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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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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에서 인생을 배운다
2007-07-22 오후 3:53 조회 6571추천 11   프린트스크랩

 
 필자는 아주 어려서부터 우리 집 마루 한 구석에 바둑판과 바둑돌이 귀중하게 '모셔져' 있었다. 바둑판이 향나무였던지 두꺼운 마분지 덮개를 씌었는데도 늘 향기가 났고 바둑돌도 늘 반들반들 반짝이며 윤이 났다. 우리 어르신께서 워낙 애지중지하셔서, 어쩌다가 우리 형제들이 바둑판에 올라가서 논다든지 덮개에 낙서를 한다든지, 친구들과 바둑돌로 새나 병아리 눈을 맞추거나 공기놀이를 하다가, 들켜서 무척 크게 야단맞고 혼났던 기억들이 아직도 선하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께서 집에서 바둑을 두시거나 기보를 보시는 것은 한번도 보지 못했다. 어렸을 때, 동네 어른들이 바둑 두는 것을 몇 본 보기는 했으나, 웬지 고리타분하게 느껴져서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대학에 입학하면서 당시 동래고교 동창생 친구와 하숙생활을 함께 했는데, 그 때 드 친구로부터 바둑을 배워 함께 밤 새워 두었고, 다른 친구들과도 대국을 하는 등, 바둑 재미에 푹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대학생시절 한 동안은 일요일 이른 아침부터 기원에 가서 점심도 거른 채 밤늦도록, 상대방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바둑을 두었다. 그러는 사이, 바둑실력은 삽시간에 5-6급 수준으로 향상되어 갔다.

 필자가 바둑을 배우고 두면서부터, 세상의 험난한 과정에서도 부드러움이 단단하고 강렬함을 이긴다는 이치를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항상 강공 일변도로 공격하다가는 결국은 항상 처참하게 패배하게 되는 棋理(기리)를 터득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柔道(유도)도 뜻 그대로 '부드러움'이 이기는 스포츠이고, 골프도 부드러운 스윙을 구사할 줄 아는 골퍼가 이기게 되어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현명한 군주의 대명사인 솔로몬도 언제나 부드러운 전술을 최선으로 삼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지혜'는 반드시 '부드러움' 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며, 거기에 어려움을 타개하는 '길'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대학시절 그 이후로는 약 30여 년 동안 바둑과는 담을 쌓은 채 바쁘게만 살아왔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어느 점잖은 선배 바둑애호가를 알게 되어 바둑에 관한 상식도 알게 되었는데, 퍽 유익했다고 생각된다.

바둑을 周易(주역)적 원리로 理(리), 象(상), 數(수)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방법도 있다고 하는데, 바둑판은 가로 세로가 각각 19줄씩 총 361점으로 중앙 1점(天元)을 뺀 나머지 360점이 한 해의 周天常數(주천상수) 360일을 상징한다고 하며, 사방으로는 72(18 X 4)줄이 되는데, 이것은 360일(1년) 안에 72節候(절후)가 있듯이, 우주와 만물의 이치를 설명하므로, 바둑판 위에 만물의 모든 이치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한다.

또한 어느 책에서 보았는데, 碁聖(기성)으로 추앙 받는 吳淸源(오청원)선생의 수필에서는 “만물의 수는 '하나'로부터 시작된다. 바둑판 위에는 361 길(路)의 눈이 있고 '1'이라는 수의 근원은 '한 복판 점'(天元)으로부터 발하며 사방을 제압한다. 360이라는 수는 하늘이 일회전하는 일수를 표현하며 네 귀로 나누어지는 것은, 동서남북 4 방위와, 春夏秋冬(춘하추동) 사계절을 의미한다. 外周(외주)의 합계가 72 路(로)인 것은 1년을 72절후로 구분하는 것과 같으며, 360개의 바둑알이 흑백 반반인 것은 음과 양을 표시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위의 설명과 비슷하다. 

