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작가의 상상으로 지어낸 허구의 글이오니 독자님들은 오해없으시기 바랍니다. ..... 오로묵시록 올림.

청송기원>…

나의 단골기원이다.

요즘 같은 사이버시대에 청승맞게 왠 기원이냐고 혀를 찬다면 머 특별히 변명할 말이 없지만… 나는 <청송기원>에 들려 한판의 바둑을 두기를 매우 즐겨한다. 나라는 사람도 이런 일 저런 일로 매어 있는 형편이라  별로 한가한 사람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건간에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반드시 들리리라 마음 먹은 기원이다.

그곳에 가면 나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그럴듯한 라이벌이 있는 것도 아니며, 잔 내기에 짭짤한 부수입을 올리는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 기원이 있는 이층계단을 세어가며 올라갈 때 마다  무언가 모를 기대감에 가슴을 설레이곤 하는 것이 있다.

금요일 저녁, 회사의 잔무를 늦게 까지 처리하고 귀가 하는 중, 동네 초입의 <청송기원>앞을 지날 때는 거의 밤 열 시가 되어 있었다.

얼른 씻고 잠들고 싶다는 생각을 접어 버리며 나는 기원을 오르는 계단을 밟고 있었다.

기원은 텅 비어 있었다.

천 원 짜리 지폐를 주고 받으며 늘 자정 가까운 시간까지 아웅다웅 하던 은퇴한 교장선생님과 왕년의 건설회사 박사장도 오늘은 일찌감치 철수 했는가 보다. 늘 열 시 정도까지는 카운터를 지키던 원장아주머니도 보이지 않고… 어머니대신 아주 가끔씩 카운터에 앉아있곤 하던 그녀의 아리따운 따님도 보이지 않는다.

텅 빈 기원에 딱 한 사람…카운터 가까이에 있는 좌석에 허름한 바바리코트를 입은 사내가 한 손에 기보를 들고 놓아보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만 집으로 들어 가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뒤돌아 섰다.

“ 이 보우 젊은이, 이왕 오셨으니 한판 두고 가지 않으시려나? “

놓아보기를 하던 바둑판을 좌르륵, 흩어 통속에 집어 넣는 사내의 한마디가 돌아가려던 나를 돌려 세웠다.

좀 전에 얼핏 보았을 때는 중년으로 보이던 사내가 … 막상 마주 앉아보니  목덜미며 턱이며 눈 밑의 주름일랑 속일 수 없는 노년으로 보였다. 그러나 서글서글한 눈매하며 오똑한 코등 … 아주 잘 생긴 얼굴이었다.

“ 몇 급 두시나? “

사내가 백 돌이 담긴 통을 자신의 앞으로 쓰윽 당기며 물었다.

“ 한국기원 공인 아마2단, 오로 5단 입니다.”

“ 흠, 한국기원 공인 2단 이라니… 보기 드문 젊은이로세….

다섯점만 놓으시게…”

딱 이나 바둑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도 없는 내가 연전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얼떨결에 2단을 공인 받은 터에 보기 드문 젊은이라는 칭찬 같은 말을 듣고 보니 약간 쑥스럽기는 하였으되, 다섯점이라니… 대단한 노인네구나…하고 감탄을 하며 말없이 반상에 여섯점을 놓았다.

“ 컹, 여섯점이라고? “

사내는 눈을 크게 뜨며  짐짓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외쳤다.

“ 예, 제가 천하육목이거덩요…히힛, “

나는 6개 군단이라는 압도적인 병력의 우세로 백을 초토화시켜 노인네를 납작하게 눌러버리려는 장난기가 발동하였다.

“ 흠,천하육목이라… 그럼 한번 놀아 볼까? “

사내는 우아한 손 맵시로 나의 우상 귀에 날일 자 걸침을 해왔다.

바둑은 삼 십 여수 가까이 진행 되어 있었으나 바둑판 전체가 시커멀 정도로 흑의 우세였다. 사내는 흐으음~ 하고 한숨을 쉬더니 코트 안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볼펜 한 자루만한 막대기 같은 아니 짧은 젓가락 같은 것이었다.

사내는 두손으로 그것을 조심스레 잡더니, 빠르게 비틀었다.

그것은 차악~하니 깜찍한 소리와 함께 나비가 날개를 펴듯 활짝 펴졌다. 부채였다.

바람이라야 일어날것도 같지 않은데도 사내는 그것을 얼굴 가까이 대고 팔락팔락 부쳐댔다. 그러더니 차악하니 접어서 왼손으로 감싸쥐고는 잠시 장고에 들어갔다.

장고에서 깨어난 사내의 백 돌이 반상을 누비기 시작했다.

창처럼,검처럼 급소를 찔러 오는가 하면, 먼바다의 파도처럼 가슴을 억눌러 왔다. 정신을 수습 했을 때는 이미 승부는 결정 나 있었다.

나는 관자놀이에 딱 한방을 허용하고 캔버스에 누웠다가 카운트가 끝난 다음에 일어난 복서처럼 허망했다.

“ 흐흐흐, 한잔 마시게.. 정신이 들것이야…”

사내는 주전자의 음료수를 따라주며 히죽 웃엇다.

