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죠? 거의 다 왔어요.”

구두를 신고 경사진 언덕을 오르는 혜린의 모습에 미안함을 느낀 지훈이 그녀를 격려하며 말했다.

“그거 반가운 소식인데요?”

혜린이 밝게 웃으며 답했다.

그들은 광화문에서 만나 저녁식사를 위해 지훈이 예약했다는 식당을 가는 중이었다.

조금 걸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 혜린은 흔쾌히 괜찮다고 했지만 이렇게 계단도 없는 언덕을 올라갈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 곳은 아는 사람들만 올 수 있는 비밀스러운 언덕인 것 같았다.

언뜻 보아서는 평범한 가정집들이 모여 있는 흔한 언덕인 것 같았지만 막상 올라가 보면 중간중간 보이는 식당이나 카페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 근처에는 많이 와봤지만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혜린이 지쳤는지 잠깐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네, 저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는데, 아니었으면 전혀 몰랐을 거에요.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요. 바로 저기에요.”

지훈이 오른쪽으로 살짝 굽어있는 골목길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이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가려있어서 안 보이지만 꺾어지면 바로에요. 이제 갈까요?”

혜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고 지훈도 그녀의 속도에 맞춰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한편 기영과 수현은 뭘 먹을지 정하지 못한 채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긴 어때?”

기영이 한 레스토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카페 아니에요?”

수현이 기영이 가리킨 곳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가까이 가볼까?”

기영이 물어보자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투명한 유리와 고급스러운 블랙 톤의 장식이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심플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외관은 정말 카페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안에 들어가보았다.

“와……오빠 우리 여기서 먹어요!”

홀의 가운데에 위치한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샐러드 바에 마음을 뺏긴 수현이 기영을 보며 말했다.

“그래.”

짧게 대답한 기영이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매니저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처음 오셨어요?”

“네.”

처음 왔냐는 그녀의 물음에 수현과 기영이 동시에 대답했다.

“피자와 파스타 종류는 이쪽에서 주문 가능하시구요, 샐러드 바는 이 쪽에 접시가 있어요. 가져다가 원하시는 만큼 담아 계산대로 가져오시면 돼요. 그럼 우선 2층으로 올라가셔서 자리를 잡으시고 다시 내려오세요.”

그녀가 이곳 저곳을 보여주며 설명을 마치자 기영과 수현은 자리를 잡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혜린과 지훈이 도착한 곳은 아담한 2층 건물로 골목길 안쪽에 살짝 가려져 있었다.

낡아 보이면서도 아늑한 느낌을 주는 나무로 된 간판이 입구에서 그들을 반겼고 현관문을 들어서기 전에 들꽃과 넝쿨로 뒤덮인 작은 정원을 볼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오래된 나무 향기와 함께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겨왔다.

정통 이탈리안 레스토랑인 이 곳은 이탈리아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세세한 장식 하나하나가 모두 유럽풍으로 꾸며져 있었고 너무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은은한 고급스러움이 거부감 없이 다가왔다.

그래서일까 언덕을 올라와야 하는 데다 거의 숨어있다시피 한 위치에도 빈자리가 안 보일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안내를 위해 다가온 종업원에게 지훈이 작은 소리로 뭔가를 얘기하자 종업원이 웃으며 그들을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

“혜린씨 앉으시죠.”

발 빠르게 먼저 테이블로 다가온 지훈이 의자를 뒤로 빼며 혜린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한 그의 매너에 쑥스러워진 혜린이 놀란 기색을 감추며 조심스럽게 앉았다.

“남자 친구분이 멋있으시네요.”

그 모습을 본 종업원이 혜린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멋있긴 하지만 그런 사이 아니에요.”

금새 여유를 되찾은 혜린이 장난 섞인 목소리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빠, 여기 피자가 너무 맛있는 것 같아요, 샐러드도 환상이고. 전에 알바 했던 레스토랑보다는 조금 못 하지만요.”

수현이 피자를 한 입 깨물어 먹고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맛있네. 전에 어디서 알바 했었는데?”

