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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묘법문 끝내기에서 포석까지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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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
2016-12-02 오후 8:45 조회 3044추천 2   프린트스크랩








오랜 만에 근대사를 좀 보았더니
근자에 시해사건을 중심으로 명성황후라고 불리던 것이
허황된 표현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날마다 파티를 즐기고
굿을 해대면서 금강산 봉우리보다 한 섬의 쌀을 바쳤다는 등
온갖 무개념이 즐즐비비하다.

몇 년 안 가서 임오군란이 생긴 기본 이유가
5년 째 밀렸던 보수를 쌀로 주면서
절반은 모래를 섞어서 준 데서 비롯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시국이 그 지경인데
지들은 온갖 호의와 호식을 해대고 쳐자빠졌었다고 하니
일본넘들이 안죽여도 우리 민중들의 손에 죽었을 것 같이 느껴졌다.


그에 비하면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이나 대원군에겐 나름대로 견해가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보수와 개혁에 해당하는데
이 하응의 기본 실패는 아마도 쇄국정책이 아니라
경복궁 재건에 있지 않았나 싶다.
어느 시절에나 가장 중요한 것은 갱제이다.
군인들이 salaray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던 시절에
4대강 개발을 하는 꼴이나 무어가 다르겠는가?
병인양요나 신미양요를 겪으면서도 대세관이 열리지 않은 것도 문제이겠지만
그건 워낙이 사태가 심중하니까 속도조절론으로 이해될 수 있는 측면이 있지만
사람이 일단 살고 봐야 하는데
민중들은 굶주리고 있는데, 대궐을 재건하느라고 돈을 허비했으니
판단착오가 아니었나 싶다.


김옥균 등의 개화파들은 일본을 등에 업고 일을 저지르긴했지만
박지원의 손자였다는 박규수 등의 영향을 받아서
지구의를 보면서 미래를 꿈꾸었던 그 안목에 비추어볼 때에
갑신정변이 성공했으면
일본에 국권을 상실하는 데까지 가진 않았을 것 같다.
그밖에 자료들을 살펴보니
이승만과 거의 동시대에 태어난 김구의 백범일지
그리고 야산 이달의 자제인 이이화 선생의 책 속에 이승만을 다룬 자료
그리고 이토오 히로부미를 다룬 자료 등이 보였다.
그밖에 안창호 평전 등도 보이고
동학이 개창된 것도 대체로 이승만이나 김구의 출생시기와 비슷했다.
김구가 동학에 찾아갔더니
나이도 어리고 신분도 비천한 자신을 공대해주는 것이 의아해서
질문을 던지자, 당시 동학의 지역담당자가
동학에는 신분의 차별이 없고 등등의 설명을 하는 것을 듣고는
크게 감명받아서 10대의 접주가 된 사연 등이 나온다.
그러고보면 동학이 정신적으로는 그야말로 근대적인 운동이었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신분차별도 없고, 연령이 어리다고 함부로 대하지도 않는
그런 발상이 우리 자체 내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런 영향을 입은 김 구 였기에 예전에 읽었던 백범일지의 감동이 있었지 않나 싶다.


우리 근대사의 시작은 그렇게 본다면
정신적으로는 동학
정치적으로는 강화도조약
그 이전의 전조로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대원군과 개화파의 연속적 등장 등으로 이해되는 것 같다.
일본의 경우 1640년 경 네덜란드에 상관을 설치하여
유럽과의 교류가 시작되었다고 하니
확실히 일본이 근대화의 선구인 것은 맞는 것 같다.
그 흐름을 타고 일본은 아시아의 맹주가 되어서
만주국을 세우고 남경대학살을 저질러서
중국의 철천지 원수가 되었기에
북경올림픽에서 보았던 그 지독한 중화주의의 색채가
이미 한 200년 전에 그 뿌리를 다졌던 것으로 대체로 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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