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숨어사는 진실

우리는 시대 시대를 장악했던 정치가나 독재자들에 의해

다스려먹기 좋은 백성이 되기 위한 어리석음의 훈련을 받아왔고

우매한 집단을 선호하는 독재자들은 호도된 사실의 주입을 위해

사이비 학자와 선동가들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 놓은 역사의 단면만을 보도록 강요 한다

그 길들임에 익숙해 어쩌면 우리는 왜곡된 역사의 빛만을 쏘이고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36년 일제의 압제에 의해 묶여있던 한 민족이 풀려난 축제의 날

1945년 8.15일 광복의 그날

라디오가 산삼만큼 귀했던 시절에 칙칙 거리는 단파 방송으로 퍼져 나갔던

발음 자체도 명료하지 않은 조서를 단조롭게 낭독한 밍밍한 콧소리와

잡음에 섞여 감춰졌던 처참한 심경에 히로히또의 목소리를

통쾌하게 들었던 사람은 얼마나 되며

해방의 기쁨과 환호가 한반도를 덮었다던 그날

팔이 떨어져 나가게 흔들었다는 태극기의 물결은 어느 거리거리를 쓸고 지났으며

온 백성이 목이 터져 라고 불렀다는 독립만세의 함성은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어느 마을 어느 골목을 가득 채우며 메아리치고 지나갔을까?

패망 했다고는 하나 육군 35만의 병력 ,해군 2만5천을 더한

37만5천의 일본군이 남북 조선에 무장한 채 그대로 주둔해 있었고

어린 아이 울음도 그치게 했었던 순사의 칼 끄는 소리도 그치지 않았고

악랄함으로 조선 ,중국 등 동아시아를 떨게 했던 일본헌병 등이 엄존하며

패전의 분통함을 풀 곳을 찾으며 눈이 시퍼렇게 빛나던 그때

목숨을 걸고 거리를 뛰어 다니며 가미가제와 옥쇄도 불사하는 잔인한 민족성을 지닌

일제의 포악한 채찍과 총검 앞에서 독립 만세를 목이 터져라 부를 수 있었던

담양 큰 사람은 정녕 몇이나 되었을까?

떼 지어 터져 나왔어야할 만세소리와 벅찬 감격의 환호는 큰 숨도 내어 못 쉬고

엎드려 눈치를 보고 있던 평일과 다름없이 전차가 지나고 한산했던

종로통의 거리가 상징하듯 조선의 삼천리금수강산 위에 살던 모든 백성이

광복의 기쁨을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상상도 못하고 모르고 살아왔던 것처럼

통곡을 참아가며 일본 왕 히로히또가 항복방송을 하기 몇 시간 전

몽양 여운형과 엔도 류사쿠(遠藤柳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과의

조선의 행정권 이양에 대한 회담이 있었음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일본의 항복 결의를 통보하며 80만에 달하던 재한 일본인들의

안전한 귀국을 보장 받으려한 정무총감의 제의에 정치범과 경제범의 즉각 석방,

경성의 식량 3개월분 확보, 치안유지와 건국사업의 불간섭 등을 골자로 한

5개 항목을 제시한 몽양의 조건이 받아 들여 회담이 쌍방 합의하에 성사되었음을 말이다

몽양은 그날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했고, 건준은 20여 일 후

조선 인민공화국(인공)을 만들어 조각을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며 지배자와 피지배자

당사자들 쌍방 간의 벌어졌던 모든 합의는 백일몽의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백지가 필요한 것처럼

지난 역사가 증명하듯 새로운 왕조의 시작은 전조의 그림자를 지우는 일부터 시작 된다

새 나라 새 정부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과거청산의 선행이 이루어져야만 했었다

하지만 해방 후 새로 건국 준비를 하던 신생 대한민국은

한 민족의 얼굴과 마음과 온 몸에 남아있던 일제가 남긴 때 묻은 친일파의

얼룩도 제대로 지우지 못하고 이름만 새 것으로 바꾸고 어정쩡한 출발을 해야 했다

오히려 짙게 남아 있던 얼룩들은 잘 정리된 무색의 출발을 저해하고

일제의 부역하던 모든 친일 세력들은 똘똘 뭉쳐 적반하장으로 
바둑이 무늬를 강요하며 새 나라 곳곳에 먹물먹인 바늘로 뜬 문신처럼
구석구석에 박혀 들어가 신생 대한민국의 존폐를 위협하며 도려내지 못하도록  
살 속 깊은 곳을 파고 숨어들어 살아남았다