잘 생각해 보면 과연 그런 것 같다: 19줄 x 19줄의 우주공간에, 인류역사의 물결이 넘쳐 흐르고, 반상에는 時空(시공)을 초월한 철학적 진리가 숨쉬고 있다. 바둑판이 모가 난 모양은 땅을 뜻하고, 바둑돌의 둥근 모양은 하늘을 의미한단다. 흑백 바둑돌은 음양을, 중앙의 天元(천원)은 우주를 다스리는 조물주임으로 제쳐 두어, 360[매 15일이 1절기 X 24절기]으로 1년의 날수를 의미하고, 동시에 圓(원=360도)을 상징한다고 하니, 진실로 인류가 창안해 낸 걸작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4절기란, 冬至(동지)로부터 시작해서, 小寒(소한), 大寒(대한), 立春(입춘), 雨水(우수), 驚蟄(경칩), 春分(춘분), 淸明(청명), 穀雨(곡우), 立夏(입하), 小滿(소만), 芒種(망종), 夏至(하지), 小暑(소서), 大暑(대서), 立秋(입추), 處暑(처서), 白露(백로), 秋分(추분), 寒露(한로), 霜降(상강), 立冬(입동), 小雪(소설), 大雪(대설)이 된다.

 실로, 바둑의 반상에는 인생이 있고, '길(道)'이 있고, 세계와 우주가 있다. 따라서 반상에는 萬花芳暢(만화방창) 大地(대지)에 새들이 지저귀는 따뜻한 봄이 있고, 찌는 듯한 무더위와 억수로 퍼붓는 비속에서 만물이 왕성한 기개를 펴는 여름이 있고, 태풍과 천둥번개를 이겨낸 풍성한 오곡백과와, 소, 말도 살이 찐다는 가을이 있는가 하면, 눈보라와 추위로 만물이 얼어붙는 겨울도 물론 있다.

필자는 바둑판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보고, 좀 과장스럽게 들릴런지 모르지만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호걸들을 비롯해서 세계적, 역사적 인물들의 숨결도 느껴 볼 수 있고, 그들과 감히 관념적으로 대화를 청하기도 한다. 반상에는 仁義禮知(인의예지)의 숲도 우거져 있고, 眞善美(진선미)의 강물도 맑게 흐르지만, 폭풍우와 폭설이 거칠게 몰아치는 매서움도 있다. 淸心寡慾(청심과욕), 輕敵必敗(경적필패), 小貪大失(소탐대실) 등 碁家十訓(기가10훈)에는 인생 처세철학이 알알이 녹아 들어있다. 바둑은 인간에게 인내, 겸손, 변화무쌍, 병법, 신중을 교훈한다. 내가 우리 아들 宰鉉에게도 바둑을 두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본은 일찍이 임진왜란의 奸雄(간웅) 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바둑을 무척 좋아해 적극 권장했고, 그 후에 일본역사상 처음으로 일본열도를 통일한 德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바둑을 반석 위에 정립시켜 놓았다고 하니, 바둑에 담긴 심오한 治世哲學(치세철학)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미국육군사관학교(West Point)에서도 바둑을 전술교재로 가르친다고 하니, 가히 세계적 兵法(병법)으로도 인정받을 만하지 아니한가?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현세의 碁聖(기성)을 꼽으라면 필자는 서슴없이 우리 이창호(李昌鎬) 9단을 추천하고 싶다.
그의 부동지심은 가히 부처의 경지에 이른 佛心(불심)이 아닐까 싶다. 그는 한국에서보다 중국과 일본에서 더 극진한 대우를 받아, 가히 국빈급 예우를 받는다. 이창호 9단이야말로 명실 공히 入神(입신)의 경지에 든 사람이며, 외교관 몇 십 명보다 더 국위를 선양하는 세계최강의 기사인데도, 결코 오만하거나 뽐내거나 경솔하지 않다. 그는 항상 겸손하고 중후한 인격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그의 대국성적이 좋고 나쁘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그렇듯 꽉 짜인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생면부지의 어느 아마추어가 대국을 간청하자 서슴없이 응하고,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상대방이 편하도록 배려하며 대국을 마쳤다는 얘기를 듣고는, '과연 이창호, 훌륭한 기성'이란 말이 절로 나왔다.
아마도 이러한 인격을 함양하기 위해 우리는 바둑을 배우고 두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가 세상 인간사에 관심을 갖으면서, 최근 대국성적이 나빠진 이유를 누가 묻자, 그가 의미심장한 대답을 했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건전한 바둑문화를 위해 쓴 소리 한마디 해야겠다. 요즘은 너무 바빠서 바둑TV를 잘 보지 못하지만, 예전에 보니까 개그프로에서 바둑으로 ‘알까기'를 하던데 이런 정도는 애교로 봐 줄 수 있다고 치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했었던 바둑TV에서까지 장난끼 섞인 무슨 '햄릿바둑'이니, '’명령바둑‘이니 하는 국적불명의 바둑행태를 보게 될 때, 이건 신성한 바둑을 모독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불쾌하고 한심스러운 생각마저 들게 했다.
이런 행태는 지양해 주시기 부탁 드린다. 또 바둑대국을 TV로 실황중계 방송하는 경우, 대국자가 중요한 着点(착점)을 하는 시점에서, 엉뚱하게도 대국자 얼굴만 계속 화면에 내보내는 중계행태도 시정되어야 한다. 시청자들이 잔뜩 긴장하며 관심을 가지고 보기 원하는 것은, 대국자가 어느 점에다 착점 하나이지, 대국자의 얼굴이나 표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둑대국 중계 기사님들은 바둑의 이런 점에 대한 식견을 갖춰 주시면 고맙겠다.

