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곱 시경 나는 대문을 열고 차를 후진한다. 왼쪽으로 약간 후진시켜 오른쪽으로 돌면 마을 정문으로 향한다. 말레이(말레이시아 민족) 경비들이 “슬라맛 빠기”를 외치며 차단기를 올려준다. 차는 다시 대문을 벗어나 오른쪽으로 향한다.. 혼자서 아침 운동 차 9홀 골프를 하러 가는 길이다.

반대편 차도를 도보로 내려오던 중국인들이 손을 흔들며 아는 채를 한다. 그들은 골프장 코스를 돌아 조깅을 즐기는 동내 사람들이다. 오늘은 이제 갓 육십을 넘은 두 내외뿐이지만 어느 때는 일개 분대가 행군을 하는 듯이 골프장 트랙을 돌아 나온다. 우리는 거의 매일 이렇게 얼굴을 보고 지낸다..

며칠 동안 우리는 서로 마주치지를 못했더니 그제는 찬(陣)의 집 정원에서 가꾼 망고를 한 바구니나 가져왔다. 그들의 마음 씀씀이가 망고의 진한 향기만큼 느껴진다.
“글을 좀 쓴다고 오랫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더니 등허리에 통증이 왔었어.”
“I See,  Old men can not work anything else for a longtime.”        
나는 커피 대신 향미차(香美茶)를 대접했다. 그들은 “걸어 다니는 시계” 임마누엘 칸트를 흉내 내고 있었던 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동갑내기인 찬과 양(梁)은 143 가구의 빌라 촌인 이곳 마을 원로들이다. 직장 생활을 하였던 두 사람은 55세 때부터 은퇴하여 찬은 아들 집에서 양은  딸 집에서 각기 손주들을 돌보며 생활하고 있다. 그들의 일과는 아침 운동을 하고 정원을 가꾸며 손주들에게 글을 가르치거나 손주들과 놀아주는 것뿐이다.  

중국인들이 90%정도 차지하는 이 마을의 경조사를 비롯한 대소사는 거의 이 두 사람에게  자문을 구하고 있다. 장례식장이나 결혼식장에서 이 두 사람은 멘 윗 좌석에 모셔지고  따로 상이 차려진다. 나는 이들 덕분에 가끔 동석을 권유받기도 한다. 그러나 주민자치위원회(Resident committee)에서는 “하우스 오너”가 아닌 동거인(아들과 딸의 명의로 되어 있기 때문)이란 이유로 철저히 도외시되고 있었다. 이것이 그들에겐 늘 불만이다.

2월 어느 날 두 사람이 찾아와 현 자치위원회의 비리와 4월에 있을 새로운 위원회의 선출에 관한 이야기를 한 후 향후 인계인수절차 및 회계 감사 등에 대한 조언을 부탁하였다. 나는 내가 아는 상식대로 마을의 공동재산, 법정서류. 도면 및 회계서류 등을 인계인수각서와 함께 인수받은 후 하나씩 하나씩 조사해나가면 어렵지 않게 비리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들은 차기 회장으로 내정된 젊은 중국인에게 나를 만나볼 것을 권유하였고 며칠 후 몇 명의 젊은이들이 집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관리비를 훔쳐간  말레이 여자 경리와 감독을 소홀리 한  현 회장의 처리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경리의 민, 형사상 책임을 물어야 할  당사자는 현 회장이며 차기 회에서는 도난당한 금액을 포함한 장부상의 부족분을 현 회장에게 추궁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반문하였다. 
  
그들은 나를 금년 자치위원회 위원으로 일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나는 완강히 거절하였다. 겨우 한국인 소유의 건물이 3동 뿐인데, 그중 한 동은 주인의 얼굴도 모를 뿐만 아니라 중국인이 세 들어 살고 있는데, 부동산에 대한 이 나라 법률은커녕 관습 문화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나를 그저 호감이 가는 사람이라서 추천을 한 것을 장님 곶감 받아먹듯이 수락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처사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매일 아침 골프를 하려 나가는 나를 아직도  좋지  않게 보는 주민도 있을 것이고 한국인에게 시기심을 느끼는 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주민을 대표하는 몇 사람의 위원 중에 내가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나 자신이 불편할 것이었다. 