“사실 안 해본 일이 거의 없는데요, 한번은 명동에 있는 스파게티 전문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했었어요. 거긴 음식이 비싸서 제가 사먹기는 힘든 곳이었는데 음식을 나를 때마다 그렇게 맛있어 보일 수가 없는 거에요. 테이블에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 부럽더라구요. 그랬는데 어느 날 사장님께서 저를 비롯한 같이 일하던 애들에게 음식을 직접 만들어 주셨어요. 그게 결국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그때 그 맛은 정말 못 잊을 거에요.”

“그랬구나, 또 기억에 남는 일 있어?”

“셀 수 없이 많죠. 이건 예전에 어떤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인데요, 저보다 먼저 일을 시작한 오빠가 한 명 있었어요. 근데 저한테 일을 시킬 때마다 그냥 말로 하면 될 것을 자꾸 어깨랑 팔을 만지고 그러는 거에요. 저는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그걸 갖고 뭐라고 말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아서 참고 있었는데 어느 날 유심히 보고 있던 손님이 그걸 주인 아주머니께 말해서 그 오빠가 잘렸어요.”

“다행이었네.”

기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빠는 아르바이트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응. 한번도 없었어. 지금 하는 일은 괜찮아?”

“네. 서점에서 하는 일은 조금 따분한 것만 빼면 아주 좋구요, 편의점에선 어른인 척 하면서 담배나 술 사려는 애들만 아니면 괜찮아요.”

수현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응……참, 그 뮤지컬 표는 어디서 얻은 거야?”

“그냥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분이 있는데, 그 분이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가게 되었다면서 주셨어요.”

“알고 지내던 분?”

“네……오빠 지금 몇 시에요?”

말끝을 흐리던 수현이 갑자기 말을 돌리며 그에게 물었다.

“아, 뮤지컬이 몇 시라고 했지?”

“8시요.”

“응, 한 10분 있다가 나가면 되겠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기영이 특유의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혜린씨는 바둑 기사가 된 걸 후회한 적은 없으세요?”

지훈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음……없는 것 같아요. 글쎄요. 지고 나서 너무 괴로우면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겠지만 진지하게 바둑을 둔 걸 후회한 적은 없었어요. 다만, 바둑을 두느라 접어야 했던 다른 꿈들이 가끔 괴롭히긴 해요.”

“어떤 꿈이었는지 물어도 될까요?”

“학교에 다닐 때는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살아보고 싶었어요. 학교 끝나고 친구들하고 떡볶이도 사먹고, 같이 도서관가서 공부하고, 우리 학교 남자애들 이야기하면서 웃고 그런 거요. 주말에는 친구 생일 파티에도 가고, 시험기간에는 날이 새도록 공부하고, 또 시험 끝나면 모든걸 잊고 신나게 놀고 그러다가 또 시작하는 거요. 우습죠?”

“바둑공부를 하면서 학교생활을 똑같이 한다는 건 무리였겠죠?”

“네. 아무래도 시간이 허락을 않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대학 생활이 하고 싶었어요. 사실 이때는 이미 프로기사도 되었기 때문에 못 할 이유는 없었죠.”

“근데 왜……?”

“모르겠어요. 대학 생활이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시간 투자도 많이 해야 하고, 학비도 많이 들고……그런데 내가 왜 꼭 대학에 가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으면 정말 속 시원한 대답이 안 나오더라고요. 괜히 남들 다 간다고 해서 얼떨결에 따라 들어가고 싶진 않았어요. 근데 요즘엔 워낙 슬럼프에다 잘 두는 후배들이 많이 생겼더니 훌쩍 떠나서 공부만 해보고 싶은 생각도 들어요.”

“그럼 미국의 대학교에 가는 건 어때요? 미국은 교육 시스템이 정말 잘 되어 있어요, 또 바둑인도 어느 정도 있으니 바둑 활동도 할 수 있을 거에요. 만약 혜린씨가 원한다면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많을 것 같은데.”

“아직……안 늦은 걸까요?”

“그럼요. 직접 가보면 알겠지만 혜린씨보다 훨씬 나이든 사람도 많아요. 그리고 나이가 중요한가요. 인생은 한 번뿐인데 그냥 흘려 보내긴 아쉽잖아요.”

