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허름한 변두리의 기원에서, 아니면 바둑판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던지, 여러분은 그 녀석을 만나게 될는지 모를 것이다. 그 녀석이 호감 가는 미소를 머금으며 부담 없이 담배 값이나 커피 값 정도를 걸고 한판 두자 하면 여러분은 단연코 거절 하시라… 여러분은 거의 백 프로 질것이기 때문이다.

하기는 내기 바둑에서 지는 것은 다반사 일진데,  질 것이기 때문에 단연코 거절 하라는 것은 좀 어폐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지고 나서의 기분이 영 찜찜 하기만 하다면 그 바둑은 단연코 안 두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녀석을 다시 본 것은 작년 봄이었다.

그 녀석이 죽은 지 십 년 만이었다.

그 날은 겨울 이라면 춥지도 아니하고 봄이라면 제법 쌀쌀한 날 이었었다. 인사동에서 박화백의 개인전이 끝나던 날 우리는 그 동네의 어느 허름한 밥집에서 밤 늦도록 까지 많이 취했다. 술자리가 끝나고 밤거리로 나섰을 때는 얄궂게도 진눈 개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약간 휘청거리며 전철을 탔을 때 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전철 안은 꽤나 붐볐다. 그 녀석을 본 것은 바로 그 때였다. 통로에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맞은편 에 앉아 있는 그 녀석을 내가 본 것이다. 녀석은 고개를 푹 숙이고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어찌하여 이미 죽은 놈이  시방 내 앞에 앉아 있을 수가 있는 것인가.

저 놈이 그 녀석이 틀림 없다면 시방 저 녀석이 읽고 있는 책이라면 월간 바둑이던지 아니면 정석 책일 것이다.

통로에 서 있는 사람들 때문에 녀석이 잠시 안 보이는 동안 나는 마음을 단디 잡아 먹었다. < 정신을 차려야지 정신을…> 하면서.

통로가 약간 트이면서 녀석이 보이게 되었을 때, 녀석은 고개를 들어 나와 시선을 맞추면서 씨익 웃어 보였다.

이것으로 틀림없는 사실이 되어 버렸다. 저놈이 바로 그 녀석이며 나는 그 녀석을 십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날 이후 녀석은 내 앞에 자주 나타났다.

이미 십 년 전에 죽었던 녀석은 당연히 영적인 존재였다.

여러 번 만나면서 알게 되었지만 녀석은 선한 영이 아니라 악한 영이었다.

왜 나에게 녀석과 같은 악령이 붙게 되었는가를 불평하여 보기도 했지만, 나로서도 깨름직한 이유가 있기는 하다.

녀석과 나는 직장 동료였다. 어느 날 일과 후 밤 열 두 시가 넘도록 둘이서 내기 바둑을 두고 헤어진 날, 녀석은 귀가길 에서 뺑소니 차에 치여 죽었다. 나는 전날 내가 그와 밤늦도록 내기 바둑을 두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함구 하였다. 왠지 그래야 한다고 생각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열하는 미망인과 그 유족들에게 나는 꽤나 오랫동안 미안해 하고 괴로워 하였었다.

녀석은 아마도 그 사실에 대하여 앙심을 품고 나에게 붙어 나타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녀석은 시도 때도 없이 내 앞에 나타나서는 내기 바둑을 두라고 꼬득이곤 했다.

나는 경제적으로 별 여유도 없고, 무엇보다 승부를 하고자 하는 정열이 이제는 없어 졌다고 고개를 젖곤 했다.

그러면 심심풀이로 담뱃값이나 커피값 정도를 걸고라도 두라고 했다. 승리는 내가 보장 하마고 하며 히죽 웃었다.

어쨌거나 나는 바둑을 다시 두기 시작했다.

인터넷 바둑으로 인해서 사양업종이 되어 버린 동네 기원에서 나는 금새 단골 기객이 되어 버렸다.

나는 푼돈을 걸고 내기 바둑을 두었다. 새로 이사온 동네이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부담이 덜 했다.

내가 바둑판을 벌이면 녀석은 언제나 내 뒤 통수에 꼬옥 붙어 서 있곤 했다. 그리고는 복서의 쎄컨처럼 침을 튀겨가며 간섭을 해 댔다.

< 옳거니, 젖혀야지…아암, 끊어야지…>

< 아냐,아냐….이 때는 가만히 늘어서 참아야 할 때지…>

내가 상대방의 대마를 잡으려 갈라치면 녀석은 내 뒤 통수를 후려치며 불같이 화를 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대마를 죽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대마를 잡으러 가지 않는 것이다. 알긋냐 > 

이런 젠장… 내 바둑을 내 마음대로 두지도 몬하는 구나  쩝,…

녀석의 코치대로 바둑을 두다 보면 거의 눈터지는 계가 바둑이 되곤 했다. 그런데 이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판은 아무리 헤아려도 내가 한 집 반 정도는 져 있던 바둑이었다. 나는 패배를 각오 하며 집을 짓기 시작 하였다. 그런데 녀석이 집을 짓고 있는 나의 장지와 인지를 잡으며 쓰윽 밀었다. 졸지에 바둑알 두 개가 상대방의 집 쪽으로  한 줄 밀려 들어갔다.

나는 어,어, 하면서 차마 그리하면 안된다는 거부의사로 두 손가락에 힘을 주며 저항 해 보았지만 어찌하랴 귀신의 힘을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결과는 나의 두 집 반 승이었다.

상대방은 납득할 수 없는 결과 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한참이나 반면을 내려 보았지만 복기를 하지 않는 이상 그도 어찌 아랴… 귀신의 손가락 솜씨를…

이렇게 나는 승리를 거두어 가기 시작했다.

녀석은 나에게 큰판을 두어보라고 유혹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만은 단연코 거절 했다.  부정한 방법으로 큰돈을 딴다는 것은 도덕성의 문제 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위험한 일 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둔 길에서 칼침을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제부터 인가부터 기원사람들의 나를 보는 눈이 달라 지기 시작했다.

내가 없는 때는 나에 대해서 수군거리는 것도 같았다.

내가 왜 이리 추해 졌는지… 나는 괴로웠다.

어느 날  기원을 나온 나는 혼자 소줏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어김없이 녀석이 나타나 처억 하니 내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 오늘은 얼마 땄어? 보라구, 판을 키우라니까…>

녀석은 병째로 소주를 들이키면서 히죽 웃었다.

나는 그만 뻐억 하니 큰소리를 치고 말았다.

< 악마여 내 앞에서 이제 그만 없어져 버리거라. >

녀석은 얼굴에서 사악한 웃음기를 거두면서 일어섰다.

< 네 맘속에 악령이 깃들어 있기에는…너는 너무 소심한 놈이로구나….쩝, >

그는 휘적휘적 걸어 술집을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진심으로 바랬다.

그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