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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인 사내는 영어가 서툴렀다. 그는 우리에게 무언가 대화를 시도하려고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그는 가다와 나에게 충분히 절망했고, 우리는 그에게 충분히 절망했다. 그러나 동양인 사내는 무언가 절실한 사연이라도 있는 듯 벤치 주변을 서성이며 유대인 박물관과 숲과 벤치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옆의 빈 벤치에 앉았다.

  가다와 나는 이제 더 이상 서로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가 공유하는 사건에 대한 해석에 큰 차이가 있음을 확인한 후였다. 그렇다면 이제 동양인 사내에게 기대를 걸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여전히 손에 들고 있는 폰을 자주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와 대화가 거의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가다의 경우 발음에 아랍권 사투리의 영향이 심하기는 했으나 나와 대화를 나누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특히 그녀는 암기력이 특별히 뛰어난지는 모르겠으나 많은 수의 단어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카이로 대학을 턱걸이로 입학했던 것으로 보아 우수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어학에는 일찍부터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정통 아랍어를 구사하는 과외선생에게서 중학생 때부터 영어를 배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과외선생도 가다에게서 이집트 구어체 아랍어 발음을 완전히 뿌리 뽑지는 못했다. 나는 가다와 대화중에 그녀가 말하는 고유명사를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동양인 사내의 영어 발음은 중국인 다음으로 최악이었다. 나는 그를 틀림없는 일본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우리들에게서 돌아설 때 고개를 숙여 인사하던 모습으로도 예상할 수 있었다. 중국인이나 한국인의 경우엔 상대의 나이가 적어보일 땐 그렇게까지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대화가 통하지 못할 만큼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말을 걸려했던 일을 사과하려는 듯한 그의 태도로 보아서도 그는 일본인일 게 틀림없었다.

  동양인 사내가 처음 가다와 나에게 다가와 했던 말은 ‘익스큐즈미’였다. 그리고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명사를 몇 번이고 반복하더니 계속 어딘가 가는 방법을 묻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어디를 가기를 원하는지 반복해서 물었다.

  그는 내 질문은 알아듣는 것 같았으나 그가 원하는 것은 어딘가로 가는 게 아니라는 듯 답답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돌아섰던 것이다. 

  나와 가다가 서로의 사연을 나누던 지난 두 시간 사이 유대인 박물관에선 간단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박물관 외벽에 LED 안내판을 다는 일이었다. 안내판은 가로형이 아닌 세로형이었다. 아마 박물관에 진열 중인 유물들이나 그림들을 최대 사이즈로 재생해서 홍보하기 위해선 세로형이 적합했을 것이었다.

  시공업자들은 사람 키 높이만한 크기의 대형 캔버스를 연상시키는 안내판을 2층 벽면에 고정시키는 일을 다 마친 듯했다. 그들은 소형 트럭에서 뻗었던 크레인을 접으면서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시공업자 세 사람은 모두 체크무늬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크레인 위에서 내려온 두 사람과 크레인을 조종하던 한 사람은 모이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는 중이었다. 그리고 세 사람은 뮤지엄 마일의 도로에 내려서서 자신들이 방금 설치한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들이 설치한 것은 5에비뉴의 82번가부터 105번가에 걸쳐 입주해 있는 9개의 문화원이 보유한 중에서 가장 최첨단의 시설물이었다. 그것은 비록 ‘LED 안내판’이라는 값싼 이름으로 불릴 테지만, 세 사람에게 있어서는 박물관 안에 있는 어떤 유물이나 미술작품 못지않을 만족을 안겨주는 작품일지도 몰랐다.

  그들이 흡족한 미소를 서로 교환하고 있는 사이 흰 정장 차림에 체구가 크고 붉은 얼굴빛을 한 사내가 건물 모퉁이를 돌아 나타났다. 50대 초반 정도의 나이에 검붉은 턱수염을 기른 그 사내는 안내판을 올려다 본 뒤 인부들의 수고를 치하하는 듯했다. 그리고 폰을 꺼내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는 2층 높이의 건물 벽면에 설치된 안내판을 주시하며 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바라보는 안내판에 불이 들어오는가 싶더니 화려한 그림이 수놓아지고 있었다.