다만 나는 이제 마을 사람들이 나를 이방인으로부터 이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  위안을 삼았다.

내가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이곳 주민들이 “박 지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 이상하게 생각하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나라 중국인들이 영국 프리미어 축구에 상당한 판돈을 걸고 있었고 대부분 사람들이  멘유를 특별히 응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박 지성”을 연호하면서 엄지손가락을 내보일 때는 그들이 돈을 땃을 때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멘유가 젓을 때는 농담 투로 은근히 “박 지성”을 원망하기도 하였다. 

이 나라의 중국인들은 좀처럼 다른 나라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심지어 말레이인들에게도 겉과 속이 다르게 대한다. 분쟁이 생겼을 때 대부분 말레이인들로 구성된 관공서의 처리가 말레이인에게 편파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중국인들은 노골적으로 말레이인들을 미워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교육 고용 세금 등등 모든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부미 푸트라(말레이 우대정책)”는 말도 안 되는 정책이라고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또한 소수민족인 인도인들보다 자기들이 더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그들 특유의 기술인 상업에 힘을 쏟았다. 소매업은 물론이고 무역을 석권한 뒤 제조 건설 등의 국가 산업에 참여하여  경제력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관리는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정치 행정력을 장악한 말레이인들의 통제가 있기 때문이다.

집성촌을 이룬 중국인들은 마을 내의 치안 및 재산관리를 스스로 결정하기를 원했다. 위원회를 만들어 경비원들과 청소부들을 고용하고 관리하여 주민 스스로 마을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중국인들의 전통을 지켜나갈 수 있는 그들만의 안전한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특히 이스람교를 믿는 말레이 사회에서 의식이 다른 그들의 명절 장례식 그리고 돼지고기와 술을 식음하는 것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없었던 불편을 해소하여야 했다. 이민 몇 세대를 거치면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단결이고 단결은 종교나 전통을 지키는 것에서 가장 굳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언어가 다르고 전통과 종교가 다른 이민족들과는 자연스럽게 거리감을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골프장 입구에 자리한, "Summit Park Homes"라고 명명된 이 마을은 말레이인 약 10여 세대 인도인 약 10여세대. 한국인 2세대 그리고 모두 중국인들이다. 중국인들은  “개으르고 약삭빠른 인디안”(?) “거만하고 거짓말 잘하는 말레이”(?) 들이 같이 살고 있는 것이 달갑지 않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한국인들이라고 하여 예외는 아니다. 그들은 한국인들이 “골프 회원권”이 포함된 인터리어(이노베이션) 비가 중국인 건설주에게 과다하게 지불한 것을 이해하지 못 할 뿐만 아니라 매일 이다시피 골프를 하러 나가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에서 찾아온 방문객들도 모두 골프나 즐기는,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느끼게 하는 "거들먹거라는" 이방인들이다. 

3년 전 캄보디아 여자 가정부가 집의 은밀한 장소에 보관하고 있었던 미화 4천불을 훔쳐 도망간 사건에 오히려 나를 비웃고 있었다. 주선해준 용역대리점에 항의해보았으나 대리점은 전혀 책임이 없다는 것이었고 말이 통할 것 같던 중국주민들도 중국인이 경영하는 “대리점은 소개소일 뿐”이라고 일축해버렸다. 경찰에 고발을 했었는데 현장 검증을 나온 경찰의 행위에 대해 오히려 “전혀 도움도 안 돠는 말레이경찰을 마을로 불러들였다”는 비난을 불러 일으켰다.  CCTV가 작동하지 않았고 커다란 옷가방 두 개를 들고나간 가정부를 통제하지 못한 경비원들의 태만을 들어 관리사무소 및 자치위원회를 압박하자 몇 사람이 찾아와 나를 설득 또는 위협(?)하려고만 하였을 뿐이었다.  대리점료 6천링깃 떼이고 미화 4천불 도둑맞고, 주민들에게 비난받고,,,, 이것 말이 아닌 꼴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 외에도 소위 말하는 텃세를 당한 일이 어디 한 두 번이겠는가?  이방인이 치러야 할  고독이었다. 그러나 나는 구정과 추석 때 이웃들에게  끊임없이 과일 상자를 돌렸고 한국에 갔다 올 때마다 조그만 선물을 준비하였으며 틈틈이 김치 접시를 나누어 주었었다. 최근에는 내가 그린 그림들을 하나씩 선물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4년여가 지나면서부터 그들은 나에게 호의적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앞집의 탄은 훨씬 늦게 이사를 왔는데도 중국의 명절날만 되면 전통 음식을 사다가 주었으며 찬과 양이 다정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주로 중국 역사이야기를 많이 했었는데 춘추전국시대, 진 한 수 당 원 명 송 청 등의 각 왕조들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들은 그들도 모르는 정사나 야사를 이야기하는 나를 놀라운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들은 나에게 가끔“따거(大兄)라고 부르기도 하였고 한국물품에 관한, 특히 삼성 휴대폰에 대하여 물어보기도 하였다.어느 날 찬이 집으로 찾아와 나에게 붓으로 써달라고 한 글귀는 ”海內存知己(바다 내-세상-의 누구도 다 친구다)였다. 이 문구는 중국인들이 말레이인들에게 즐겨 쓰는 말이었다. 양은 중국말은 할 줄 알아도 한문은 잘 모른다. 대신 영어는 어느 누구보다 더 유창하다. 한문은 그의 부인이 통역을 한다. 

