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지나기

모든 것이 그러하듯 철저한 준비와 계획이 선행 되어야 제대로 된 여행이 된다는 것이

전문 여행가들의 조언이지만 천둥벌거숭이로 평생을 살아온 내게는

웬지 잘 짜여 진 격식에 맞는 여행은 정장에 넥타이를 맨 것 같은 답답함이 느껴져

마음이 일어나면 바람처럼 떠나야 그게 바로 여행이 아니냐며 애를 먹이던 젊은 날처럼

잠자리에 들려던 아무런 준비도 없는 아내를 졸라 느닷없이 여행을 가자며

한 밤중을 보채는 철부지 남편의 응석을 아내가 받아주고 길을 나서준 덕에

송광사로 길을 잡고 떠난 갑작스러운 여행을 시작 할 수 있었다

새벽 3시에 도착한 순천 찜질방에서 잠시 여독을 풀고

아내가 찜질방 인터넷에서 찾아낸 서 순천 I.C에서 17번 도로를 따라

송광사로 가는 길에 실비가 흩어지는 한적하고 깨끗한 이른 아침에 도로 여행은

산뜻함 그 자체로만으로도 잠을 줄여 길은 떠난 값을 톡톡히 보상해 주고도 남았다

비를 잔뜩 머금고 있는 하늘은 구석구석을 드러내주기 쑥스러운 산의 마음을 헤아린 양

산자락 끝에서 부터 산허리로 다시 봉우리 위를 아우르는 구름을 엷게 깔아놓아

확연 하지 않은 산의 어스름한 자태로도 자연의 신비로움이 있음을 은은히 알려 주었으며

그 산 아래 꼭 있어야할 자리를 찾아 앉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너덧 채에서

십여 채가 넘지 않던 마을 마을들은 우리 부부에게 한없는 평온과
그림 속에 함께 들어와 있는 것 같은 환상을 느끼게 해주었고 어느 곳에서도
차를 세울 수 있는 한적함은 좋은 화면을 찾아내 그 속의 아내가 들어간
몇 장의 사진을 찍는 즐거움도 더하게 해 주었다

순천에서 주암을 향해 가던 그 길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길 양 옆으로 흐드러진 벚꽃의 아름다움에 취했던 것은 작은 글재주로는
표현도 할 수없는 주암 에서 송광사까지의 더 멋진 길을 만나는 시작 일 뿐 이였다

산허리 허리마다 숨어있다 고개를 살몃살몃 내밀며보여주던

주암댐에 작은 호수들과 옥색 같은 물빛

저수지 근처로 피어나다 돌아서면 엷게 깔려있다 사라지던 작은 물안개

구비 구비 돌아가는 길목에 간간히 떨어지던 작은 빗방울들을 거느린 구름이며

길 양옆으로 끈길 듯 하면 새롭게 시작되던 벚꽃 길과 군데군데 백미처럼 섞여있던

홍매화 와 어우러진 드라이브 길은 절묘하게 섞인 절경으로 눈을 잠시도 뗄 수 없게 한다

어디에서 다시 이와 같은 아름다운 길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설레임으로 기다리던 젊은 날의 아내를 다시 만나게 해준 너무도 고마운 길이였다

잠자리에 누워 있다가 벼락 맞은 사람처럼 쫒아 나온 길을 보상이라도 하듯

고즈녁한 새벽을 뚫고 지나는 산길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여보! 참 예쁘다! 멋지다!" 며 연실 탄성을 지르던 소녀 같은 아내와 함께