  그림은 샤갈의 작품들이었다. ‘바이올린 연주자’와 ‘기도하고 있는 유대인’과 ‘서커스’와 같은 작품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크고 작은 캔버스에 그려졌을 그림들이 대형 캔버스를 연상시키는 LED 안내판에 균일한 크기로 재생되고 있었다. 만일 지금 보이고 있는 그림들이 박물관 안에 전시중이라면, 박물관장과 큐레이터는 섭외를 위해 많은 공을 들였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뮤지엄 마일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전광 안내판을 건물 외벽에 달 생각을 했던 게 이해될 만한 일이기도 했다.

  붉은 얼굴의 사내는 유대인 박물관을 운영하는 책임자인 듯싶었다. 어느 새 그의 곁에는 비서와 큐레이터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서 있었다. 그들은 LED 안내판에서 구현되는 이미지와 색체에 만족감을 드러내며 붉은 얼굴의 사내에게 공감을 구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들의 보스는 아직 이렇다 할 만족감을 표시하길 원하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는 다시 폰을 귀에 대고는 허공에 손을 들어 회전을 지시하는 듯한 동작을 해 보였다. 그러자 이번엔 안내판의 그림 이미지들이 박물관의 운영을 안내하는 문구들로 바뀌고 있었다.

  유대인 박물관의 개장시간은 요일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먼저 토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 45분까지였다. 그리고 목요일엔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 운영하는 것으로 나와 있었다. 안내판에는 친절하게도 휴관일에 대해서도 알리고 있었다. 새해 첫날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데이와 추수감사절 그리고 모든 주요 유대인 기념일에는 휴관하겠다는 문구가 차례대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한 가지 주목할 만 한 점은 그들이 관광객들이 몰리는 토요일에 문을 열기로 하고 금요일을 휴일로 정한 것이었다. 그것은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안식일을 위배하는 것이었다.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해질 때부터 토요일 저녁 해질 때까지였다. 나는 뉴욕에 있는 두 개의 유대인 박물관 중 센트럴파크 인근에 있는 박물관 관장이 진보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다른 부분에서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마음에 들었다.

  붉은 얼굴의 사내는 안내판의 시범운영에 있어서 아직도 만족을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다시 팔을 들어 허공에서 손끝을 회전하는 동작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건물 안의 사무실에서 컴퓨터로 조작을 하고 있는 담당자가 대응을 빨리 못하는 듯 화면에 변화가 없었다.

  붉은 얼굴의 사내는 그의 폰에 대고 뭔가 강조를 하며 빨리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나와 가다와 동양인 사내가 있는 곳까지 들릴 만큼 ‘예스’를 외쳤을 때는 LED 안내판을 주시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궁금증은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커져 있었다.

  마침내 등장한 새로운 이미지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지만, 그곳 유대인 박물관에는 어울려 보였다. 그것은 히브리어였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한 구절씩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내용은 히브리어로 쓰인 토라였다. 흔히 모세 5경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토라는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율법서였다.

  뻬레쉬트, 태초에 신께서 천지를 창조하였다고 하는 구절로부터 시작된 큼직한 히브리 문자는 신의 창세 과정 다섯째 날 요미의 내용을 거쳐 여섯째 날 하싯시의 내용으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뻬레쉬트는 ‘태초에’라는 의미로써 경전의 맨 첫 구절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히브리인들이 그들의 첫 번째 율법서인 창세기를 부르는 이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의 율법서는 그들이 신이 주신 문자라고 자랑하는 히브리 문자로 구현되어 뉴욕의 하늘 아래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붉은 얼굴의 사내는 비로소 만족했는지 마침내 귓가에 대고 있던 폰을 내리고 안내판 설치 업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그는 건물 모퉁이로 사라져버렸다. 두 명의 박물관 직원들도 자리를 떠나자 설치 업자들도 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크레인 트럭이 왼편으로 사라졌다. 곧 택시 한 대가 왼편에서 나타나 오른편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인적이 끊어졌다.

  눈앞의 거리는 갑자기 비어 버린 듯했다. 그곳은 공연이 끝난 빈 무대처럼 정적이 감돌았다. 하지만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아침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전광 안내판이었다. 정확하게는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토라의 구절들이었다.

  센트럴파크의 동쪽 숲에서 신의 말씀이라는 뻬레쉬트의 내용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에 걸려들고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동양인 사내의 표정을 살폈다.

