身邊雜記(신변잡기) 2.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 -그 겨울의 찻집 중에서-
글을 쓰려다 듣게 된 용필이형 이 노래는 언제 들어도 좋다.
젊음의 시간도 주머니 사정도 넉넉했던 때 많이 불렀다.
잠깐씩 맛보는 탈선의 추억도 있고 그래서 더 좋다.
어쩌다 가라오케나 노래방에서 속 빈 아줌마들 눈 마주쳐 놓고
이 노래를 부르면 더러 후끈 거리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거기에 주르륵 눈물까지 흘려주면 게임 끝이다.
집에 갈 때 흔적 지우느라 킁킁거린 적도 꽤 된다.
그 때는 필요하면 수시로 잘 나오던 눈물이 지금은 너무 귀하다.
요즘은 아무리 극한에 설움을 끌어 올려 가슴에 밀어 넣어도
눈물은 잠시 눈썹 끝에만 머물다 말라버리고 만다.
슬픔도 추임새가 없으니 길게 뻗지 못하고 이내 사라진다.
늙어 노인이 되면 잠이 줄고 감정과 눈물이 메마른다고 하더니
늙는다는 것은 묘한 곳에서 서러움을 준다.
酒債尋常行處有 술 값 외상은 가는 곳 마다 있지만
人生七十古來稀 인생 70은 옛 날 부터 드물다 하지 않던가.
나이가 70줄에 들어서면 한 번씩은 들먹거리는 杜甫(두보)의
曲江二首(곡강이수) 한 부분이 문득 떠오른다.
수려하고 아름답게 펼쳐지는 글이지만 암울한 시절에
다 펼치지 못한 꿈을 글귀로만 풀어야하는 시인에 답답함과,
엉켜있는 마음이 건너오는 전문을 읽으면 크게 슬프다.
마음은 아직 知天命(지천명)인 50에도 닿지 못했는데
몸뚱이는 새해 달력을 걸면서 詩人 두보 선생이
드물게 오래 사는 나이라 했던, 70세 고희(古稀) 자리 에 섰다.
60세도 못 넘기고 세상을 등진 시인이 70세도 경로당에 가면
막내가 되는 현세에 환생한다면 어떤 글을 쓰게 될지 궁금하다.
고희(古稀)를 말하고 있으니 박명(薄命)은 면했고
두보 선생처럼 외상 술값으로 미안한 곳도 기억에 없다.
그에 비하면 그럭저럭 잘 살아 온 것 같기는 한데,
한 때는 최선의 선택으로 지나왔다 여겼던 순간순간들이
긴 호흡으로 바라보면 올바른 길로 왔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앞 서 뛰는 마음을 허덕거리며 따라가는 몸 때문인지
혼자 궁시렁 거리며 자책하는 시간이 자꾸만 늘어나는 즈음이다.
늙으면 아이들처럼 산만해 진다더니 이런 건가보다.
용필이형 노래듣다 샛길로 한참을 돌아다니다 왔다.
두 번째 잡설(雜說)을 풀고 있다.
전 편 끝머리에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를 들고
나쁜 일로 길을 트고 왔으니 오늘은 좋았던 길로 가본다.
새옹지마.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말씀이다.
7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인생은 70부터라 못 간다고 전해라.
할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러고 싶다.
열심히 노래 해봤자 저승사자 귓등에 닿지도 않겠지만
혹시나 하고 나도 그냥 한 번씩 불러 보기는 한다.
7학년 넘은 인생은 언제 나락으로 떨어져 끝나 버릴지도 모르니
내일을 장담 못하는 외줄 타기 곡예사 신세나 다름없다.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꿈같은 소리다.
그렇게 손닿지 않는 꿈도 아닌데 입도 뻥긋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간직한 작은 꿈이 하나 있었다.
쓰면서 슬프지만 자손번창 욕심이나 죽은 다음에
제사 밥 얻어먹고 싶은 어마어마한 꿈도 아니다.
남들은 50줄만 넘으면 흔히 다하고 사는
손주 새끼 얼굴이라도 보고 갔으면 하는 소박한 꿈이다.
마흔 살 앞뒤로 아들 둘을 두고도 그네들 부부 눈치 보느라
끙끙 가슴앓이만 한 7~8년 하다 접기로 했던 슬픈 꿈이었다.
두 해전 지나간 봄이다.
접혀졌던 그 간절함이 복권 당첨되듯이 펼쳐져 다가왔다.
둘째 며늘아기가 7년간 소식 없던 애기를 잉태했다고 알려 주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씨앗은 수확의 기쁨을 예고한다.
복음중의 복음이었다.
자식들 앞에선 덤덤한 척 뻗대다 담배를 물고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주먹을 휘두르며 껑충껑충
미친놈처럼 골목길을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왜 그렇게 날치고 뛰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꿀맛보다 더 진한 행복한 시간이 담을 넘어 집으로 들어왔다.
40년 넘게 아이의 울음소리가 멈췄던 내 집이다.
겨우 소식만 전 한 태중에 아이였지만 우리 곁으로 오면서
먼저 전해 줄 작은 선물 하나를 건네주었다.
입덧하는 며늘애를 위해 맛 집을 찾아 난생 처음 온 집안이
메기 매운탕 집 앞에서 2시간 넘게 줄을 서봤다.
100년이 넘도록 지켜졌던 우리 집안에 금기(禁忌)가 그 때 깨졌다.
그 아이는 내게 효손(孝孫)임이 분명했다.
주는 대로 먹어라.
할아버님과 아버님이 그러셨고 나도 내 두 아들도
음식을 탐하지 말라는 가풍을 철통같이 지키며 4代를 살았다.
우리 며늘애들 둘도 시어머니 닮아 찌개나 볶음 등은
푸짐하게 왕창 만들어 기본으로 당연하게 며칠씩 밥상에 올린다.
큰 아이 고등학교 입학식 날 대짜 솥에 끓였던 선지 해장국을
1주일 내내 먹었지만 3父子는 끽 소리 한 번 안내고 잘 먹었다.
내 아내는 안 먹으면 무조건 밥상을 걷어 가버린다.
할머님도 우리 어머님도 그러셨다.
한 번 입맛을 버리면 식구들 밥 해먹이기 힘든 다고
외식을 금지시킨 어머님 유훈을 아내는 지상명령으로 여긴다.
시집 온 첫 날 부터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굳게 지키고 있다.
두 고부(姑婦)는 사이가 참 좋았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 3父子는 맛 집을 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큰 기쁨은 작은 고역을 묻어 버린다.
(민물고기를 먹지 않는 一圓의 妻 朴 某氏의 一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