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일기 176,

 나의 작은 만찬! 주 초에는 전기밥솥의 밥을 억지로 비우느라, 주말에 처가 보낸 밑반찬을 먹느라 굳세게 오피스텔 안에서 저녁을 먹지만 나의 작은 만찬 장소는 오피스텔 근처 뒷골목의 함바집이다.

24시간 설롱탕집의 뼈 해장국에 소주 한 병을 먹는 맛도 즐기지만 가급적 밥은 이 집에서 먹고 싶은 평소의 마음이다.

 밥 보다는 치킨 한 마리에 소주 한 병을 즐기고 삼겹살 보다는 오향장육의 깊은 맛이 기억에 남아있는 삼식이 이지만 평소 한 푼이라도 아끼려 사실 외식은 안 한다. 내가 그 집을 갈때는 나 나름의 축제이자 손님과 같이 자리를 즐기는 경우이다.

 병원의 수하직원에게 밥 한끼를 낼 때에도 굳이 병원에서 먼 이곳까지 와 소개를 한다.
10개의 찬(Dish)은 값은 비싸지 않을 채소와 나물 그러면서도 Main Dish 한 두가지는 생선과 고기는 꼭 포함된다. 젊어 사업을 하던 시절 인사동의 요정에 자주 갔었지만 그 수많았던 찬에 맛은 기억이 안 나지만 이 집의 찬은 맛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처와 같이 한 두번 오기도 했다. 주로 할머니 집이라 부른다.
낮에는 인근 인테리어 공사나 지하철 공사판의 인부들이 오는 함바집이고 저녁에는 술 손님은 거의 없다.
오로지 밥맛으로 승부를 내는 집인 것일까?

 그 집에서 저녁을 먹으려면 8천원이다. 밥값 5천원에 소주 한 병 3천원 합 8천원이다.
5천원의 밥값은 언젠가 4천원 하던 것이 오른 것이지만 전혀 아깝지가 않다. 15,000원을 내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오늘 저녁은 큼직한 조기 한 마리에 돼지고기 삶은것과 상추 등 여러 반찬이다. 보통 10가지의 찬 인듯 싶다. 늦은 저녁시간인데도 자리는 꽉찬다. 주말이면 용인 집에가서 정성껏 차려주는 밥을 먹지만 여염집의 찬은 가짓수가 많기는 어렵겠지. 집에 못가는 주말 이 집의 찬은 상 가득한 정성에 마치 집의 밥상같다.

 이번 주말도 토요일 일요일 모두 근무를 해야하니 집에 가기가 어려울 듯한데 이 집의 만찬을 처의 상차림으로 여겨야 할까?

 소탈하게 밥 한끼를 즐길 수 있는 것도 중요한 요소이다.
오피스텔을 나서며 장 가방을 들고 나섰다. 소주 6병과 안주거리 찬 거리를 사야한다.
나의 만찬 후에 장을 봐야지!

 이마트 브랜드의 구멍가게에서 장을 보곤 장 가방을 들고 돌아온다. 산 품목도 별로 없는데 장 가방은 무겁다. 생수6개 팩을 사려다 무게가 무서워 미룬다. 돌아오는 길은 음식점들에 손님들이 가득하다. 대창 고기구이 집, 치킨가게, 피자가게, 중국식 양꼬치 구이 집, 빈대떡 막걸리 집, 낙지, 조개구이 등 정말 다양하다.

빈대떡 집 앞을 지나려니 가게 속에 박 사범의 모습이 보인다. 한잔 얼콰한 모습이다.
고개를 숙이고 못 본척 장 바구니를 보며 지나친다. 박 사범도 나를 본 듯 한데 못 본척 하려는 듯한 모습이다. 저 양반 보나마나 누군지 남의 술 한 잔을 얻어 마시고 있는 것일텐데 아는 척 해봐야 자신도 부끄러워 하겠지 싶다.

 퇴근 길에 기원에 들려 구경을 했다.
박 사범이 편 바둑에 상대와 네 점을 접고 두고 있다.
상대 하수는 네 점 바둑인데도 능청맞게 둘 곳 다 두며 기다리다 외레 박사범의 대마를 잡게 만들어 놓곤 잡지도 않고 다른 곳에 둔다. 계가는 하수가 18집을 이겼다. 안 잡고도 봐 주면서도 이기니 칫수관리도 하고 상수 체면도 살려주고 더 잘한 것일까?
던질 줄 알았는데 박은 끝까지 둬서 자신이 18집  진 것을 확인한다. 13인지 14집 이상 진것은 던지는 것이 불계승이고 그 정도 계가는 할 줄 알아야 바둑 둔다 소리를 하는 것으로 중학때 부터 알고 있었는데 박 사범은 명색이 사범인데 그 걸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저렇게 구차한 인생을 살고 구차한 바둑을 두니 술 한 잔을 얻어 먹어도 구차하게 얻어 먹는 것이겠지.

구차하게 본능적으로 나의 시선을 피한 것일테고 나 역시 구차하게 모르는 자리에 끼어 구차한 술 막걸리 한 잔을 먹고 싶지는 않은 본능에 시선을 밑으로 돌린 것이겠지.
 
 나는 이미 나의 작은 만찬을 나 혼자 즐기지 않았던가. 자주는 못 했어도 적시에 오늘 바둑 한 판을 두고 싶어 기원에 들렸어도 바둑 한 판을 같이 즐길 여유조차 없이 자신이 딸까 잃을까 계산을 하며 판을 이루려는 이들에게서 미련없이 돌아서 나만의 만찬을 즐긴 것 아닌가?

 오늘 하루 병원에서 정말 힘들었다.
이른 새벽 조출을 하는 날이어 아침일찍 부터 환자들과 씨름을 하곤 종일 조퇴라도 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오후 5시가 넘기를 기다렸다. 5시 퇴근은 눈치가 많이 보이지만 벌써 3시간 오버타임을 한 것이다.

 눈치를 보며 일찍 나서 들린 기원에서 바둑 한 판도 두지를 못 했지만
그리 오랜동안 알고 지난다던 기원 사람들과 얼굴은 보면서도 인사조차 건네지 않고 바둑도 못 두었지만
나 만의 작은 만찬을 나 혼자 즐기고
나 혼자 타이핑을 즐긴다.

 그래도 기록은 남겨야지. 이 다음에 과거의 나를 돌아보는 그 날을 위하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