  간단한 영어조차 모르던 그는 그 어려운 히브리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가 아무 것도 읽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은 초점을 잃은 듯 보였던 것이다.

  어쩌면 그는 아직도 무언가를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디가 아닌 무언가를 향해 가기를 원했던 그는 힘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이때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폰에서 메시지 수신음이 들렸고, 그곳에 모여 있는 세 사람은 일치된 집중력으로 그 폰을 바라보았다.

  동양인 사내는 메시지의 내용을 느린 동작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나와 가다는 주인의 손에 들린 고깃덩어리를 바라보는 개들처럼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동양인 사내가 우릴 돌아보더니 입을 여는 순간이 찾아왔다.

  “당신이....... 가....... 다죠? 당신은....... 데이비드?”

  역시 그들이었다. 동양인 사내는 그들의 메시지를 받고 이곳에 왔다는 게 분명해졌다. 그리고 이곳을 떠나려고 했던 내가 계속 머물기로 결정한 것은 옳은 판단이었는지도 몰랐다. 만일 사내가 정말로 방금 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것이라면, 그가 나와 가다처럼 자살 기도자일 가능성은 낮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드디어 기만적인 말장난을 그만두고 무언가 구체적인 행동이나 제시를 하려고 한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곳에 와 있는 사내는 영어를 못하지 않은가. 이 부분에서 나는 다시 얽힌 실타래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동양인 사내가 실마리를 찾아내거나 감추었던 속내를 드러내면서 서프라이즈라도 외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우리 이름을 묻고는 무언가 설명을 하려다가 그만두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버린 뒤 계속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조바심이 났다. 그렇지만 그럴 때일수록 여유를 갖는 게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정치부 기자로 일했던 5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동양인 사내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을 걸어보았다.

  “선생. 어느 나라 사람이시죠?”

  그는 만나고 헤어질 때 하는 인사말 다음으로 흔하게 나누는 질문인 나의 영어를 알아듣는 듯했다.

  “코리아.”

  그의 대답은 문장 만들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외국인답게 간결했다. 나는 아까 그가 일본인일 거라고 예측했던 게 빗나갔다는 사실에 실망을 느꼈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다. 나는 다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미국인이고, 이쪽은 이집트사람이죠.”

  그는 고개를 크게 끄덕임으로 해서 우리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사이임을 시인하는 듯했다. 그러나 아까 겪었던 표현의 한계에서 비롯될 수 있는 절망감이 생각난 듯, 그는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고 다시 고개를 돌려 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서로에게서 시선을 거둔 우리는 두 개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유대인 박물관에 새로 설치된 안내판이나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쯤 맨해튼의 어느 호텔방에 앉아서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었어야 할 사람이었다. 이런 식으로 귀중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만 골라서 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버리고 솔직하게 말을 건네 보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저기 보이는 건 토라입니다. 지금 뻬레쉬트가 진행중인데,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장면이 나오고 있네요. 아참. 바이블이라고 하면 이해가 쉽겠네요. 알아듣겠어요? 바이블이란 말?”

  “아! 바이블!”

  사내가 유대인 박물관의 LED 안내판을 가리키며 말하자 나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래요. 저건 바이블의 제네시스 부분이에요. 하지만 지금 히브리어로 나오고 있죠. 저긴 유대인 박물관이거든요. 아마도 박물관 관장이 바뀌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는 뮤지엄 마일 거리에서 저런 전광판을 갑자기 설치할 생각은 못 했겠죠. 지금은 신이 뱀을 저주하는 장면이 나오는군요. 사실 난 유대인입니다. 어릴 때는 토라를 전부 외워야 했죠. 하지만 지금은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했고, 아무 종교도 없어요. 아마도 나 같은 놈은 신도 반기지 않을 테니 서로 잘 된 셈이죠.”

  나는 동양인 사내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눈은 주로 가다에게 향해 있었다. 그건 신의 존재를 강하게 믿기 시작하는 무슬림 가다에게 던지는 농담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가다의 표정이 이상했다. 가다는 줄곧 북 쪽 벤치에 앉은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의 표정이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나는 가다의 시선을 쫓아 동양인 사내 쪽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는 환호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는 내가 말한 내용 중 한 단어에 강한 집착을 보이며 외쳤다.

  “신! 그래요. 신!”

