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 나무 소고(小考) (1)

“팜 빌리지 컨트리클럽 (Palm village C.C.)의 27홀은 팜 나무 숲으로 둘러 쌓여있다.
홀과 홀 사이의 경계는 물론 외곽과의 경계에도 겹겹이 심어진 팜 나무 때문에 골프장은
흡사 외부와 단절된 숲속 성내(城內)처럼 생각된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기고 하고 어느 곳은 옹기종기 모여서서 그늘진 정원을 만들기도 하며 또 어느 곳은 의장대처럼 질서 정연히 도열해 있기도 하여 관상수로 단장한 한국의 이름 있는 어느 골프장에 못지않은 풍광을 보여준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눈에 익은 야쟈수 나무와는 비슷하면서도 느낌이 너무나도 다른 팜 나무에 별다른 흥미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저 기름덩어리 열매를 생산하는 열대성 침엽수로만 생각했다. 야자수처럼 휘어진 나무에 낭만이 서린 잎사귀가 늘어진 것도 아니고 이곳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소나무의 이파리처럼 수북이 모여 한 폭의 그림처럼 모형을 갖춘 것도 아닌, 그저 쭉 뻗은 기둥에 산발한 여인의 머리카락처럼 이파리들이 얼기설기 엉켜져있는 꼬락서니가 영 눈에 차지를 않아서였다. 축소해서 보면 볼품없는 무 잎줄기가 연상될 정도였다. 왜 이런 나무들을 골프장 조경수로 심었을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인도네시아 인부들이 장대에 매단 낫으로 잎줄기를 하나하나 배어내어 그 속에 숨은 열매덩어리를 수확하는 것을 보고서야 새로운 느낌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포도송이처럼 주황색 알이 빽빽이 박힌 열매는 지름이 40센치메타에 달하고 무개는 거의 30키로그람 정도일 것 같은 거대한 덩어리, 그 알갱이들은 모두 기름덩어리.
 
이러한 열매를 떨어지지 않게끔 떠받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잎줄기였고 하늘로 치솟은 이 잎줄기가 열매의 성장과 더불어 차츰 옆으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열매는 잎줄기들 안쪽에서 생성되여 그들의 보호아래 따가운 햇살과 폭우를 동반한 강풍을 피하면서 부피를 키웠었다. 걸핏 보아서는 전혀 열매가 있는 것 같지 않았고 설혹 보인다 해도  그렇게 커다란 열매 덩어리가 숨겨져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은패 보호된 씨앗들. 

인부를 꼬드겨 장대 낫으로 잎줄기를 잘라내 보려고 했는데 장대 낫의 높이와 무개 때문에
겨냥하기도 어려웠지만 잎줄기가 어찌나 단단하던지 낫날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힘을 써서 한 두 번 당겨도 보았지만 어림도 없었다. 헛손질만하고 힘에 겨워 장대 낫을 인부에게 도로 돌려주었더니 그들의 숙달된 손놀림은 감탄스러울 만큼 정확하고 빨랐었다. 한 번의 휘두름은 정확히 잎줄기의 밑 부분을 파고들었고 두 세 번의 당김은 그 잎줄기를 깨끗하게 절단하여 땅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마치 지붕 한 쪽이 무너져 내린 중량감이 허공을 갈랐다.
 
잘리어 나간 자리에선 나뭇기둥에 매달린 날라리 벌통 같은 열매덩어리가 윤기 나는 황갈색 살덩어리를 내비친다. 전 세계 인류 식용유의 40퍼센트에 해당하는 팜유(palm 油)의 덩어리. 열매는 이내 인부의 손에 의하여 땅으로 떨어지고 그 퀭한 자리엔 자식 잃은 어미의 슬픔 같은 상처가 남아있다.        

팜나무 기둥엔 나이테처럼 잎줄기와 열매가 잘리어진 흔적들이 층층이 남아있는데 그곳엔
이름 모를 풀잎들과 키 작은 나무들 혹은 넝쿨식물들이 기생하여 마치 털부성이 우랑우탄의 다리처럼 보인다. 이것이 반질반질한 야자수 나무기둥과는 다른 점이었고. 이것이 공생을
삶의 일부분으로 여기는 팜 나무의 또 다른 면목이었다. 이미 잘리어져 썩어가는 곳에 기생 식물들을 키우고 자신은 습도를 유지한다. 따라서 팜 나무 밑은 언제나 시원하다.  
 
