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이창호9단 (2) | 나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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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이창호9단 (2)
2010-11-08 오전 3:27 조회 3596추천 11   프린트스크랩

나는 꼭 한번 이창호9단을 만난적이 있다.

하지만 만났다고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으며, 대화를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마디만을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만났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까닭은 그 찰나의 순간에 이창호라는 인간의 근본을 느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학시절 바둑동아리 활동을 할 때였다. 당시 젊은 프로기사들을 중심으로 한 모임이 있었는데 각 대학 바둑동아리 회원들을 초청하는 자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TV나 잡지에서만 보던 프로기사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과 얘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소름끼치도록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이창호9단이 등장했다. 그 당시 이창호9단은 명실공히 대한민국 랭킹 1위이자 세계랭킹 1위의 아성을 떨치고 있을 때였다.

워낙에 지명도가 지명도이니만큼 그의 등장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잠시 술렁였던 것도 기억이 난다.

이창호9단이 이 테이블 저 테이블 돌며 사람들과 얘기를 주고 받다가 우리 테이블에 올 차례가 되었다. 자리에 앉는 그를 보며 나는 다시 못올지 모르는 이 순간 그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한다는 의무감 마저 가지게 되었다.

평소에 궁금하긴 했지만 다른 매체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답변을 들었으면 좋겠는데, 하다가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그 당시 이창호9단은 가공할 정도의 승률을 기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루이9단에게는 자주 패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철녀라고는 하나 여류기사인 루이9단에게 자주 지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어찌보면 1인자에게 약간 무례일 수도 있는 질문을 던졌다.

나의 짧은 생각에 1인자로서의 자존심을 엿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기풍의 차이일까, 역시 심리적인 요인이 작용하는 것일까, 하는 대답을 예상하며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내게 들려온 대답은 하지만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은... 별로 안해봤는데..."




무표정한 얼굴로, 게다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그 한마디를 어렵게 내뱉은 그를 보며 나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상대가 누가 되었든 늘 최선을 다했을 뿐이고, 다만 결과가 패배로 기록되었을 뿐인 것이다.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을 수 있겠는가. 1인자 이창호9단의 자존심은 말하자면 그러한 것이었다.

결국 나는 절대절명의 순간에 천하의 하수나 할 수 있는 질문을 이창호9단에게 던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경외심을 품었던 이창호9단과의 짧은 만남이 그렇게 지나고 나는 이창호9단의 그 진실한 마음을 더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그의 무표정하고 진실된 모습에서 느껴지는 대가의 풍모는 마치 안개 속에 슬쩍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불상처럼, 지금까지도 내게 신비하고 어마어마한 존재로 다가온다.





얼마전 이창호9단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또한 최근 랭킹이 급격히 떨어졌다는 소식도 들린다.

하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하는 진실함이 이창호9단의 본질이라면 그는 행복한 결혼생활과 함께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을테니까말이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 성적이 더 내려갈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언제나 이창호9단을 응원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와 같이 나이를 먹어가는 그의 모습에는 내 어린시절의 추억이 들어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 이창호9단에게 서운한 점도 하나 있기는 하다.
동갑내기 노총각 팬이 더 이상 같은 총각이라는 동질감은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는 점.




이창호9단의 새로운 2막이 열리기를 기원하며...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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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동아이 |  2010-11-08 오전 3:40:01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어린시절의 추억을 공유하는 누군가가 있다는것은,,,,
 
놀빛바다 그렇죠. 누구에게나 그런 존재는 있는 것 같아요. 저에겐 그 대상이 이창호9단이었던 것이고...
당근돼지 |  2010-11-08 오전 6:48:09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잘 보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놀빛바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iwtbf |  2010-11-08 오후 1:10:39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진심이 느껴지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놀빛바다 네 감사합니다. 오늘 이창호9단이 져서 안타깝네요..
꿈속의사랑 |  2010-11-08 오후 10:24:38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바둑을 좋아하는 소탈하고 진실한 분이시군요. 단순하고 담백한 글 ....잘 보고 갑니다  
놀빛바다 계속해서 담백한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행복의길로 |  2010-11-09 오후 3:11:08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노총각의 서운함을 털어 버릴 수 있는 동반자를 빨리 만나시길....^^  
isyu |  2010-11-09 오후 10:27:22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이웃집 청년같은 수더분하고 진실한 이창호9단의 이미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되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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