  이제 2대 1이 된 셈이었다. 동양인 사내와 가다는 신이라는 단어를 공유하며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나는 변비로 고생하는 만성질환자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공공장소에서, 그것도 사람이 둘씩이나 있는 곳에서 그 단어를 더러운 단어들과 뒤섞어서 배설해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포기하였던 영어와 대화를 다시 시도하기 위해 이미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신을 만났어요. 인터넷. 나는 여기 왔어요. 그를 만나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는 인터넷에서 신과 조우를 했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이라는 상대의 지시에 이끌려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았다.

  나는 다시 그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자살 예방 프로그램을 휴대전화망 외에 인터넷에서도 펼칠 수 있는 활동은 무궁무진할 게 분명했다. 왜 그 생각을 미처 못 했을까. 하지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제 끝이었다. 어서 이곳을 떠나 적당한 호텔방이나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신을 믿어요?”

  동양인 사내와 작별 인사를 나누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 그는 믿는다고 대답할 테고, 그럼 나는 나의 쓴 웃음을 보여주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 다음 일어나서 그와 가다에게 ‘안녕’이라는 말을 남기고 바로 떠나면 될 일이었다.

  이제 모든 게 완벽해졌다. 그가 신을 믿는다고 대답만 해오면 이 모든 해프닝과 헛된 대화는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아뇨. 난 신을 믿지 않아요!”

  너무 놀라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은 나뿐만 아니었다. 가다도 멍하니 사내의 얼굴만 바라보는 중이었다.

  나는 옆의 벤치에 앉은 사내가 강한 부정과 함께 신을 믿지 않는다고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하는 얼굴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혼란스러움을 정리하기 위해 그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까는 신과 만났다고 했잖아요. 인터넷에서 말이죠. 아무튼 그 말은 신을 믿는다고 하는 소린 줄 알았는데요.”

  그는 내가 갑자기 빠르게 말을 건네자 당황하는 듯하다가 잠시 후에는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그가 말했던 처음의 설명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나는 신을 만났어요. 그 신은 아이디입니다. 오케이? 신이라는 아이디를 만났어요. 인터넷에서요.”

  나는 기뻤다. 그리고 가다를 돌아보았다. 그건 배신자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고 난 뒤 적의 얼굴을 살피는 사람의 행동과 다르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가다도 쉽게 물러설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녀는 나와 옆의 사내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뭐가 다르죠? 내가 신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은 것과 그가 신으로부터 이메일을 수신했다고 해서 다를 건 없잖아요.”

  그건 가다의 말이 맞았다. 아까 그가 인터넷에서 신을 만났다고 한 말이나 그가 신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상대를 만났다고 하는 말이나 큰 차이는 없었다. 다만 우리는 그가 이제 무신론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메일이나 메시지를 보내온 상대가 신이었는지 아니면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증명해낸단 말인가. 나는 동양인 사내와 계속 대화를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

  영어 대화가 어렵지 않았던 가다와도 신의 존재유무를 증명하는 데에는 금세 한계가 드러났다. 그리고 누구라 할지라도 종교문제를 가지고 명확한 해답을 서로에게서 찾은 경우는 드문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가다가 동양인 사내에게 종이가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보여줄 생각을 떠올린 건 노아의 후손들이 바벨탑을 쌓다가 저주를 받아 언어가 혼잡해지게 된 내용이 박물관의 안내판에서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유대인 박물관에선 아무래도 히브리어로 된 토라를 안내판에 보이도록 하는 일을 시험운행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 듯했다. 

  “선생님. 혹시 이 물건들이 무얼 의미하는지 아시겠어요?”

  가다는 동양인 사내를 향해 종이 가방의 주둥이를 한껏 벌려서 보여주고 있었다. 처음엔 그도 두꺼운 종이 말린 것과 자와 사인펜을 먼저 발견하고 시큰둥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의 얼굴은 외국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난 듯 밝아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있는 벤치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가다가 들고 있는 종이가방을 빼앗다시피 거기에 손을 가져다 대며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그가 웃는 얼굴로 가다의 얼굴을 돌아보자 가다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러자 그는 마른 손을 내밀어 종이가방 안으로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는 가다가 지난 밤 날이 새도록 강가에서 주웠던 조약돌들을 손으로 물을 뜨는 듯한 동작으로 집어 들고 있었다.

  “내가 찾던 게 이거요!”