“팀장님 혹시 미국에서 대학 나오셨어요?”

“네, 스탠포드 다녔어요. 가족들은 아직도 LA에 있고요.”

“그랬구나……조금 갑작스럽네요, 생각 해볼게요. 정말 감사 드려요.”

“아니에요, 사실은 오늘 혜린씨를 위해 준비한 깜짝 선물이 있어요.”

“선물이요?”

“오늘 저녁 뮤지컬 티켓인데, 시간 괜찮으시죠?”

“뮤지컬이요? 시간은 괜찮지만......”

“혜린씨 뮤지컬 좋아하세요?”

“좋아하죠. 누가 안 좋아하겠어요.”

“다행이다, 천 명중에 한 명이 안 좋아한다고 해도 그게 혜린씨면 아무 소용 없잖아요.”

“만약 제가 안 좋아한다고 했으면, 어떻게 하려고 하셨어요?”

“그랬더라면……이걸 보면 뮤지컬이 다시 좋아질 거라고 설득해 보려고 했죠.”

지훈의 대답에 혜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가끔 기영의 말을 통해서 듣던 지훈은 완벽주의자에 냉철한 사람으로 느껴졌는데 그녀가 알아가고 있는 이 남자는 유머감각이 있어 대화를 잘 이끌었고 인간적인데다 매너까지 좋은 멋진 사람이었다.

“그럼, 이제 일어날까요?”

지훈이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냅킨을 올려 놓으며 말했다.

“네, 오늘 저녁 정말 즐거웠어요. 음식도 맛있었구요.”

혜린이 상냥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수현과 기영이 공연 시작보다 여유 있게 왔음에도 벌써 공연장 앞은 멋지게 차려 입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오빠, 표를 먼저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수현이 초대장을 좌석표로 바꿔주는 코너를 가리키며 말했다.

“응.”

“사람 많은데 여기서 기다릴래요? 제가 표 바꾸고 화장실도 좀 다녀올게요.”

“응. 알았어.”

수현을 보낸 기영은 이곳 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왠지 그가 평소에 만나던 사람들과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값비싼 옷이 어쩌면 그들을 다르게 만들었겠지만 어쩐지 더 행복해 보였고 자신감 넘쳐 보였으며 특별한 기품이 느껴졌다.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에 재미를 느낀 기영은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홀 안의 사람들을 모두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의 눈에 낯익은 사람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가 팀장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팀장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혜린씨, 저쪽에 김대리님이 있는 것 같아요.”

지훈이 옆에 있던 혜린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기영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네? 기영 오빠가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던 혜린의 눈에 틀림없는 기영의 모습이 들어왔다.

지훈과 함께 걸어오는 혜린을 본 기영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자 기영은 지훈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김대리님도 공연 보러 왔나 봐요.”

혜린과 기영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 챈 지훈이 아무렇지 않은 척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그게.”

“오빠! 저 왔어요, 이거 보세요. 뮤지컬 프로그램 책자도 사왔어요.”

그때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수현이 자연스럽게 기영의 한쪽 팔짱을 끼며 기영에게 책자를 내밀었다.

“수현아, 왜 그래.”

당황한 기영이 황급히 자신의 손을 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는 분들이세요?”

그제서야 상황 파악이 되었는지 수현이 혜린과 지훈을 보며 물었다.

처음 보는 여자에게 기영과 아는 사이냐는 질문을 받은 혜린은 마음 속에 태풍이 몰아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누군지는 몰랐지만 당신이야말로 기영과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크게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혜린은 숱한 패배로 단련된 강한 사람이었고 화를 억누를 줄 알았다.

게다가 지금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어떤 말이라도 들으면 자신을 절제할 수 없게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기영도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있기만 했다.

잠깐 동안의 침묵이 온 세상의 시간을 멈춰놓은 듯 느껴졌다.

“공연 보러 가야죠.”

잠시 후 혜린이 지훈에게 고개를 돌리며 싸늘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혜린아.”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기영이 혜린을 불렀지만 이미 그녀의 마음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나중에 얘기해.”

차가우면서도 침착한 목소리로 말한 혜린은 지훈과 함께 조용히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