나는 컵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 그것은 아마도 사이다를 섞은 소주 같았다. 속이 짜아 하니 녹아 들었다. 나는 빈 컵을 두번째로 채워주는 그의 손길을 받으며 물었다.

“ 오늘은 원장님이 안보이시네요. “

“ 흠, 우리 마누라 말인가? 그녀는 원장마누라지…나는 원장이고…클클, “

흠. 그러고 보니 이분은 그 원장 아주머니의 남편이고, 그 아리따운 아가씨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군…흠,

“ 젊은이, 이걸 좀 보게나 이게 무언 줄 아시겠나? “

사내는 좀 전의 쥘부채를 바둑판 위에 놓아 보이며 컵에 자작을 하고는 나의 빈 컵에도 세 잔째를 따라 주었다.

사내는 카운터의 서랍을 뒤져 육포를 꺼내 씹으며 나에게도 권했다.

나는 그 부채를 손에 들고는 조심스레 펼쳐 보았다.

그 부채는 앙징 맞게 작기는 하였으나 쉽사리 망가지지 않을 것 같은 마무리하며 과연 일본사람의 솜씨와 분위기를 엿 볼 수 있는 물건이었다. 노리끼리한 유지는 꽤 오래 된 물건인양 했고 중앙에 히라가나로 몇 자 적혀져 있는 외에는 그저 백지상태인 담백함이었다.

사내는 나에게서 그 부채를 걷우어서는 손에 꼬옥 쥐며 말을 계속했다.

“ 부채에 쓰인 글은…<나니 모 나이>…글쎄 무슨 뜻인지 속내는 모르겠지만 … <아무것도 아니다> 머 그런 뜻인 것 같기는 한데… 수도자의 독백 같기도 하고… 허무주의자의 탄식 같기도 하고…

우리는 이것을 <기다니 선생의 쥘부채>라고 부른다네…”

기다니 씨가 현역시절에 이미 내제자가 하나 있었다는 것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라네.

이름은 잊혀 졌지만 아오끼라는 성씨를 가진 소년이었지.

소년의 부친이 당시 일본 정계의 영향력있던 세력가이기도 했지만 워낙 소년의 기재가 뛰어났고 무엇보다 바둑에 대한 열정이 대단 했기에 기다니 씨는 아오끼 씨의 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소년을 내제자로 거두어 들인 것이지…

소년은 선천적으로 병약해서 기다니씨가  제공한 햇볕 잘 드는    방에서 그저 하루 종일  바둑공부만 했기에 사실 내제자라기 보다는 기다니가의 손님처럼 지냈다네…

기다니선생은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소년의 바둑 공부를 말없이 지켜보다가 한마디씩 가르침을 내리곤 했었는데 소년의 기재는 날이 갈수록 빛났다고 하네…

그런데 하루는 기다니 선생이 소년의 좋지 않은 버릇을 보고는 그만 눈 쌀을 찌프렸다네. 소년이 바둑공부를 하는 중에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하며 손놀림을 하는 버릇을 보고는 못마땅 했던 거지.

물론 그 당시 기사들도 대국 중에 염주라던가 부채라던가 호두알 이라던가  머 그런 것들을 쥐고 손장난을 하는 것은 쉽사리 볼 수 있었던 관례였지만 선생이 보기에 소년의 그런 버릇은 여물기도 전에 어른들의 장난을 흉내 내는 건방진 버릇으로 비쳐졌던 것이었다네…

선생은 단호하게 소년으로부터 그 부채를 빼앗았고, 소년은 아주 소중한 것을 빼앗기는 심정인양 차마 그 부채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했다네.

부채를 손에서 놓친 소년의 병약한 몸은 더욱더 시들어 져 갔고 이듬해 봄에는 기어코 생명 줄을 놓아버리고 말았다네…

선생은 천고의 기재가 요절한 것을 통탄했지만 세월과 함께 슬픔은 흐려져 갔다네…

세월은 흘러 선생의 유일한 외국인 제자였던 조남철이 귀국할 무렵…기다니 선생은 귀국할 제자에게 줄 선물을 이것저것 챙기다가 문득 아오끼가 갖고 놀던 그 부채를 발견하게 되었다네…아오끼의 바짝마른 외모가  조남철과 비슷한 면이  있었서였던지 선생은 새삼 첫제자의 모습이 삼삼하여 눈시울을 적셨으며 그 부채를 조남철에게 선물로 건네 주게 되었다네.

귀국해서 바둑을 둘 때 마다 조남철청년은 항상 그 부채를 손에 꼬옥 쥐고 대국을 하였다고 하네. 두는 족족 조남철의 손속에 헤메던 국수급 기사들은 조남철은 손에 들고 있는 부채의 효험 때문에 승승장구한다고 농을 하고는 허허 웃었다고 하였네.

그 농담에 조남철 청년도 그저 따라 웃을 수 밖에 없었지만… 정작 조남철 국수가 그 부채의 효험을 실제로 경험 하고 부터는 얘기가 달라 졌다네.

지금부터 오 십 년 전 이야기라네.