  그가 검은 색과 흰 색이 뒤섞여 있는 조약돌들을 내게 내밀며 그렇게 말할 때까지도 나는 그의 말뜻을 여전히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그가 어딘가로 가려는 게 아니라 무언가에게 가려 한다고 해석했던 지점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자 그는 종이가방 안의 물건들을 조약돌만 빼고 모두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마치 그것들이 처음부터 자기 것인 양 능숙하게 다루었다.

  먼저 그는 쓰다 버린 노끈 조각으로 묶어놓은 두꺼운 종이를 폈다. 그리고 그것을 벤치 위에 놓고 자와 사인펜으로 반복해서 선을 긋기 시작했다. 방석만한 크기의 종이 위엔 어느 새 가로와 세로가 교차한 선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선의 수는 가로와 세로 각각 19줄 씩이었다. 그런데 그가 다 완성했다는 듯 사인펜과 자를 내려놓고 미소 짓는 앞에서 나는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히고 있는 중이었다.

  먼저 종이를 꽉 채울 만한 크기의 사각형이나 그 안에 가로와 세로가 교차하는 열일곱 줄 씩의 선이 들어가게 된 형태에 대해서는 대수로울 게 없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신경을 거슬리는 게 있었는데, 그건 바로 361이라는 숫자였다. 즉 19 곱하기 19는 361이었는데, 현재 동양인 사내가 그려놓은 격자무늬의 교차점 수와 같았다. 그리고 361은 가다가 지난밤에 강가에서 주워 온 조약돌의 숫자와 같았다. 그녀는 흰 돌과 검은 돌 각각 150개 이상을 주울 것을 지시 받았는데, 만족할 만큼 많이 주운 게 361개까지였다.

  내가 다시금 우연의 신께 박수를 보내고 있을 무렵 동양인 사내는 종이가방 안에 들어 있던 조약돌들을 모두 벤치 위에 쏟고는 검은 색 돌과 흰 색 돌을 분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격자무늬 위에서 검은 돌들과 흰 돌들이 거의 다 나뉘었을 무렵, 나는 비로소 가다가 준비해 온 것들이 무엇을 위한 것들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 입가에도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동아시아에서 유행하는 보드게임이었다. 아까 동양인 사내가 우리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몇 번이고 반복한 말은 바로 그 게임을 부르는 한국식 이름이었다. 한국인들은 그것을 ‘바둑’이라고 불렀는데, 주변 다른 나라에서는 그 이름이 각각 달랐다. 중국인들은 그것을 ‘위기’라고 불렀고 일본인들은 그것을 ‘고’라고 불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앞에 있는 사내가 어디론가 가기를 원한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그가 그 게임의 일본식 이름을 말하고 있었던 걸 모르고, 영어의 동사 ‘Go’로 오해했던 때문이었다. 동양인 사내가 자신의 언어인 ‘바둑’이라는 표현을 포기하고 ‘고’라는 표현을 사용하려 했던 건 일본인들이 그 게임의 룰을 현대화하고 용어 정립을 함으로 해서 세계화에 기여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보스턴 대학 시절 클럽 하우스 휴게실에서 바둑을 즐기는 친구들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들 근처에서 체스를 두곤 했던 것이다. 나와 친한 친구들 중에는 바둑을 즐기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 게임을 직접 해 볼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지만, 나는 그 게임을 배워둘 요량으로 누군가 다른 이에게 룰을 가르쳐주거나 할 땐 곁에 서서 지켜보곤 했다. 그리고 그 게임이 진행되어가는 내용을 구경하기도 했고, 게임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귀담아 듣기도 했던 게 기억나기 시작했다.

  바둑은 보드게임의 신이었다. 이 세상의 어떤 지능형 게임도 바둑을 능가할 순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능가한다는 표현은 물론 게임의 난이도와 그에 따라 수반되는 긴장감을 의미했다. 가령 체스에서 슈퍼컴퓨터가 인간을 이긴 건 이미 오래된 일이지만 이 게임에서 슈퍼컴퓨터가 인간을 이기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게 사람들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바둑은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고 몇 분도 못 가서 게임을 즐긴 순 있었지만, 마스터의 수준까지 오르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 절대시간은 체스나 포커와 같은 다른 마인드 스포츠와 비교할 수 없는 분량이었다.