 바둑의 사회적 위상을 격상시키기 위해, 바둑을 碁道(기도)로 보아, 柔道(유도), 跆拳道(태권도)처럼 '체육'의 한 분야로 편입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 같은데, 이 문제는 원칙적으로 찬성한다. 중국에서는 이미 바둑을 '체육'으로 인정해서 그에 상응하는 제반 제도도 마련해 시행하고 있다고 하며, 또 바둑이 지금 전 세계로 널리 보급되어 머지않아 인류의 게임으로 발전하게 될 전망이므로 반가운 생각도 든다. 올림픽 종목에 바둑이 승인된다면, 우리 기사들이 우승 금메달을 획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바둑은 아무래도 극동 3국이 본고장이고 최강이다. 따라서 여기서 이기는 나라가 세계최강인데, 이 3국의 바둑은 민족성만큼이나 제각각의 특징이 있다.
우리는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전통적이고 형이상학적 미학으로 잘 무장된 일본바둑을 배우기 위해 바둑유학을 갔었고, 까다롭고 수많은 일본식 정석을 들여와 공부하며 연구했다. 그러다가, 김 인, 조훈현, 서봉수 사범에 이어 유창혁, 이창호 사범 등 신진 기사들이 등장하면서, 바둑전쟁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소위 '한국류 기법'을 앞세운 한국기사들이 세계대회를 휩쓸어 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한국류' 기풍이란 무엇인가? 필자의 외람된 소견으로는, 한마디로 '실용 위주로 대세를 융합시킨 실전적 병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종래의 틀에 박힌 정석이나 모양(形態) 등 고정관념을 탈피해서, 실속 위주로 그 상황에 맞는 수만 자유자재로 두는 기법, 그런 것 아닐까?


 여하간, 바둑의 발상지이며 13억 인구의 중국바둑과, 한 때 바둑종주국을 자처하던 1억 5천만 인구의 일본바둑을, 우리 한국바둑이 그들을 압도하고 제압하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통쾌한가! 중국과 일본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우리보다 훨씬 강대국들이다. 솔직히, 우리가 그들보다 강한 분야는 별로 많지 않다. 그러나 바둑은 우리가 그들의 자존심을 짓밟고 올라서서 그들보다 강대국이 됐다. 중국이 한국 축구에 대해 恐韓症(공한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듯이, 중국과 일본은 바둑에서도 공한증을 느껴 우리가 그들의 자존심을 꺾어 놓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최강 한국바둑을 구축해 온 우리 기사님들과 바둑관계자 여러분들의 노고에 충심으로 감사 드리고, 정중한 치하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 2006년 1월,  찔레꽃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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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개1EA |  2007-07-22 오후 5:12: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상당한 식견에 탄복......
동감,동감,동감,
 
헛된소리 |  2007-07-22 오후 10:52: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대단하시네요.
오로7단인 저도 상당 부분 첨 듣는 ...  
愚公^^移山 |  2007-07-23 오전 8:44: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찔레꽃님
고맙습니다.
바둑에 대한 제 좁은 시야가 찔레꽃님의 말씀을 듣고 조금이나마 넓어졌음을 느끼게 되는군요.
이렇듯 기분좋은 기분으로 한주일을 시작하게 만들어 주셔서 한번더 감사드립니다.
찔레꽃님도 내내 건강하시고 좋은일만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의여정 |  2007-07-23 오전 10:01: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사람과 사람이 하는 놀이니까 당연히.. 바둑은 인생의 은유~~  
고기뀐지 |  2007-08-16 오후 1:41: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나도 우공님 맨치로 시야가 널버지네요.자고로 사람은 배워야한다는 말이 맞군요.오나가나 배움밖에 없어라 .... 꾸벅꾸벅(자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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