조국수가 조치훈을 데리고 기다니문하에 입문 시키기 위하여 일본을 방문하였던 적이 있었다네.

조국수의 방일 목적이야 다른데 있었지만 당시 바둑 세계최강국인 일본의 최 강자들과 우리의 국수가 기념대국을 해 보았으면 하는 우리 언론사들과  바둑인 들의 소망이 뜨거웠던 거지.

당시 일본의 최 강자는 후지자와 명인과  사까다 본인방이었었는데, 한국의 언론사들은 이들과 조국수의 특별대국을 주선하려 하였지.

한국의 국수라 하지만 언감생심…우리와 상대가 되겠는가 하고 사까다는 콧방귀를 뀌며 대국을 거절하였지만…호방한 성격의 후지자와는 대국 승락을 하였다네.

비록 선 칫수의 바둑이었지만 조 국수는 최선을 다해 한 수 한 수 두어 가던 중…그러나 바둑은 점점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네.

조 국수는 난국을 타게 하기 위하여 부채를 꽉 움켜 쥐고는 장고에 빠졌다네…그때였다네…

부채로부터 무언가 뜨거운 기운이 일어나더니 그것이 조남철의 기혈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 하였다네…뜨거운 기운이 일 주천 하고 난 뒤 무엇인지 모를 청량함이 조국수의 심신을 가득 감싸며 새로운 국면이 머리속에 선명하게 전개되어 조 국수는 심기일전 승리를 하게 되었다네.

조국수가 노쇠하여 은퇴하기 직전 그 부채를  김인 국수에게 물려 주었으며, 김인 국수는 그 후 전성기를 누리다가 말년에 조훈현 국수에게, 조 국수는 이창호 국수에게 물려 주었다네

물론, 김 국수의 41연승이라는 불후의 기록을 수립하는 중 에,

조국수의 두 차례에 걸친 전 관왕 위업,그리고 응씨 배 제패,

이국수의 만리장성기적을 이룩하는 중에 이 부채가 그들의 손에서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늘 확인 할 수 있었다네.

5년 전이었던가…

어느 날 이국수가 나를 찾아 와서 물었다네.

“ 스승님 저는 누구입니까? “

실상 나는 이 국수와 가장 많은 대국을 가진 사람이라네. 그와의 대국이 대략 4백판 쯤은 될 것 이야. 나는 이 국수의 첫 번째 스승이라네.

“ 자네는 천상천하 영세 최강기사, 이 창호지…”

이 국수는 잠시 형형한 눈빛으로 결연한 의지를 다짐 하는 듯 하더니 이 부채를 나에게 건네 주며 처분을 위탁하고 떠났다네.

이 부채는 일개 아마추어기사인 나에게는 실상 별 의미가 없었다네. 그러나 부채를 꽉 움켜쥔 순간 나에게 흘러 들어오는 최강면모들의 뜨거운 기운은 아직도 나의 가슴을 더불어 뜨겁게 달구어 준다네…

그러나 부채를 나에게 넘겨준 다음부터 이국수가 승부의 정점을 지난 것처럼 부진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왠지 가슴이 아리다네…

나는 이제 늙었다네. 이 부채를 갖고 있다는 것이 왠지 무섭다는 생각이 드네 그려. 아마 이국수도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은 아닌지.

사내는 긴 얘기를 마치고는 부채를 내 앞에 탁하니 던지듯 놓았다.

“ 이제 이 부채는 자네가 처분하게. “

“ 헉, 그게 정말 이십니까? “

“ 나는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네. 왠지 그 부채로부터 벗어나고 싶네. 자네가 내가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차비 정도만 마련 해 줄 수 있다면 그 부채는 이제 자네 것일세…차비는 4~5십만 원쯤 되면 충분 하겠지…”

“ 알겠습니다. 다음 주 중으로 차비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

나는 노인네가 말을 취소라도 할까 보아 겁을 더럭 먹으며 얼른

마법의 부채를 집어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 다음 주

나는 깨끗한 봉투에 5십만 원 짜리 수표를 집어 넣고 매일 저녁 <청송기원>으로 출근을 하였다.

왠 일 인지 원장이라는 노인네는 보이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하고 용감하게 카운터를 향해 갔다. 그 날은 마침 아리따운 딸이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 오호호호호호호… 그러니까 결국 그 마법의 부채를 5십만 원에 사셨다는 말씀이시죠? 호호호,아빠의 장난에 속아 넘어 가셨네… 어쩜 그리도 쉽게 속아 넘어 갈수 가 있는 거죠?  선생님 참 순진하시다…아니 참 재미 있으시다. 설마 선생님은 진짜로 마법을 믿는 것은 아니겠지요, 오호호호…”

내 말을 듣고 난 그녀는 봉투를 다시 나에게 돌려 주었다.

“ 크으, 머 그렇다기 보다는 그저…머, “

나는 그녀의 아름다운 눈을 바라보며 할일 없이 뒤통수만 긁었다.

여러분, 여러분은 마법을 믿는가?

나는 믿는다.

나는 마법의 부채덕분에 내 마음을 오랫동안 사로잡고 있던 이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와  데이트를 할 수 있었고 내년 봄엔 결혼까지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