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잊은 땅 훼어뱅스(Fairbanks)

( 알라스카 같은 극지에서만 나타나는 현상, 오로라와 백야가 있지요.

오로라는 겨울철에 나타나고, 백야는 여름철에만 나타나지요.

백야를 보고 느껴보려고 백야의 땅, 훼어뱅스로 향했습니다. )

앵커리지에서 북으로 360마일(576키로, 1천5백리) 떨어진 백야의 땅 훼어뱅스로 향했다.

인구 3만2천으로 알라스카의 제2의 도시이다.

알라스카의 혈관인 파크하이웨이(Park Highway)가 북으로 뻗어가다가 멎어버린 종점이기도 하다.

지구의 북쪽 끝, 인류의 북방 한계선.

거기에도 우리 동포가 7백 명이 산단다.

우리는 잡초처럼 끈질긴 민족이란 생각이 다시금 가슴에 와 부딪친다.

하기야 우리의 조상보다 더 위의 우리와 같은 뿌리들이 2만여년 전 몽고를 떠나 베링해협을 건너와 이 땅에 에스키모인 이란 이름으로 뿌리를 내렸다지 않는가!

훼어뱅스 북으로 문명은 들어가지 못했다.

훼어뱅스보다 더 북쪽에 벨로우(Ballow)를 포함한 몇 개의 작은 마을이 있지만

거기는 고래잡이 등 사냥으로 살아가는 에스키모 원주민들의 마을로

툰드라, 동토, 백곰, 이글루로 대변되는 극지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는 곳으로 부르기에는 좀 이르다.

그러므로 아직까지는 훼어뱅스를 인류의 북방 한계선으로 보고 있다.

철로도 달려오다 여기에서 멈추었고,

도로도 뻗어가다 여기에서 서버렸고,

문명도 범죄도 인간 사회와 함께 모두 여기에서 멎어버렸다.

문자 그대로 인류의 북방한계선이며 인류문명의 종착역이다.

훼어뱅스를 지나면 자연과 원시 그리고 에스키모만이 인류와 문명과 범죄를 거부하며 살아가는 곳이다.

이곳은 1900년경부터 에스키모 원주민을 상대로 한 상인들이 유콘 강을 거슬러 올라와 교역을 시작하면서 도시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백야의 땅을 찾아가는 중간쯤에 맥킨리가 우리를 우뚝 막아선다.

원시를 지키려는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는 맥킨리를 보니 잠들었던 외경(畏敬)스런 마음이 다시 고개를 들며 웅장한 대자연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최후의 수문장 맥킨리를 지나자 그때부터는 넓은 평원과 끝없는 원시림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전나무와 가문비나무 자작나무들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빼곡히 들어선 원시림의 숲을 뚫고 실 같은 도로가 일직선으로 그어져 있다.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리나”에서 그려 놓은 북극의 벌판이 이런 풍경일까.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설국(雪國)에서 보았던 환상이 이런 모습일까.

원시가 사는 숲과 숲 사이, 간간이 보이는 연못가에는 어김없이 무스와 사슴무리들이 떼지어있고, 간혹 곰들도 길 가장자리를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다.

“ 저기 곰이다, 곰!”

차창에서 눈을 때지 못하던 일행 한명이 신기한 듯 소리를 지른다.

버스안의 모든 시선이 그곳으로 모인다.

갈색 곰 두 마리가 버스 앞을 막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디스커버리 영상 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앞자리에서 졸고 있던 가이드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벌떡 일어나 마이크를 잡는다.

“여기 곰들은 한국 사람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이놈들은 한국 사람만보면 가슴을 잡고 뛰지요.

웅담 안 뺏기려고요.

여기 사슴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놈들은 뿔을 잡고 도망갑니다.”

오후의 나른함을 졸음으로 달래려든 버스 안은 다시 활기를 찾아 까르르 웃음꽃이 터진다.

아직까지도 야생과 원시가 살아 숨 쉬는 땅을 버스는 활기 있게 달리고, 원시의 신비함과 경이스러움이 번갈아가며 나를 황홀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백야의 땅 훼어뱅스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10시,

로스앤젤스는 한밤중일 턴데 이곳은 아직도 해가 중천에 머물러 있다 .

샤워를 하고 잠을 청해도 잠이 들지를 않는다.

긴 여정 길에 몸은 파뿌리인데도 잠이 오지를 않는다.

한 낮 같이 밝은 밤에 잠이 올 리가 없다.

이곳의 해는 밤 12시가 되어야 잠시 숨었다가 새벽 3시면 다시 고개를 내민단다. 여름철 낮의 길이는 21시간이 넘는다니-  태양마저도 쉬어가는 것일까.

어둡지 않은 밤, 해가 떠있는 밤, 우리는 그것을 백야라 부른다.

겨울에는 반대로 한 낮 3시간 정도만 지평선 끝에 해가 걸려 있다가 오로라와 함께 사라져 버리고 나면 길고 긴 캄캄한 어둠만이 밤이라는 이름으로 머물러 있는 땅.

이곳은 복 받은 땅 일까, 아니면 벌 받은 땅 일까 ?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