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아픔 그리고 화려함

세월의 강가에 운명이란 조공(釣公)이 괴팍한 늙은이와 바둑을 비벼 던져 논 떡밥은

내 눈을 끌기에 충분했고 해인이라는 미끼는 거부 할 수없는 강렬한 유혹 이였다

물고기의 동정심을 구걸하지 않고 물고기를 다스리기 위해 낚시를 하는 조공(釣公)은

찌를 바라보며 낚시의 변수를 주는 입질에 실증을 느끼면 오래지 않아

해인 이라는 미끼에서 풍겨온 향기와 교태어린 몸짓으로 아가미를 꿰 뚤린

낚시 바늘에 아픔도 잊고 희희락락(喜喜樂樂) 행복에 젖어있는 나를

곧 뜰채로 들어 올려 선로 변환기가 곳곳에 설치된 레일 위를 달릴

나의 열차에 태워 이 궤도 저 궤도로 마음 내키는 대로 방향을 틀어가며

어리석은 나의 몸부림을 지켜보는 조롱을 시작할 것이다

가까운 친척도 이웃도 아닌 그저 한판의 바둑을 둔 인연뿐인 터라

선뜻 병실로 들어가기가 멋쩍어 문 앞에서 내가 머뭇거리자 그녀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유난히 아이처럼 부드럽던 그녀의 손길이 내 몸에 닿자 나는 작은 전율을 느끼며

진저리 쳐지는 내 몸의 떨림을 그녀가 느낄까봐 조바심치며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허허!

해인이가 좋은 친구를 만난 모양 이구나“

“맞아요!

치마 입히면 딱 맞는 그런 친구예요”

나는 그녀가 유치원 아이들이 옆에 서있던 친구의 손을 잡듯

스스럼없이 굴어대는 바람에 넉살 모자란 남자 친구처럼 보이며 끌려 들어가야 했다

쑥스럽긴 했지만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말수도 적고 붙임성이 별로 없는 성격 탓에 꾸벅 병문안에 인사치레만 하고

꾸어다 논 보리자루 모양새를 하고 거북해 하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몇 달간 보았던 근접하기 어렵게 괴팍해 보였던 선입견과는 달리

자상한 집안 어른처럼 영감이 그와 나의 공통 화제가 될

바둑을 들고 먼저 말을 건네 왔다

“지금 나이에 그 정도 수준의 바둑을 두자면 혼자 익힌 것은 아닐 테고

공부를 따로 할 기회라도 있었던 것 같은데 누구에게 배웠는지 알려 줄 수 있겠나?“

“특별히 따로 배운 적 은 없고 바둑을 즐겨하신 선친께서

어릴 때 바둑 동무를 삼아 주셔서 자연 익히게 됐습니다“

“선친 이라면..?”

“제가 중학교 입학 하던 해에 작고 하셨습니다

“어허! 공연한 것을 물었던가보이,,,”

“아닙니다 아시고 싶은것이 혹 있으시면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어제까지 미워하고 원망했던 설욕의 상대인 늙은이는 이제 내게 없다

그는 아름다운 그녀가 작은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내편에 서게 만들어야할 사람이다

조금이라도 그녀 곁에 더 머무르고 싶은 욕심은 영감과의 대화를 길게 늘이고 있다

“괜찮다면 자네 부친의 함자를 들을 수 있겠나?”

김인 이나 조 훈현 등의 일본 유학파가 주류를 이루며 대우가 격상된

당시의 바둑계와 달리 조 남철 國手조차 동네 길을 나서면 노름꾼이 지나간다고

아낙 들이 뒷등에서 수군거릴 정도로 바둑이 정립 되지 않던 시절을 함께 지내온

바둑 高手라 불리던 연배의 사람들은 알음알음으로 얕은 안면 정도나

하다못해 이름 자 정도는 알고 지내던 사이였던 것 같다

“성은 尹가에 공경敬자와 준걸俊자를 쓰셨습니다”

그가 세웠던 머리를 침대에 한참이나 눕혔다 다시 세우며 물어 왔다

“그렇다면 아버님께서 일본으로 공부를 하러 가신 적이 있던 분이신가?”

