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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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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14 회
2011-08-06 오전 9:53 조회 3770추천 3   프린트스크랩
▲ 알 수 없는 진실

                                                           14


  그분은 나의 깊은 고민은 신경도 안 쓰는 듯 이미 다른 세계로 날아가 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그분의 뒤를 쫓아야 했다. 그런 식으로 그분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다가는 어느 순간 다리가 풀려 자빠지면서 그분의 엉덩이에 코를 들이박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나의 하와를 잃어버리고 죽고 싶었을 만큼 방황한 나로서는 사탄이 실체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사람의 어두운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결론이 더 나았다. 차라리 내 자신이 사탄이었다면 맘껏 저주하고 혐오할 대상이 생긴 셈이니 희망적이었다.

  그분은 예수가 여호와를 쓰레기 취급했다는 초유의 발언을 한 곳에서 까마득히 먼 곳까지 도달해 있었다. 과연 그분은 전지전능하며 무소부재한 존재인 것 같았다.

  “한편 지구의 동편에서는 신의 이름을 취하게 될 한 사람이 나타났어. 그는 싯다르타라는 아명을 석가모니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는데, 그는 자신이 마침내 부처라는 이름까지 얻게 될 것을 알았어. 그는 예수가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이다.’ ‘나는 참 감람나무다.’ ‘내게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나온다.’ 하는 표현들로 자존의식을 드러내기에 앞서 동방에서 이미 본받을 만한 태도를 보였지.

  신의 이름을 버리고 사람의 이름을 취한 예수와 달리 석가모니는 사람의 이름을 버리고 신의 이름을 취함으로 해서 세상을 이롭게 했어. 지금 이 시점에서 나의 아들이 여호와로서 활약하였다가 동방으로 가서 석가모니로 활약하였던 것인지, 아니면 한 사람의 의인을 따로 양육하였던 것인지를 따지는 일은 불필요한 일이야. 히브리인들이 암흑기를 겪던 시기에 나의 아들은 이미 여호와라는 이름을 버렸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임을 알아야 해.

  석가모니는 ‘여래(如來)’라는 표현으로서 자존의식을 나타냈어. 여래란 ‘내가 왔다.’라는 뜻이지.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삶의 태도야. 자존의식의 절정이라 할 수 있지. 그가 살았던 동시대의 사람들은 이미 부처라는 신적 존재의 가능성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 그들은 사람들이 누구나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백성들이었어. 그렇지만 서편 하늘 너머의 먼 곳에 사는 히브리인들보다 더 영적이었던 그곳의 사람들은 ‘셈’이라고 하는 공통의 조상 이전의 기록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리의 언저리에서만 맴돌고 있었던 거야.

  석가모니는 ‘아라한의 도’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이라는 자존의식의 표상을 세상에 제시하고 부처라는 이름을 취했어. 그리고 그는 많은 사람들을 열등의식으로부터 구원하고, 부처라는 이름의 자존의식을 취할 수 있도록 인도하였다네.

  한편 나의 아들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린 진리를 전파하던 사람들은 갈수록 시야가 좁아지더니 ‘종교’로서의 ‘형태’에 집착하기 시작했어. 좀처럼 쓰이는 표현은 아니지만, 그들은 하나 같이 ‘교조주의’라는 함정에 빠졌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겠군.

  사실 예수의 전파자들이 고귀한 것을 발견한 후, 고귀함을 사랑하여 벌인 일련의 해프닝들을 지적하고 비판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네. 그렇지만 이 부분을 지적하지 않으면, 조로아스터의 시대와 석가모니의 시대와 공자의 시대가 갖는 고귀한 의미를 설명할 수가 없게 돼. 다시 말해서 동아시아에 발생한 공자와 맹자와 같은 고귀한 영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중앙아시아에서 발생한 석가모니의 고귀한 영을 악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는, 궁극적으로 나의 존재를 부정하고 나의 영을 모욕하는 태도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야.

  만일 예수의 추종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석가모니와 공자가 악한 영이라면, 그들은 어째서 바알 신상과 아세라 신상 앞에서 혼음하는 것과 같은 멸망의 자녀들을 동방에서도 낳으려 하지 않았단 말인가. 여호와의 백성들이 종교적 형식에 갇혀서 열등의식이 심화된 가운데 멸망에 이르렀음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 역시 멸망과 회복을 반복하였던 사실을 결코 아름답게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지.”



  나는 자꾸만 가슴이 뛰려고 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분이 설명하는 세계관은 말이 존재를 규명한다는 이치에 맞게 그분을 그분답게 하고 있었다. 

  “데이비드. 석가모니와 공자의 추종자들이 자꾸만 가시적인 신상을 만들고 절하고 싶어 했던 잘못을 꾸짖기를 원하는 예수의 추종자들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에 인색하기만 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게. 이 또한 열등의식에서 비롯된 행동이며, ‘네 형제의 눈의 티를 빼려하기 전에 먼저 네 눈의 들보를 빼어라.’고 쓰인 기록을 무위로 만드는 태도야.