  내가 알고 있기로 동아시아에서는 수많은 바둑과 관련한 대회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으며, 수십만 달러에 달하는 상금이 걸려 있다고 했다. 그리고 많은 수의 아이들이 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어려서부터 이 보드게임의 선수가 되기 위해 훈련생의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바둑의 룰은 정말 단순했다. 두 명의 플레이어는 각각 흰 돌과 검은 돌을 나누어 갖고 번갈아가며 돌을 선의 교차점에 놓으면 게임은 진행될 수 있었다. 그리고 보드 위에서 흑과 백의 돌들이 각각 분할된 영역을 결정지어 누가 더 많은 영역을 차지했는가에 따라 승부가 결정지어졌다.

  그런데 이처럼 단순한 게임이 마인드 스포츠 중 가장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361개의 교차점 위에서 펼쳐지는 검은 돌과 흰 돌이 뒤엉켜 만들어 내는 그림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상대편이 학의 날개를 닮은 형태를 그리고 있는데 나는 참새의 날개를 닮은 형태를 그리려 했다면 이길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내가 날개를 닮은 상대의 영역 안에다가 풍뎅이를 닮은 작은 영역을 만들려고 할 때, 상대의 방해를 막아내고 그림을 완성할 수 있으면 상대는 큰 손실을 입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 손실은 내게로 돌아오게 되는 게 이 게임이 지니고 있는 작용과 반작용의 구조였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며 자신을 ‘마스터 조’라고 소개했다. 내가 잠깐 사이에 예상했던 대로 그는 그 게임을 플레이 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의외인 것은 그가 나와 악수하던 손을 풀고 내게 게임을 한 번 해보자는 듯 다가오라는 손짓을 한 사실이었다. 이 때 마스터 조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 동양인 사내의 표정도 그리 즐거움을 기대하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초대를 받은 나로서도 난감한 일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내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 일을 해내기 위해선 정신을 오직 한 생각으로만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철없는 젊은 여자와 외국인과 소통불능의 대화를 이어가다 못해 이젠 보드게임이나 해야 한다니. 그건 내게 주어진 아이러니도 난센스도 아니었다. 차라리 나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비아냥거림과 닮아 있는 상황이라는 표현이 적당할지도 몰랐다.

  마스터 조는 여전히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내가 가까이 다가와서 그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렇지만 나의 마인드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사실 내가 게임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굴욕을 당하고 싶지 않다거나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두려워 하다기 보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마스터 조와 플레이를 할 때 도대체 얼마의 핸디를 적용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문제였다.

  보스턴 대학의 클럽 하우스 휴게실에서 본 기억에 의하면 고수와 하수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핸디의 차이는 상당했다. 즉 어떤 이는 검은 돌을 두 개나 세 개 정도를 먼저 놓은 뒤 게임을 시작하면 되었고, 또 어떤 이는 검은 돌을 열 개 이상을 먼저 깔아놓은 뒤에 게임을 시작해도 아예 상대가 되질 않았다. 그런데 지금 앞에 있는 한국인은 자신을 스스로 마스터라고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만일 그가 직업적으로 바둑을 플레이 하는 사람이거나 타이틀 보유자이기라도 한다면, 그는 그랜드 마스터일 것이었다. 그렇다면 바둑을 플레이 해 본 적이 없는 내가 도대체 핸디를 몇 점이나 적용해야 하는 걸까.

  나는 보드 위에 수십 개의 검은 돌을 먼저 올려놓고서 최선을 다해 플레이를 하는 일은 불가능하리라고 생각됐다. 그러한 일은 그 자체로 난센스였으며, 그에게나 나에게 있어서 아무런 유익이 없는 일이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 같은 외국인이 그들의 게임을 관심 있어 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마스터 조가 내게 악수를 청한 뒤 플레이를 권할 때부터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던 가다에게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어깨라도 으쓱해 보일 생각으로 돌아보았다. 그런데 나와 마스터 조가 마주 앉은 중간 지점에서 보드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성모마리아의 석상이 피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처음 발견한 사람처럼 놀람과 기쁨이 뒤섞여 있었다.

  “가다. 괜찮아요?”

  내가 걱정스럽게 묻자 가다는 아주 느린 속도로 입을 떼더니 소리를 냈다.

  “네.”

