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중사,(10) | 나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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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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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중사,(10)
2015-08-17 오후 11:59 조회 4093추천 4   프린트스크랩

(10) 이별.

한 순간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강타하고 빠르게 지나간

정신적 충격은 너무도 크고 거셌다.

자신의 내면에 숨겨졌던 방어본능 때문이었을까.

용량이 과도하게 초과된 컴퓨터에 과부하가 걸려 꺼져 버리듯.

내 모든 의식들은 기능을 정지하고 자아상실의 들어갔다.

처음에는 아무런 고통과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한 참 동안 내 머릿속은 한 개의 단어도 이름도 남지 않은

텅 비어버린 공간뿐이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수화기를 붙잡고만 서있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죽어?

누가?

불과 몇 시간 전 손을 흔들며 언덕을 내려갔던 김 중사가?

죽음을 가장했던 내 의식들이 조금씩 살아나자 김 중사가 들어있는

장면 장면이 바뀌며 주마등(走馬燈)이 머릿속을 돌기 시작했다.

통증은 전혀 없는데 아주 조금씩 밀려오는 종류를 알 수없는 아픔은

나를 덜덜 떨게 하며 못 견디게 괴롭혀 왔다.

무언가 해야만 할 것 같은데 손도 발도 그렇게 잘 움직이던

생각도 전혀 내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갑자기 눈이 퍼붓던 날.

제 몸보다 더 큰 W백을 메고 전입오던 날에 작은 군인이 눈앞을 스쳐갔다.

이불을 똘똘 말고 게으름 떨던 어린 아이도 보였다.

1군 사령부에서 실시한 12km 완전군장 구보 측정이 끝나고,

부상으로 함께 받았던 3일의 포상 휴가를 김 중사는 파주 내 집에서 보냈다.

이불을 둘러쓰고 라면을 맛나게 먹던 김 중사는 내 눈에는

막내 동생보다 더 어린 그냥 아이처럼 보였다.

추석 전 다녀온 훈련 기간 중 대대 숙영지에서 5시간을 오가야 하는

백운봉의 관측캠프로 수통 두 개의 가득 찬 소주를 허리에 차고

험 하디 험한 밤 산길을 올라왔던 김 중사가 보였다.

형님하고 나를 부르던 멋진 사나이의 굵직한 목소리도 뒤이어 들려왔다.

슬프다는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는데 눈물은 이상하게

내 허락도 없이 뚝뚝 떨어지다 그냥 줄줄 흘러 내려왔다.

젊은 군인이 세상을 떠나기에는 너무 황당한 이유로,

활짝 한번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21살의 꽃망울로 김 중사는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인사계 박 상사 댁에서 부인이 주신 명절 떡과 음식을

자전거 짐받이에 곱게 싸매고 하숙집으로 돌아가던 김 중사를,

음주 운전을 한 12ton트럭이 들이받아 현장에서 사망한 것이다.

소주 외에 다른 술은 일체 입에 대지 않는 인사계 댁을 나서며

우리 형이 주었다며 몇 번을 자랑하고 따로 소중히 실었다는,

다 마시지 못한 맥주 5병을 싣고 그렇게 김 중사는 내 곁을 떠났다.

너무나 허망하게 짧고 강한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군 병원으로 이송되기 전 신원 확인을 위해 갔던

병원 계단 앞에서, 하루 밤 사이에 부쩍 늙어버린 박 상사를 보았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라는 내기에 자주 오르내리는

강인한 박 상사는 그곳에 없었다.

주먹으로 꾹꾹 눌린 울음소리를 비집고, 옆으로 새어나온,

쉴 새 없이 흐르던 눈물을, 훔쳐내지도 닦으려고 하지도 않는

아주 나약한 노인(老人)만이 있었다.

그는 자식을 잃어버린 아버지였고,

나는 동생을 잃어버린 형이었다.

둘이 흘리는 눈물 속에는

아버지와 형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렇게 김 중사는 우리에게 아들이었고 동생 이였다.

박 상사와 나는 아버지와 형처럼 계단에 쭈그려 앉아

서로 끌어안고 오래도록 울었다.

퇴근 후 사고사는 국립묘지 안장에 치명적 결격 사유였다.

