 궁금하였다. 법원의 부장판사라는 공식적인 직함이 그를 나이 보다는 점잖은 사람으로 보이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 그는 삼십대 초반이다. 열정적인 마음이 가슴속에 있다면 불을 지피면 활활 타오를 것이라고 생각 되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어제부터 자신의 미모가 돋보이도록 더욱 정성을 들였다. 연희는 사랑은 재취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쟁취하지 못했던 그 사랑을 용재를 쟁취함으로 얻고 싶었다. 

  검은 승용차 한대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랜저였다. 차가 그녀 앞에 서더니 용재가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조수석 차문을 열고는 그녀가 타기를 기다렸다. 연희가 차에 오르자 용재는 재빨리 차에 타더니 차를 몰고 법원의 정문을 나서자 도심지를 향해 수많은 차량의 물결에 섞여버렸다. 서초동 법원 앞은 차량의 물결로 뒤덮여 있었다.

  “어디로 가실 거죠?!”

  “뭘 좋아 하세요”

  “점심시간인데 간단한 걸로 할까요?!”

  “아닙니다. 연희 씨가 좋아하는 것으로 하지요.”

  “스테이크 아주 맛있게 하는 집 아세요?!”

  “예, 알죠.”

  “낮이긴 하지만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와인 한잔을 하면서 스테이크를 먹으면 어떨까요?”

  “좋아요. 제가 안내하죠.”

  용재는 도심지를 통과하자 한강변 88올림픽대로 쪽으로 차를 몰았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경치 좋은 양식집 “뜨락”이 생각났다. 미숙과도 몇 번 다녀온 곳이었다. 점심시간을 어쩌면 길게 보내야 할지도 몰랐다. 고교동문전 취재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인터뷰를 빙자하여 용재 자신을 만나러 온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연희는 용재가 차를 모는 옆모습을 슬그머니 훔쳐보았다. 준수한 외모에 판사라는 직함이 주는 카리스마 때문인지 용재는 어디하나 빈틈이 보이지 않는 그런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하지만 오늘은 탐색전이다. 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천천히 좀더 그의 이모저모를 살펴보고 그에게 가장 알맞은 대처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오늘은 그저 고교동문전 취재에 관해서만 그에게 묻기로 하였다. 처음부터 너무 들이대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야 말로 위험한 도박이다.

  내 패를 보이는 것처럼 위험한 도박은 없다. 그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처음부터 드러내 보이는 것이야 말로 패를 다 보여주는 것이니 전혀 그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그렇게 게임을 시작해야 한다. 그녀가 바둑을 빅으로 만들던 그날의 마음속의 다짐을 용재가 알아채게 해서는 오히려 우스운 여자로 보일지도 모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