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달이 전화.”

(...........................)

구석진 자리에 바둑판 가까이 머리를 쳐 박고 있는 사내를 향해 원장이 다시 소리쳤다

“선달이 전화.”

(..........................)

선..........

원장은 들고 있던 전화기를 내려놓고 구석에 앉은 사내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퍽”

수읽기에 몰두하고 있던 선달이는 뒤통수를 얻어맞고 화들짝 놀라 돌아본다.

“뭔겨.”

“자슥아 전화 왔다고 몇 번이나 불렀잖아.”

“누군데. 없다하소.”

선달이는 다시 돌아서 바둑판을 응시한다.

바둑은 엄청 유리하지만 상대는 바둑 견원지간인 맞수.

앞판에 당한 것도 있고 방내기니 부스러기까지 최대한 벌어 들여야 한다.

오후에 데이트와 저녁에 한 잔 할 것까지 계산서가 바둑판에 늘어졌다

불이 났다고 해도 일어서기 힘든 상황에 뭔 전화가 대순가.

“진짜가.”

“야”

“제수씬데.”

“야…….”

“뭐라 카능교. 진작 캐야지.”

후다닥.

“응. 나야.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일요일 영화보기로 하고 여자 친구와 약속을 했는데 이놈의 바둑도 두고 싶고

데이트도 해야겠는데 여자 친구는 오전부터 스케줄을 팍팍하게 들이 밀었다

공원에서 산책하고 백화점 쇼핑 후 식사하고 영화 한 프로 댕긴 후 카페 갔다가

저녁에 한잔하는 그에겐 거의 노동에 가까운 일정이었다.

사랑하는 사람하고 같이하는 시간이 노동이라.

그건 바둑 때문이다

일요일은 바둑을 실컷 둬야 하는데 일정에 들어가지 못했고 논란 끝에 오전을 건졌다.

3판은 충분하니 원수 놈하고 약속을 미리 해뒀고 그리고 첫판을 12집 내준 상태다

거금 5만원을 묻어두고 집 당 천 원짜리 대국인데 상대의 헛 패로 30집 가량 앞선다.

비세를 느낀 상대는 계속 약점을 추궁하며 끈끈하게 버텨오는데

방내기가 그런 점에서 묘미가 있으니 불리하다고 쉽게 승부수를 띄우기도 어렵다

그래서 턱도 없이 시달릴 일 없고 안전하게 두면서 지뢰만 심어 놓는다.

“그래. 그래 미안. 미안.”

억지로 영화를 다음 편으로 미루고 2시간가량 말미를 얻어 한숨 돌리고 다시 앉았다

“야. 야. 대충 두고 얼른 가봐.”

바둑만 앙숙이지 그래도 기원에서 만나 인간성 좋은 놈이라 절친하게 지낸다.

내기는 피터지게 붙지만 끝나면 5만원 한도에서 반은 돌려주고 또 그 반으로 술을 먹는다.

아양강변 단골포차에 가면 안주 3천 소주 천원이니 만원이면 둘이서 영웅담 늘어놓기 족했고

나머지는 기료주고 담배 넉넉히 사고 오가며 택시 타는 호사가 전부였지만 욕심도 없었다.

하지만 둘은 바둑만 마주하면 기 싸움이 치열했다

바둑은 다시 이어지고 충분 할 것 같은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고 상대는 조급함을 이용했다

패싸움을 걸어왔는데 불리함을 알면서도 걸어 왔으며 그 자체로도 한방짜리다

물러서면 서너 집 손해고 지금 상태로 마무리하면 그래도 2~3방 정도는 무난할 형국이다

여기서 방내기의 아이러니가 있다

함부로 승부수를 못 던지지만 한집이 한방이 될 수가 있으니 욕심이 안 생길 수 없다

시계를 쳐다보니 버스 타고 갈 시간이 다가오고 갈등을 하다 패를 선택했다

잘못 되도 승패엔 관계가 없고 한방 더 이기면 택시타고 가도 남는다.

“어허 이사람 대충 두고 갔다 오라는데도.”

“그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여 둬”

“자자 그러지 말고 두 방 인정 할 테니 다녀오라고.”

“무슨 소리야. 지금 3방에 패지면 4방인데.”

“패는 해봐야 알고 지금 계가로……. 음. 2방 왔다 갔다 하네.”

“그러니 우리끼리라 인정하는 거야.”

그랬다.

바둑 두다가 일이 생기면 그 상태에서 계가를 하고 유리한 쪽이 조금 양보한다.

한방 정도는 양보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사람 심리가 그런 게 앞에 한판 진 것이 묘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본전이고 시간만 낭비하고 경비 들었고.

“무슨 소리야. 패감이 없잖아. 3방 좋다.”

2방 3방 실랑이를 부리다 결국은 서로 오기로 끝까지 가기로 했다

예전에 없던 서슬이 두 사람 얼굴을 가득 메웠다

선달이는 패를 걸어오지 않았으면 2방으로 모실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었고

한 마디로 괘씸죄였다

상대는 바쁜 일도 있으니 오늘 승부는 무승부로 끝내자는 뜻이었다.