  영적으로 아둔한 자들은 그들의 입술에서 쉽게 나오는 말이 나와 나의 영을 얼마나 모욕적으로 욕보이는지 알지 못해. 최소한 그들이 성모상과 십자가 앞에서 혼음과 난교를 벌이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는 귀한 영을 소유하고 있다면, 불상과 신패 앞에서 혼음과 난교를 벌이지 않을 수 있는 이방인들의 영도 고귀한 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옳다는 것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

  무신론자였던 나조차도 부끄러워질 만큼 날카로운 질책이었다. 그러나 오직 예수라는 이름을 마음속에 받아들이는 일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마음을 열고 그분의 말씀에 공감을 표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누구보다도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들이었다. 자신들이 발견한 진리의 잣대가 너무나 자랑스러워서 오직 그 잣대만 가지고 세상을 전부 재단하려 하는 그들의 모습은 마이다스를 연상케 했다.

  믿음이라는 것은 양날을 지닌 검과 같았다. 불신자로서 살아온 나의 변명이며 고집일 테지만, 아무도 믿음에 대해서 도전하지 않았다는 게 신기했다. 믿는다는 것. 그것은 자신이 판단할 수 있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따르는 일이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세상의 종교가 요구하는 믿음은 늘 그 이상이었다.

  어느 종교나 과거에 신화와 같은 사실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믿어야 한다고 했다. 또 신화가 만들어지던 당시에 사람들이 믿었던 것 같은 믿음을 지금도 보여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막상 신을 만나고 나니 모든 게 거꾸로 되어 있었음을 알 것 같았다.



  나는 신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 속에 갇혀서 제멋대로 굴다가 삶을 망쳐 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비슷한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운이 좋게도 신을 만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신을 믿는 것은 당연했다.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만일 내가 지금 세상으로 달려가서 나의 신을 만난 일을 알리고 새로운 진리를 담은 종교를 포교한다고 할 때, 내 말을 듣고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의 차이가 무어란 말인가.

  그들의 구원 여부가 마스터 조라는 인물이 나타나서 신과 바둑을 두었다는 사건을 믿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게 된다는 건 그야말로 우스운 일이었다.

  나의 그분이란 한때는 우연의 신이었다가 디지털의 신으로서 찾아와 준 믿기지 않는 존재였다. 아마 네트워크 게임이나 좋아하고 트위터에서 뉴스를 찾는 요즘의 사람들이라면, 누군가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람을 만났다고 고백하는 것보다 LED 전광판에 신의 말씀이 몇 시간 째 나타났다고 고백하는 쪽을 더 신뢰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구원을 논할 때 그들이 내 경험을 믿느냐 마느냐에 따라 나뉜다고 한다면 그건 충분히 모욕적이었다.

  결국 내가 어떠한 사명감에 사로잡혀 그분의 존재함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면, 나 역시 모든 종교가 걸어왔던 길을 따라 믿음을 강조하는 일 밖에는 방법이 없을 게 분명했다.

  살고 싶으면 믿어라. 유대인 박물관의 전광 안내판에 나타났던 신을 믿지 않으면 죽는다. 어쩌면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 그분이 꼭 집어서 그렇게 말씀하지는 않았지만, 그분은 악을 미워하시는 분이 틀림없으므로 지옥은 준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지금까지의 다른 신들은 버리고 최고의 높으신 디지털의 신을 믿어야 한다. 그분은 별과 별의 인력과 사람과 사람의 관념 사이에 존재하는 작용과 반작용이며, 질서이자 수학적 존재다. 따라서 가장 높은 신이다. 이제부터는 그분에게 예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은 나의 증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 나는 사람들이 그분을 믿게끔 하는 일을 더 열심히 하기 위해 진보해 나갈 것이었다.

  믿는 자들이여. 가끔은 헌금을 내게 가져와도 좋다. 내가 그분의 말씀을 온 세상에 증거 하기 위해서는 출력이 높은 리무진과 헬기 같은 것들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 가급적 헌금을 많이 내는 게 좋다. 아마 그분께선 많은 헌금을 낸 사람을 특별히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내게 제일 처음 찾아와 말씀을 전해 들었던 나의 제자들을 따르고 충성을 보여야 한다. 그들이 세상에 나가 디지털 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회당과 교회를 건설하는 일을 벌일 땐 무조건 도와야 한다. 왜냐하면 디지털의 신께선 그 건물 안에 거하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종교라는 형식 자체는 필연적으로 타락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유대교가 타락한 뒤 유대인들이 멸망하게 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여호와는 고약한 존재가 분명했다.

  중요한 사실은 믿음을 가지고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믿음은 다만 열등의식을 떠나 자존의식으로 옮겨 갈 수 있는 최초의 좁은 문일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 좁은 문을 열었을 때 그 뒤에 천국이 곧바로 등장한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무당과 미신을 믿어 재물을 빼앗기고, 신접행위 따위의 사술에나 몰입하여 마음의 안정보다는 불안함에 사로잡히게 되는 우매함을 방지하기 위한 순기능이 있었다.