일제의 압정 하에 시달리며 망국의 칼에 베여 상흔으로 마음 깊이 남아있던

한 민족의 지울 수 없는 아픔들은 종전 후 소련이 두만강을 넘어 한반도로 진격하자

한반도가 소련의 영향력에 들것을 염려한 미국이 임시정부수립 논의 자체를 무산시키고

미군이 진주 할 때까지 총독부와 경찰 조직 등을 그대로 유지하게 한

한반도에서의 기득권 확보를 우선으로 한 미국 정책과 건국 우선이라는 대의명분과

인적 자원 부족이라는 그럴싸한 이유를 앞세운 혼란의 포장으로 가려 덮여져 버렸다

해방 후 1945년 미 군정청이 치안을 위해 설립한 경찰 조직의 간부는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을 탄압하던 일제의 악질 고등계 형사 출신을 주축으로

절반이 넘는 53%,를 차지했고 하위직의 25%도 일본경찰 출신으로 이루어 졌다

새 틀을 짜던 국방의 간성으로 당시 선발한 60명의 장교 가운데 40명이

일본군 출신인 것을 감안하면 미군정 하에서 태동된 새 나라를 향한 걸음마는

완전한 과거청산이 결여된 해방이나 독립의 반 탈을 쓰고 비틀거려야 했다

해방이 된지 거의 반년이 가까운 1945년 9월9일까지

조선 총독부의 걸려있던 일장기가 말해주었듯이 민족이 염원하던 일제의 잔재 청산을
숙제로 남긴 자주적이지 못한 외세의 기대어 이루어졌던 광복은
가장 큰 민족 회한의 원인이 되어 슬픈 흔적의 씨앗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그 흔적 속 그림의 한 부분을 차지하며 나도 비루한 세월을 보냈다

박 헌영등과의 합작으로 일제의 잔재가 주축 이던 한민당 등의 우파에서는 빨갱이로

김일성을 앞세운 쏘련 공산당이 주도 하던 좌파에서는 퍼렁이로 몰려가면서도

몽양이 이루고자 했던 남북이 일체가 된 정부 수립은 끝내 이루어지 않았다

한국의 실패한 간디 몽양은 극우파 한 지근에 의해 살해당하며 그의 꿈은 막을 내렸고

같은 꿈을 꾸고 함께 살던 나와 명섭의 아비 尹 敬俊을 비롯한 몽양을 따랐던

모든 동지들도 민족 대화합의 단일정부 수립이라는 꿈을 접고 잠에서 억지로 깨어야 했다

곧 이어 두 동강난 한반도 반쪽의 정부 수립이 이루어졌고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인사들이 다수 참여했던 초대 국회에서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가 잠시 밝은 빛으로 떠돌았으나 그것도 잠시 종내는 정해진 수순에 의해

두리 뭉실 민족 대화합이란 봉합으로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이 나 버리고 말았다

또 하나의 기득권자 탄생을 우려한 미국이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백범이 이끌었던 상해 임시정부의 세력도 미국의 정책을 도외시한

민족자주 우선정책으로 비호 받지 못하는 세력으로 떠돌다

안 두희가 저지른 무도한 패악에 백범이 쓰러지고 난 후에

결국에는 몽양의 세력이 밟은 전철을 따라 백범이란 우두머리를 잃은

패전지졸(敗戰之卒)들은 잃어버린 꿈과 함께 일제를 건너온 뼈아픈 세월의 청산이나

새로운 세상의 그림을 그릴 종이나 붓 한 자루도 챙기지 못한

절통한 아픔만을 가슴에 가득 담고 지리멸렬하며 힘의 각축장에서 멀어져 흩어져 버렸다

떠나야 할 시기도 함께 동행 할 무리도 잃어버리고 순응하기 어려운

세월 계절의 찬바람 속에서 따듯했던 옛 기억의  둥지를 떠나지도 못하고
마냥 웅크리고 떨어대며 오지 않는 봄만을 원망하는 쾡 한 눈의 겨울제비처럼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지 못한 몽양이나 백범의 추종자였던 우리 모두는

친일파가 득세한 이 승만 정권의 흐린 그늘 아래서 빛을 갈구하다 말라 비틀어
서서히 시들어 가며 신음 소리도 제대로 내보지 못한 채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