그림 보다 더 아름다운 산길의 정취와 행복이 담긴 기억 속에는

언덕 위 자판기에서 마신 한잔의 커피향도 오래도록 우리 부부 주위에 머물러 있을 것 같다

송광사 초입에 마을은 그리 크지 않은 아담한 6~7칸을 넘지 않은 작은 한옥들은

줄지어 사찰이 가까웠음을 알리는 의전의 영접사 처럼 도열해 있었다

흔히 절집 풍광을 해치는 요란한 상가의 모습을 감춘 식당과 기념품 가게들이

전통한옥으로 요사 채 인양 보여 마음을 크게 상하지 않게 한 것과 딴 곳과 달리

일주문과 편의시설이 멀찍이 거리를 두고 있어 산사의 정취를 잘 지켜 준 일이 고마웠다

22채의 건물들로 이루어진 승보사찰 송광사는

경내 진입 전 15분 정도 걸을 수 있는 거리를 천년이 넘는 세월의 풍상을 넘어

산에 자리 잡았을 평평하고 부드럽게 연무된 커다란 돌들의 인고를 알려

선지식을 만날 숙연한 마음의 준비를 시켜 줬고

보통은 나무가 겉에 두르고 있어야할 표피가 없는 편백나무들은

선승들의 정신으로 자라고 수련된 맨몸 그대로를 드러내 생각을 정화 시켜준다는

곧고 높이 뻗어있는 모습으로 산과 구별 진 자연 그대로의 널찍한 산길을 만들어

경내로 들어가기 전 인간사 세속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었다

4계절 중 봄의 모습인 조계산 아침나절은 걸음걸음마다에 앞길을 꽃과 풀숲

이름 모르는 아름다운 채색의 나무들로 산에 걸린 구름아래

탁해져 버린 세속의 맑은 내음을 짙게 뿌려주고 있었다

매표소를 겸한 곳엔 사천왕상이 가람을 수호하며 속인들에 발길을 살폈고

산 계곡을 가르는 큰 개울위에 세워진 다리엔 누각을 통과하는 문 현판은

극락교 라는 이름을 달고 세속과 출가인 들의 살아가는

경계를 나누어 주고 있는 것이 오래도록 머리에 남게 기억 하게 만들어준다

올 한해 유난히 더디게 찾아온 봄은 4월초에도 각지에 눈을 내리는 기상이변과

흔히 보던 꽃을 샘나하는 추위가 아닌 뭉그적거리며 떠나지 않는 겨울에 몽니로

아무리 기다려도 인간의 힘으로는 계절은 바꿀 수도 만들 수도 없음을 깨닫게 하며

공존하는 길을 잃어버릴 때 무엇을 인간들이 잃어야 하는지 자연은 말 한다

인간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휩쓸어버리는 지진으로 재앙이 있음을 알리고

화산의 폭발 까지는 자제하고 있지만 유럽 하늘에 화산재를 날려

하늘의 길을 막는 징벌을 내려 자연은 자신이 심한 몸살과 고통에 힘들어한다는

경고 메시지를 보내 지구를 빌려 쓰며 주인인양 착각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꾸짖고 있다

더디고 늦은 봄으로 인간에게 경각심을 주기도 하지만

자연은 우리가 잠든 사이에도 자신이 주던 사랑의 손길을 잊지 않는 관대함을 보여 준다

무심히 스쳐 지나보낸 시간 옆에는 어느 하나의 눈길도 필요로 하지 않는 수없이

많은 생명들이 움추렸던 겨울을 털고 새로운 한해가 지나갈 길을 만들고 있다

꽃은 망울을 터트리며 피고 지고 나무들은 탐탁지 않아도 가지를 뻗고 잎과 순을 틔우며

묵묵히 주어진 길을 소리 없이 간다

일주문 앞 부도(浮屠)밭의 탑과 비문들은 대덕 스님들의 행적과 뒷면에 이름을 함께한

많은 공양주들의 선승들께 향하는 지순한 공경이 담겨있어 송광사가

유구한 세월동안 지켜지고 중흥되었음을 선채 합장하며 알려 준다

오랜 세월을 길을 알려준 분들의 뒤를 따라 스님들의 시봉을 마다않고 비문 뒷면에

이름을 달아매고 현세를 따라왔던 부도 속에 많은 보사와 거사들은 무엇을 보았으며

어떤 깨달음으로 이 부도밭의 이름을 새겨 따라왔을까?

사람들은 가고 오고했던 모든 일들이 나의 굳센 의지와 노력의 결과와

전혀 다른 별개의 것임을 우리는 모르고 산다

선택이 아니고 주어져 있었던 것임을 애써 부정하며 세월을 헤쳐가지만

우리가 지녔던 모든 선택권은 죽음 앞에서 모두 사라져 버린다

이름을 남긴 스님들과 그 뒤를 따르던 많은 불자들
그들은 지금은 모두 어느 곳에서 마음을 닦으며 엎드려 절하고 있을까?
겸허와 공경의 마음으로 앞서가신 선지식과 부처님께 합장하고 경내로 들어선다

-송광사 가는 길-

찻물이 가득 든 주전자를 앞에 두고 오랜만에 자판기 앞에 앉으며

각 코너에 개편이 있을 거란 예고를 보고 잠시 쉬었다 쓰려던 글의 줄기에

이끼가 낀 채 내버려둔 한 달여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음을 본다

그저 진득하게 묵묵히 제 길가고 있으면 울퉁불퉁 모양 없어도 글이라도 남았을 텐데

천성 버릇은 님 을 봐도 못 고친다더니 잘 다듬어 지지도 않은 글을 읽어주며

격려해주시던 나작 기우님들을 몰라라하고 연재를 중단 한 것이 아쉽고 송구스럽다

급한 성격 탓이다

늘 지나고 나면 후회를 남기면서도

까탈 많은 성격은 나이가 들어도 쉬 고쳐 지지 않는다

운영진이 계획하는 기우 소통의 장이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알 수 없지만

간혹 들어와 나작과 광장등의 올려 진 글을 댓글도 없이 훔쳐만 보고 다닌 죄스러움과

너무 오래 비워둔 해우소가 쓸쓸해 보이기도 하여 지난해 법정 스님 49재를 다녀온

송광사 여행 중 써두었던 글 일부를 올려 뜸한 인사를 대신해 본다

법정 스님 입적 일주기가 돌아 왔으니 글을 써 둔지 벌써 일 년이 지났음이다

옛 사람 말 별로 틀린 것 없다 하더니 나이와 정비례 한다는 세월 속도를 실감 한다

성큼 성큼 세월의 발 길이가 길어지고 있다

어서 나작 등이 새 단장을 끝내기 바라며 글 올려 볼 자리를 기다리게 되는 것은

세월 지나며 낮 익어가던 이름들과 나누던 이야기가 그리워서였던가 보다

모든 기우님들의 건강을 합장 하며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