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퍽한 情 위에 비는 내리고
요란한 빗소리에 눈을 떴다.
벽시계가 4시50분을 가리키고 있다.
날이 밝았다.
어젯밤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해도 멀리 도망만 가던 잠이 눈꺼풀 위에 내려앉는가 싶더니 빗소리 놀라 이내 달아나 버린 것이다.
어릴적 소풍 전날밤 잠 못 이루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어젯밤 TV에서 남부지방 호우특보 발표를 보고 88고속도로 날씨 정보를 누르니 온통 빨간색위에 120mm란 글씨만 눈앞으로 다가왔다.
-산간지방 계곡, 하천 피서객 대피요망
-농산물 점검, 유실방지
-여행객 주의 요망
이런 걱정스러운 멘트를 보고, 이번 내 여행을 반대했던 마누라가 지원군이라도 만난 듯 내 등에 집중사격을 한다.
“ 이런 날씨에 무슨 여행을 간다고 해욧. 당신 미쳐 가는가 보구랴.
그 험하다는 88고속도로로 간다며 미쳤지 미쳤어-. “
할 말이 없다.
무슨 말을 한다고 내 마음을 이해하랴.
이런 경우 어떠한 말도, 어떠한 부탁도 마누라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안다.
지난 50년 지내온 내 경험으로 얻은 마지막 무기를 사용한다.
“시꾸랏!”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비는 계속 내린다.
내 표정 속에서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읽은 마누라가 우산을 챙겨주며 걱정 섞인 잔소리를 한 아름 안겨준다.
“고마워. 잘 다녀올게……”
반 굽은 마누라의 등을 어린애처럼 토닥여준다.
이내 마누라의 눈 속에는 걱정대신 눈물이 번진다.
좀 서둘러 전주행 버스를 탔다.
바쁜 마음을 서두른 탓으로 대구행 차 예약시간보다 3시간 앞당겨 전주에 당도했다.
다행히 앞선 차에 자리가 있어 몸을 실었다.
빗발은 좀 약해졌다.
전주를 벗어나자 대구행 버스는 산속으로 질주한다.
첩첩이 둘러진 산은 짙푸른 녹색 옷으로 여름을 가꾸고 있다.
고국의 산하는 언제보아도 아름답기만 하다.
특히 빗속에서 보는 성하의 지리산은 아름다움을 넘어 장엄하기까지 하다.
차창으로 다가오는 비오는 지리의 모습들에 취해 눈은 잠시도 차창을 떠나지 못한다.
시시각각 새롭게 펼쳐지는 봉우리와 계곡들에 도취되어
내 추억 속에 새겨진 아름다운 이름들을 계곡마다 붙여본다. 봉우리마다 불러본다.
피아골, 뱀사골, 칠선계곡, 청학동,
천왕봉, 반야봉, 바래봉, 촛대봉, 정령치, 노고단…….
생각대로 그리운 이름들을 붙여보지만 사실은 아닐 것이다.
3시간의 여정의 끝이 금세 눈앞에 다가온다.
대구의 톨게이트를 보고야 정신이 돌아와 선달에 전화를 눌렀다.
종착역에는 팔공선달과 서울에서 달려온 일곱길거리님이 반갑게 맞는다.
서울에서 오기로 한 당근돼지님, 소라네님, 영판님,등은 못 온다는 비보(?)를 알린다.
비보라면 좀 이상한 표현일지 몰라도 보고픈 이들을 못 만다는 건 분명 비보이다.
다행이 비는 멎었다.
아침부터 서두른 탓으로 예정보다 일직 도착해 팔공산 근처의 선달집이서 여유 있게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었다.
이번 모임이 고 선비만석님의 49제와 작년에 고인이 고성에서의 초청을 기리기 위한 것임을 듣고 뜻이 깊은 모임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런 뜻을 알리며 선달이 눈시울을 붉힌다.
나도 콧날이 아려온다.
고인에 대한 정이 서로의 마음속에서 떠나지 못하여서 이리라.
못 내려온 것이 아쉬운지 영판님이 전화로 반가움을 전한다.
작은시집님이 경주에서 안부를 묻는다.
목소리만 들어도 반가움이야 숨길 수 없다.
빗줄기가 굵어진다.
빗속을 뚫고 청도에서 못안님이 달려온다.
지난번 서울 모임 후 3개월만인데 반가움은 3년보다 더한 것 같다.
서울에서도 몇 분이 도착하여 팔공산 약속장소로 갔다.
조금 기다리니 건장한 청춘(?) 4분이 활력을 몰고 도착한다.
죽시사님 부부, 淸風徐來님, 애린사랑님,이다.
분위기가 갑자기 활력이 넘친다. 그들과 함께 넘치는 활력이 부럽다.
알고 보면 그들도 지천명인데 청춘으로 보이는 건 내가 벌서 저만큼 가 있다는 것이겠지-
그러고 보니 일곱길거리,못안, 두 분도 40대이고 선달이 50대, 60대를 건너뛰어 내가 70대이니 좀 언바란스 같아 미안한 마음을 감출수가 없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아무렇지도 안은 듯 감싸준 여러분들이 너무 고맙다.
사이버에서, 오로에서, 아무 이해도 없이 만나, 情 하나로 사심없이 맞아주는 여러분들이 정말 고맙다.
비 내리는 팔공산의 밤은 질퍽한 분위기와 함께 깊어간다.
비에 젖어 질퍽하고 情에 젖어 질퍽하고…….
질퍽한 분위기는 자정을 향하여 달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