“어떻게?

혹 저희 아버님을 아시나요?“

잠시 그의 얼굴에 무언가 스쳐 간 것 같았지만 대답은 모르쇠 였다

“아!

아닐 새 일본에서 공부 하던 분들이 바둑을 배워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

내가 아는 분인가 해서 한번 알아 본 걸세“

잠시 후 피곤이 밀려와 잠을 청한다며 그가 눈을 감고 누워 버리자

잠시 더 앉아있던 그녀가 병실을 나섰고 아쉬운 내 마음도 함께 따라 나서야 했다

병원 앞에서 헤어지며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어 왔다

“우리 친구 할래!

내 이름은 해인 이라고 해 김 해인 “

“나는 명섭 이라고 해”

성별이 바뀐 것처럼 활달한 해인 이와 달리 수줍어 목줄이 빨갛게 되어

간신히 손을 내밀고 우물거리긴 했지만 해인 이는 그렇게 내 여자 친구가 되었다

잠시라도 그녀 곁에 있고 싶던 마음은 꼭 알아야 될 일도 없는

그의 작은 할아버지에 이름을 묻고 있었다

“네가 하듯이 알려주면 성은 朴氏로 다스릴 治에 착할善자를 쓰실 꺼야

또 만나!“

통통 뛰는 가벼운 김 의원 길 건너 은행 모퉁이를 돌아간 그녀의 모습이

은행 벽을 감싼 빨간 벽돌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자

하다못해 어디 빵집이라도 들려 얘기를 나누고 싶었던 내 작은 꿈은

고개를 숙이고 마음속으로 숨어 들어가 그 모습을 감추어야만 했다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을 두리번거리며 그녀가 전처럼

홀연히 나타나 주기를 기다렸지만 사흘이 넘도록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 내 손에 쥐었던 달콤함이 가득 들어있던 행복은

천년의 빙굴(氷窟)처럼 얼어가며 내 마음 반쪽을 한기에 떨게 했고

발을 굴러대며 보고 싶어 하는 그리움은 남은 반쪽을 용암처럼 끓게 만들어 대며

잠시도 쉬지 않고 교차 하며 나를 괴롭혀 왔다

예방접종도 없이 사랑이라는 열병에 걸려버린 내가

더욱 견딜 수 없던 것은 治善이란 영감을 작은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실마리 외에는

교복을 입지 않았던 그녀가 어느 여학교를 다니는지도 어디에 사는지 조차 까맣게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것 이였다

사흘이 넘도록 고민하던 나는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병원으로 향했다

그녀가 지나다닐만한 길목에서 기다리면 언젠가 그녀를 만날

그 좋은 방법을 한심하게 이제야 생각 했다니

으이구 이 돌 머리!

어른의 건강을 염려하는 착한 학생으로 틈만 나면 오가는

위장된 내 마음을 治善 영감은 부처님 손바닥처럼 알고 있었겠지만

굳이 드러내 이유를 묻지 않고 모른 척 해주었다

점점 병세가 악화 되는지 깨어있는 시간보다 잠든 시간이 부쩍 늘어나

주고받는 대화도 귀한 영감의 병 수발을 자청하여 이러구러 열흘이 지나갔다

부족한 공부를 위해 숙직 하는 선생님과 보낸다며 어머니를 속인 걱정이

양심을 찔러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돌아가려던 늦은 시간에

병실을 나서다 토끼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는 그녀를 만났다

서울 갔다 돌아온 이 몽룡 만난 춘향이 꼴로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이런 찌질이!



p.s  그저 쓰고 올리고 읽어 주시는 분들과 이야기 나누면 그 것으로 족했던 것을 ...
      작은 자리에 연연하는 모습이 있던 것 같아 뒤돌아 보며 멋 적게 웃읍니다
     겨울 제비를 읽어 주시던 기우님들께 사과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