천애의 고아나 다름없는 김 중사를 위해 박 상사는 동작동

국립묘지로 보내려고 입과 발이 부르트도록 무릎을 꿇고 다녔다.

너무도 간절한 그의 읍소가 통했다.

감응된 막강 로비의 귀재 사단 주임상사의 덕분으로,

김 중사는 공무 중 사망으로 처리됐고, 명예롭게 대대 연병장에서

대대장(大隊葬)으로 장례를 치룰 수 있게 되었다.

예우에 따라 9발의 조총을 발사하는 분대를 이끌고 섰던 나는

김 중사에게 마지막 전송의 선물조차 다주지 못하고 말았다.

몇 번을 확인했던 내 총은 하필이면 선두에 시작을 알리는

첫발을 불발 처리시켰고 결국 시작의 총성을 나는 울리지 못했다.

선발에 조총 소리대신 통곡을 다음 사수에게 건네야 했던 나는

8발로 끝난 아쉬움의 무거운 짐을 오래도록 지고 살아야만했다.

자전거에 실려 있던 5병의 맥주를 나눠 마셨더라면,

魔의 시간을 비켜 갔을지도 모른다는 가정과 함께,

오랜 시간 자책과 후회는 젊은 날의 나를 놓아주지 않고 따라 다녔다

하사관이 군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 예우인,

9발의 총성도 다 울려 주지 못한 장례식은 가슴 쓰리게 그렇게 끝났다.


동작동 국립묘지를 향해 김 중사의 운구가 떠난

텅 빈 자리에서 나는 알았다.

눈물 없는 슬픔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더 진한 것인가를.

못다 울려준 한발.

남은 총성에 의미를 숙제로 남기고 내 군 생활도 막을 내렸다.

사람은 태어나 죽는 날까지 원하지 않는 이별도 감내해야하는

저마다 운명이 기획한 제 길을 간다.

손가락을 입으로 물어뜯어 피로 나눈 맹서도 영원하지는 못한다.

이별이라는 전제가 없다면 만남도 없을 것이다.

그 때 그 때 현실과 타협해야하는 이성(理性)은 모든 것을 수용하고

이해하려 애쓰지만 내 감성은(感性)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을 부정하고만 싶다.

어딘지도 확실하지 않은 고향 이였지만 김 중사는

술에 잔뜩 취하면 통영에 바닷가를 함께 가자고 나를 졸랐다.

만취해야만 같이 갈 수 있다고 아이처럼 술잔을 권하고 또 권했다.

이제 김 중사는 술을 마시지 않아도 휴가증이 없어도

내키면 언제라도 그 바닷가를 거닐 수 있을 것이다.

김 중사야!

서로 사는 다른 세상의 경계를 허물 수는 없었겠지만

나는 40년을 어리석게도 추억을 쌓게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가 입었던 군복 하나를 벗기려는 시도조차 못했다.

언젠가 죽음이 내려와 하늘 위 같은 세상에서 너를 만나면,

여느 형제들처럼 형과 동생으로서 너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잡고 싶어 했으면서도 말이다.

오늘.

동생을 잃어버렸던 형의 마음으로

너를 만나면 나눌 인사를 미리 건네 본다.

잘 있었니. 택현아! 라고...



                                                        -끝-



그때의 댓글입니다.


조아해유 | 2010-12-18 오전 10:31:39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아, 참재밋게 잘읽엇음니다..담글은 너무재촉하면안되겟지만 학수고대혀봄니다.수고마느셧슴니다,구우벅

一圓 늘 함께해주신 좋아해유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 뵙게 되기를... 꿈속의사랑 | 2010-12-18 오후 6:54:36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살다보면 아쉬움으로 이미 지나간 일에 이런 저런 가정을 하게 되죠 ..그때 그시간에 그자리에 내가 없었더라면..이렇게 했더라면..누구나 아쉽고 아픈 추억들이 쌓여가지요....

一圓 가정은 또 하나의 꿈이겠지요 같은눈으로 읽어 주신 꿈속의 사랑님께 감사 드립니다

당근돼지 | 2010-12-19 오전 11:32:14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김중사의 편한한 안식을 기원하며........잘 보고 갑니다.

팔공선달 | 2010-12-19 오후 7:26:06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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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pan |  2015-08-19 오전 12:44:52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애닯은 추억이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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