주위엔 한국의 뱁새 같은 새들이 몰려들고 있다. 노랑 주둥이와 가늘고 여리기만 한 노랑 발목을 가진 앙증맞은  새들이 병아리 때처럼 종종걸음으로 나무 주위를 맴돌면서 모이를 쪼고 있다. 다람쥐들이 그 사이로 손살 같이 지나간다. 가끔 들쥐도 나타나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구렁이는 나무 밑에 파놓은 땅굴에 들어가 햇볕을 피하고 있다. 그들은 밤이 되면 움직일 것이다.

전에는 팜 나무 숲 건너편, 한없이 펼쳐진 밀림으로부터 원숭이가 놀러왔었다. 그들은 나무위에 올라가 있다가 주인이 없는 틈을 타서 카터에 실린 먹을 것을 훔쳐가기도 하였다, 맬일 아침 운동을 하던 나는 가끔 빵이나 바나나를 던져주었었다. 그랬더니 매일 매일 그 나무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친숙하게 되지는 않았지만  멀리서라도 내가 보이면 킥킥거리면서 나무 위를 오르내리며 그들이 있다는 것을 나에게 알린다. 한동안 그러더니 골프장 측에서 무슨 조치를 취했는지 어느 날부터는 보이지기 않았다. 그들은 실상 팜나무 쪽에는 관심이 없고 팜 나무 밑에서 간식을 하는 사람들의 먹을 것에만 관심이 있었을 것인데 골프장 쯕에서 농약이라고 뿌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잘리어진 잎줄기들은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운반되었다, 전에는 초가지붕의 이엉으로 쓰였으나 지금은 초가집들이  줄어들자 분쇄되어 비료로 쓰인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트럭은 선홍색 열매덩어리를 가득 실고 정유공장으로 향한다. 거기에서 여러 가지 기름으로 분해 정제 되어 식용유로 공급된다. 찌꺼기와 알갱이의 껍질에서 짜낸 마지막 처리물은 자동차나  화력발전소의 연로가 되니 팜 나무는 실로 버릴 것이 없는 신의 선물이 아닌가 싶다. 물론 아름드리 나무기둥은 목제로도 손색이 없다고 한다.      

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시나이 공항에서 쿠알라 룸푸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다보면 위는 하늘이요, 아래는 팜 나무숲이라! 들리는 말로는 말레이시아의 박정희라고 불리는 마하티르 전 수상이 재직시절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본받아 황무지처럼 버려진 밀림을 과감히 정리하여 개간지를 만들고 여기에 온통 팜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경사진 곳에는 모두 다단계 단지를 만들어 빈틈이 없이 팜 나무 수(繡)를 놓으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걸작이 되었단다.      
그 후 중국이나 싱가포르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 기업들도 자국 또는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에 엄청나게팜 농장 투자를 한 것만 보아도 팜 나무의 가치는 보기보다 훨씬 높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팜 나무의 수명은 한 20년 정도란다, 20년이 지나면 그 곳은 몇년 동안 객토작업을 하여야만 다시 조림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골프장 건설주는 이런 곳에 골프장과 골프텔을 지어 국가 주택 사업에 동참함과 동시 조경은 팜나무로 하니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태양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10시-11에는 골프장 일을 하던 인부들이 아침 겸 점심을 먹으러 팜 나무 그늘로 몰려든다. 골프장의 페어웨이가 두 줄이나 보이는 언덕배기에   몇 개의 바위도 있는 제법 널따란 동산이 형성된 곳이다. 인도 여인들, 방글라데시 충년 남자들 그리고 인도네시아 청년들 모두가 외국인들인 그들은 돗자리를 깔아놓고 앉거나 누워서 아침 노동의 피곤을 달래며 담소를 즐긴다. 한입거리 음식은 눈 깜박할 사이에 먹어치운 뒤다. 나무 위에서 다람쥐 한 마리가 기회를 엿보지만 무엇 하나 입맛 다실 것은 없다. 

“미안하다. 다람쥐야, 우리 사람들은 팜 나무처럼 몸과 마음이 넉넉지 못하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