  나와 마스터 조는 가다를 걱정스럽게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이때 그녀는 여전히 보드만을 주시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난 괜찮아요. 그리고 이제 알 것 같아요.”

  가다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리고 눈물의 열매가 커질수록 입술이 묘사하고 있는 기쁨의 표현도 커졌다. 가다는 사내아이처럼 팔뚝을 들어 눈물을 훔쳐냈다. 그녀는 다시 시선을 보드 위로 고정시킨 채 나와 마스터 조에게 말했다.

  “이 게임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내가 해보아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마스터 조를 돌아보며 말했다.

  “괜찮겠어요?”

  마스터 조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는 가다가 룰조차 모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평범한 마스터가 아닌 그랜드 마스터라면 내가 아닌 가다와 플레이를 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어차피 그에게는 해프닝의 연장이었다. 만일 그가 세계 랭킹에 이름이 올라 있는 플레이어라면 구겨진 종이 위에 사인펜으로 선을 긋고 조약돌을 가지고 플레이를 하는 자체가 해프닝일 게 분명했다.

  내가 비켜준 자리에 가다가 앉았고, 나는 가다의 뒤로 여유 있는 공간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어떻게 게임을 시작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듯 계속 마주한 채 빈 보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지않아 가다가 먼저 돌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검은 돌 하나를 보드 위에 내려놓고 상대의 응수를 기다리는 태도를 취했다.

  역시 그녀는 게임의 룰과 매너를 모르고 있었다. 아마 그 게임을 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고수와 게임을 하기 위해선 하수는 반드시 먼저 돌을 깔아 놓아야 하는 게 상식이었다. 아니, 그건 원칙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왜냐하면 핸디를 적용하지 않은 하수와 함께 승부에 임하는 고수가 견뎌야 할 지루함은 상상할 수도 없이 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때 가다의 어깨 너머로 마스터 조의 표정을 살피던 나는 놀라고 말았다. 그는 방금 가다가 올려놓은 첫 수를 응시하며 얼굴색이 변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단지 상대방은 빈 보드 위에 검은 돌 하나를 올려놓았을 뿐이었다. 보드 위에 있는 361개의 교차점 중에서 어느 곳에 첫 번째 돌을 놓더라도 그렇게까지 긴장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마스터 조는 가다가 돌을 놓은 어떤 특별한 위치에 대해서 남다른 기억을 지니고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고개를 빼고 가다의 어깨 너머로 그녀가 돌을 놓은 정확한 위치를 확인해 보았다.

  검은 돌 하나는 가다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보드 오른 쪽 테두리에서 네 칸 위, 보드 아래 쪽 테두리에서 다섯 칸 위의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곳은 나쁜 위치는 아니었다.

  내가 대학 시절 클럽 하우스에서 구경했던 게임들은 보통 그렇게 시작되었다. 대개는 네 번째 줄과 다섯 번째 줄이 아닌, 네 번째 줄과 네 번째 줄이 교차하는 지점에 돌을 놓는 것으로 시작되곤 했다. 아니면 네 번째 줄과 세 번째 줄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시작하는 경우도 많았다.

  방금 가다가 돌을 올려놓은 곳은 나로서는 한 번도 그 위치에 놓는 걸 본 적이 없지만, 그렇게 나쁜 곳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정말 나쁜 곳은 처음부터 보드 테두리 쪽에 돌을 놓거나 보드 한 가운데에다 돌을 놓는 일이었다.

  마스터 조가 긴장하고 있는 이유는 가다가 놓은 첫수가 익숙한 시도였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는 인터넷에서 신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상대와 게임을 가졌다고 했다. 그리고 그 상대방을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뉴욕까지 날아왔던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스터 조가 긴장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우연의 신을 만났던 것이다. 가다가 방금 자신의 돌을 올려놓은 곳은 그동안 마스터 조를 괴롭혔던 미지의 상대가 즐겨 이용하던 위치였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가 첫수부터 긴장할 만도 했다.

  마스터 조는 냉정한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도 나처럼 우연의 신을 의식했을 것이었다. 그는 흰 돌 하나를 검지와 장지 사이에 끼워서 집어 들었다. 그런 식으로 돌을 집어 드는 동작은 내가 클럽 하우스에서 본 고수들의 모습과 같았다.

  마침내 마스터 조는 가다가 놓은 첫수에 대한 대응으로 자신이 정한 위치에 돌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