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퇴직을 한지 10년이 훨씬 지나 이제는 내 직업이 거의 한량 수준이다. 직업이 있어 약간의 푼돈이라도 만질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종겠냐마는 계속 놀고만 있으니 가사에 전혀 보탬을 주지 못하는 나는 한 마디로 표현하여 정확히 백수이다.

직업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면 아쉬운 점이 하나, 둘이 아니지만, 우선 살림에 보탤 금전 줄이 끊기었다는 현실적 절망감이 엄습해온다. 두번 째는 사회에서 사람을 만날 기회가 대폭 줄어 든다는 비참한 현실이다. 그간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는 정치, 경제, 사회 세계가 돌아가는 전반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며, 재테크, 교육, 노후, 컴퓨터 등 많은 지식을 쌓고 교류가 가능했었다. 하지만 직장을 나오는 순간 모든 대화의 줄이 단락되면서 심지어 심한 경우 바로 우울증으로 돌입하는 경우도 있다.

직장 다니면서 약간의 과오는 가내에서는 묻히기도 했었지만 퇴직 후 백수가 되면 아내, 자식들로 부터도 눈총을 받게 된다. 심지어는 저녁에 술 한잔 생각이 나도 쉽사리 집을 빠져 나오기가 여간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

밤에 쓸데없이 왜 기어 나가냐는 아내의 불호령과 더불어 누구와 술을 마실거냐는 힐문을 받는 수모를 당한다. 이는 성폭력범에게 채워 주는 전자 팔찌가 내 발목에 채워 지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거기에다 여흥에 겨워 어쩌다 노래방에라도 한차례 다녀 올라치면 늦은 귀가의 이유로 아내의 관용 범위를 넘는지라, 이때 아내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하게 되면 이는 내 영혼을 옥죄는 처참함을 느끼게 한다.

혹자는 돈도 한푼 못버는 것이 왠 노래방 타령이냐고 하겠지만 30년 직장생활 후 정년퇴직 후에는 예전의 역전의 용사 시절이 때로 그리워지면서 예전 직장 생활 할 때의 옛 추억의 향수에 한 번쯤 빠져보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국민연금 93만 원을 받고 있지만 쥐꼬리 만한 돈인지라 아내 성에 차지를 않아 아예 눈을 감아 버린다. 허기사 내가 직장생활 중 한창 잘 나갈 때 약 20여 년전에는 연봉 5천만 원 이상씩 여러 해를 벌어다 주었지만 아내의 기억 속에서 이미 까맣게 휘발되어 버린지 오래이다.

정년 퇴직을 하고 사회로 나와 백수 생활을 하게 되면 밖에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서로 교환할 명함 한장 없어 밥 한 끼 못 먹는 것 이상의 아픔이 저며 온다. 그렇지만 내 휴대폰 번호를 일일이 적어주는 것도 부담스러워 인사를 나누는 상대방에게 내 명함이 따로 없다며 결례의 사과를 하곤 한다.

그래도 나는 비록 수입은 없지만 모 여행사,  부천시민기자 명함과 해외여행 시에 만나는 친구들을 위해 집 주소, 이 메일 주소와 내 휴대폰 전화번호가 찍힌 명함을 만들어 놓았기에 그나마 퍽 다행인 셈 이었다.

지금 누가 내 직업을 물어 온다면 나는 딱히 꼬집어 정확한 대답을 해줄 수 없어 그냥 '탁구인'이라고 얼버무린다. 사실 내가 탁구를 치는 것은 돈을 벌어오는 수단이 아니고 단지 취미 생활일 뿐이다. 하루에 탁구를 치는 시간이 무려 약 3 시간 이상이나 되니 그리 쉽게 말하는 것 뿐이다.

영어, 문학 강의를 꾸준히 듣고 때로 글도 좀 쓰고는 있지만 이는 완전히 소비자의 입장이고 탁구는 30 년 이상을 쳐서 초보자는 입으로 가르쳐 줄 수 있는 수준에는 와 있다. 그래서 가끔 탁구를 쳐주고 가르쳐 주면 때로 고맙다고 밥을 사주거나 술을 얻어 먹는 경우도 있어 그나마 약간의 생산성은 있다고 볼 수가 있다.

사실 생산성이라는 이 표현은 아주 정확하지가 못하다. 왜냐 하면 그들이 술 한번을 사면 나는 적어도 두세번을 그들에게 사주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나이가 먹을수록 젊은이들과 어울리려면 지갑은 자주 열고 입은 굳게 닫아야 하는 노인이 되는 통상의 규범 때문이다.

예전 농업시대에는 모를 심거나 벼를 벨 때 노인, 젊은이들이 함께 한 논에서 어울려 일을 하였겠지만 요즈음 어느 젊은이들이 나이 든 사람과 쉽게 어울려 주려 하겠는가. 하다 못해 패키지 해외 여행을 가도 연세든 노인들은 아무리 기력이 왕성할지라도 쉽게 끼워 주지 않는 이치와 똑같으리라. 노인은 겉보기에는 멀쩡해도 여행중에 혹시 불의의 변을 당할 지도 모른다는 선입견이 먼저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제 생긴 여유시간을 이용하여 그 동안 열심히 쓰지 못했던 글이나 다부지게 써보자고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그마저 여의치가 않다. 이는 마치 학교 다니다가 갑자기 방학을 맞이하여 뒤떨어진 공부나 열심히 해보겠다는 마음만이 앞섰지만 막상 여유로와지면서 제대로 책을 펴보지 않는 이유와 흡사하리라.

어찌되었던 내게 내 직업을 물어온다면 그냥 단순 백수가 아닌 지금은 그냥 '탁구인'이라고 대답을 해주고픈 마음이다. 백수 보다는 일견 포장된 단어가 마음에 편하게 다가 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