인생은 선택의 기로에 설 때가 많다

얼떨결에 하더라도 평소의 내공이 작용하고 신중해도 내공의 범주 내에서 일어나며

실수를 줄일 수 있고 없고의 차이는 있겠으나 그것으로 틀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렇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더라도 가야 할 곳으로 외길 수순을 밟게 되어 있는 것이다

때로는 선으로. 때로는 악으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다보면 그럴 수 있지 뭘 그래”

가로등 아래 두 사람의 언쟁은 이어지고 결국 여자는 울먹였다

선달이는 미안함에도 어떻게 해 볼 생각을 못한다.

“다음에 아침부터 자기가 원하던 대로 다닐 테니까 오늘은 어서 들어가.”

마음은 콩밭에 있고 늦게나마 위로 차 어디로 가서 맛있는 것이라도 사주는 게 맞는데

지금은 그런 상태가 아니다

기원에서 기다리는 녀석이 가버릴까 노심초사니 이 상황에서는 여자 친구가 귀찮은 것이다

“돈 있으면 좀 주고 얼른 들어가 늦었다.”

참 어이없는 소리다

사람이 어리석은 짓을 알고 행할 때는 항상 다짐하는 변명이 있다

오늘 모두 정리하고 내일부터는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것.

그 판을 잘 마무리해서 4방을 이겼다

그리고 이제 일어서야 되는데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이 훌쩍 넘어 버렸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망설이다가 일단 만원을 내 밀었다

첫판 2방지고 둘째 판 4방 이겼으니 2만원 땃고 그 반을 관례대로 돌려주었다

그리고 불이 나게 달려가 여자 친구에게 살살 빌고 늦게나마 영화도 보고 밥 먹고

전망 좋은 카페에서 음악 신청 올리고 속삭이다 기분 좋게 한 잔 한다.

그러나 그것은 허탈하게 천정을 향해 내뿜는 담배연기 속에 그려진 환상이다

이미 서너 시간 늦어 버렸고 지금은 나선다고 해도 속수무책이다

어떻게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르고 연락 할 길도 없다

두 사람은 빈 바둑판에 서로 돌을 들어 딱딱 두드릴 뿐 말이 없었다.

친구도 열 받았는지 말이 없고 선달이도 대책이 없었다.

(돈 만원 차인데 그냥 갔어야지)

후회막급이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울적해진 마음에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술 한 잔 할까.”

(................)

친구는 대답이 없다.

“그럼 한판 더할까.”

(................)

바둑판을 두드리던 소리가 멈추더니 조용하게 그러나 비장한 소리가 들린다.

“승부 보려면 하고.”

결국 판돈은 10만으로 오르고 집당 2천원이 되었다

그러나 늘 그랬듯이 판돈만 올렸지 실제 승부가 나지 않았다

두 판씩 주고받았는데 판수는 빅이고 내가 몇 천원 붙인 정도다

그래서 방내기가 판 내기로 전환되었고 먼저 5만원내기 한판을 잃었다

가진 돈 10여만 원에 경비 쓰고 딱 두 판 둘 여유밖에 없었는데 막판에 몰렸다

두 번째 판도 그리 여의치 않은데 여자 친구가 기원까지 찾아 온 것이다

미안하고 고맙고.

하지만 접고 가자는데 이제는 아까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다

오늘 수십 판을 주고받았는데 마지막에서 내가 궁지에 몰렸으니 절대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진다면 거지가 되니 절박했다

“내일부터는 바둑 안 둘게 응. 응.”

잠시 밖으로 나가 달래보려 했다

순간 가슴에 둔탁한 충격을 느꼈고 여자 친구의 앙칼진 목소리도 따라왔다

“그래. 실컷 둬라. 인간아.”

멀어지는 여자 친구에게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못했다

발아래 떨어진 그녀의 지갑을 말없이 집어 들고서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서야 정신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집착했던 바둑이 과연 무엇인가 하고.

미안해서 너무 부끄러워서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대로라면 결론이 불길하게 떠오르는데 입도 안 열리고 발도 떼어지지 않았다

힘없이 기원으로 돌아가다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우리 밖에 없었는데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것으로 보아 친구도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기다려주는 사람도 많군.

(나는 뭐 땜에 나를 추하게 만들었나.)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돌아섰다

그래. 다 가져라.

내가 다시 올라 간다면 이런 기분으로 바둑을 둔다면 결과는 뻔했다

혹 그녀가 다시 온다면 얼마나 더 추해질까.

모든 게 공허했다
끊고. 들여다 보고. 마늘모로 웅크리고. 그리고 한칸 뛰고. 또 모자도  씌우고....
수 많은 수법들을 알고 있어도 적절한 곳에서 필요한 시기에 적용키 어려운 게 삶이고
그날이 내 인생의 부분적 전투였다면 가만히 늘어 두었어야 했다

그 후론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의 친구에게 찾아가 지갑을 건네줄 때 안타깝게 하던 말

커다란 두 눈에 맺힌 눈물 지그시 깨문 입술 실망으로 참담해 하던 그 얼굴과 함께

요즘도 가끔 환청처럼 듣는다.

“달이씨 왜 그랬어요.”

왜 그랬어요.

왜 그랬어요.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