  종교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안겨주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어머니와 같은 포용력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포용력이 종교들 사이에서는 발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모든 종교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각기 다른 믿음의 전통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서로를 인정하게 된다는 것은 자신들의 전통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인 기적들과 그에 대한 믿음이 희소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인도의 다신교와 힌두교 안에서라면 해소가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비롯된 유일신교에서 파생된 종교들에게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소위 영적이라는 것의 낮은 단계에서는 믿음보다 불신이 보다 귀한 가치였다. 스스로 눈으로 보고 들은 내용이 아닌 것을 무조건 믿는다는 것은 그 또한 열등의식의 상태였다. 물론 예수가 기적을 일으킨 것을 수도 없이 보고서도 물 위를 걷지 못하고 가라앉았던 베드로의 불신은 열등의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의외로 간단했다.

  내 눈으로 보고 들은 게 아니라면 말을 전달하는 자들을 의심해야 했다. 그리고 내가 직접 찾기 시작해서 얻어낸 결론은 마음에 받아들여 믿고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좋았다. 그때 비로소 자존의식의 세계에 첫발을 디딜 수 있는 것이었다. 

  믿어 버리는 상태보다 의심하는 상태가 더 자존의식에 가깝다는 건 생각보다 의미심장했다. 그렇다면 문명화가 가속되는 가운데 종교를 갖지 않는 자들이 종교를 가진 자들보다 더 많아지고 있는 현상은 신의 입장에서 낙담할 만한 상태가 아닐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의심을 할 줄 알고 분석할 줄 아는 눈을 지닌 가운데 믿는 것은 고귀함에 닿아 있었다. 믿음의 가치는 결코 값싼 취향과 만족의 그릇에 담길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분이 언어와 대화와 영이 동의어라고 한 말이 지니는 힘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언어는 정보와 소식과 복음과 같은 것들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었다. 대화는 정보가 되었든 소식이 되었든 복음이 되었든 그릇 안에 담긴 불순물들을 걸러내는 과정이며 역동성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보와 소식과 복음 중에 정말로 복된 소식만 남고 진리를 얻게 된다면, 그것은 영의 밀도를 높이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었다.

  그것은 변증법이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학문이나, 종교의 원리나, 영이라고 할 만한 내면세계의 밀도를 높이는 일에 있어서는 대동소이했다.

  나는 여러 가지 내적인 갈등이 점차 정리되어지는 상태를 느꼈다. 그것은 그분이 내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아니면 그분을 구성하는 질서의 원리가 자연스럽게 나에게 전이된 것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불신의 상태에서 벗어나 믿음의 상태로 변화되고 있었다. 어쩌면 내 안에 열등의식이 사라져가고 신을 닮은 존귀함이 회복되어 가는 중일지도 몰랐다.



  나는 신과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기도를 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자 어색함을 지울 수 없었다. 가다는 아까부터 말을 그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평안이 묻어나는 미소를 보여줄 수 있었다. 그녀는 마치 오랜 세월을 같이 산 여동생처럼 사랑스런 미소로 내게 화답했다. 그리고 곧 그분의 말을 내게 전해주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나와 내 아들은 우리를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추상적인가 하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네. 차라리 우리는 우리가 땅 위에서 행한 몇 가지 일들과 우리를 따르는 사람들의 행위를 본받기 원한다고 말하고 흉내라도 내려 애쓰는 이들이 있다면 신뢰할 만 할 거야.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내 아들이 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면서 나를 믿는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 가증스러운 입을 배꼽처럼 봉해버릴지도 모르겠어.

  나의 사랑하는 아들은 내가 창조한 세상의 모든 질서와, 나와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는 그 자신의 영과, 나를 닮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나의 영을 발견했을 게 분명해. 그리고 텅 빈 것처럼 보이는 우주에 무언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로’ 믿기 시작했을 거야. 따라서 나는 우리가 공유하는 것들에 대해서만 신뢰하는 일에 부끄러움이 없어.

  나의 아들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땅 위에 거할 때, 어째서 믿지 못하느냐고 꾸짖고 믿음을 강조하였던 것은 결코 신의 존재에 대한 믿는 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어. 그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열등의식을 꾸짖는 것이었으며, 열등의식이 낳은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마음을 꾸짖기를 원했던 거야.

  그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뜻은 믿음으로 인한 능력의 성취나 기도의 응답과 같은 것을 설명하려는 게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해. 그것은 작은 자존의식일지라도 스스로 그 중요성을 찾은 사람이라면 곧 우주와 연결되어진다는 놀라운 원리를 뜻하는 것이었어. 그리고 알다시피 우주는 곧 나이며, 그 속의 어느 구석에서 스스로 발생한 작은 자존의식은 나와 연결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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