마을자치위원회는 주민들로부터 일정 액수의 자치비를 걷어 공동시설 관리비 및  경리, 경비, 청소부 등의 용역비를 지불한다. 그리고 주민들의 불편요소들을 해소하여주고 반대로 주민들을 통제하기도 한다. 그런데 현 위원회의 회장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말레이인 경리의 횡령사건도 있지만 그 외에도 관리비 운영의 불투명성과 의혹이 많다는 것이다. 이에 주민들의 불평이 많아졌고 장기미납자가 늘어났으며 위원회는 재정문제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쿠라이 시청은 “위원회 해체” 및 “시청 직영”까지 들고 나오니 마을의 중국인들은 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4월 어느 날 주민총회는 어린이 놀이터가 있는 공터에서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고 시청의 담당공무원이 배석한 가운데 열렸다. 개최 시간은 하오 7시로 되어 있었으나 시청공무원의 한 시간 반도 넘는 지각 때문에 9시경에야 시작되었다. 6년 동안 처음으로 주민 총회에 참석요청을 받은 나로서는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무엇보다 더  참관인 격인 시청 공무원의 지각, 끈기 있게 그를 기다리는 참석주민들  그리고 그렇게도 늦게 도착해놓고도 주민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앞자리에 착석하는 그의 뻔뻔스러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회의 의제는 신임회장단 선출과 인계인수였다. 신임 회장단은 말이 선출이지 이미 중국인 3명 인도인 1명 말레이인 1명으로 이미 짜여 져  있었다. 그들은 만장의 박수를 받으며 앞으로 나가 인사를 하였고 회장은 취임 연설을 하였다. 영어로 하였는데 나는 그의 심한 중국식 발음 때문에 절반은 알아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나와 중국인 한 명을 더 추가위원으로 추천하여 7인 위원회로 하겠으니 박수로 승인을 해달라고 한 모양이었다. 여기저기서 중국말들이 오갔다.  양이 내 옆으로 와 나를 일으키면서 그냥 앞으로 나가라고 한다. 나는 엉거주춤 떠밀려 앞으로 나갔고,  몇 명의  박수가 터졌고,  담당공무원은 나의 인적사항을 적었다. 그는 한국의 군사정권 때 행정처 어느 곳에나 참석했던 중앙정보부 요원 같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다른 마을 자치위원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인 자치위원이 탄생한 결과 자치능력을 의심받던 마을은 위원회 폐쇄위기를 막은 것이었다. 나는 정치적(?) 고려에 의하여 주민들로부터 이방인에서 공식적인 이웃으로 승격(?)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외국인에 대한 그들의 시선은 그들만의 언어로 처신 하나 하나에 비판이 가해질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매일아침 운동 차 7시경에 집을 나서고, 11시쯤 가정부를 출근시키고 그리고 몰에 가서 식료품 및 생필품을 구하러가는 그 외의 시간에는 항시 서제에서 책상 앞의 컴퓨터와 화폭 그리고 책과 같이 앉아 있는 나를 존경하는 이웃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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