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려나 보네……”

지하철역에서 막 나온 혜린이 먹구름 낀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우산을 가져올까 망설이다가 결국 놓고 온 것이 살짝 후회되었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니 이미 약속시간이 5분 정도 지나있었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이미 약속장소를 향해 뛰고 있었겠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한 5분 정도 더 늦더라도 지나치게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던 사람에게 미안하다며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마치 시합을 두러 갈 때 갓 입단했을 때는 절대 늦지 않도록 조심하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 지면 지각으로 10분쯤 공제해도 큰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것처럼.

그녀는 기영과의 바둑 레슨을 위해 항상 만나던 카페로 가는 길이었다.

그에게 바둑을 가르친 지도 벌써 반년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그 동안 그가 일취월장 하는 것을 보면서 기쁨과 보람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큰 부담이 되기도 하였다.

처음엔 토요일에 한가하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시작했지만 이제는 토요일엔 항상 일정이 있다는 것이 그녀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녀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기영이기에 한 번도 싫은 내색 않고 그와의 약속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지난 번처럼 갑자기 레슨을 취소할 때는 그녀도 은근히 화가 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지금도 약속 시간에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천천히 걷고 있는 이유가 그에 대한 작은 복수라고 볼 수도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과 함께 오늘은 뭘 얘기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 보니 어느 새 카페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들이 좋아하는 구석 자리에 기영이 앉아 바둑 책을 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도 지난 주 일방적인 취소 통고로 기분이 나쁘던 그녀였지만 카페에 앉아 바둑 공부를 하는 그의 멋진 모습을 보니 그 전의 미움은 또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는 얼마나 집중을 했는지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오빠!”

살금살금 기영의 뒤로 걸어간 혜린이 양 손으로 갑자기 그의 어깨에 손을 대며 그를 불렀다.

“어? 언제 왔어?”

흠칫 놀란 기영이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오빠 놀랐지?”

“아냐, 놀라긴.”

“분명 놀라는 것 같았는데.”

“음, 아주 쪼금 놀라긴 했어.”

기영이 마지 못해 시인한다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혜린의 어이없는 표정을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미안, 조금 늦었어. 지하철이 늦게 와서.”

혜린이 기영의 맞은 편에 앉으며 말했다.

“괜찮아. 책보고 있느라 늦는지도 몰랐어. 참, 나 숙제도 다 하고 인터넷에서 둔 바둑 프린트도 해왔어.”

“오, 정말?”

“응, 다시 열심히 해보려고.”

“흠, 그럼 사활은 있다가 보고, 복기부터 해볼까?”

“응. 이거야”

기영이 A4용지에 인쇄된 기보 2장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응, 오빠가 둔 거니까 오빠가 놓는 게 좋겠다.”

기보를 대충 훑어본 그녀가 다시 기영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잠깐만, 다시 뒤로 가봐……아니, 더, 어 거기, 그 수가 이상하네.”

“여기 이상해?”

“응, 이상하지. 여기 보다는 이쪽이 더 급한 자리잖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바둑판을 응시하고 있던 혜린이 바둑알을 집어 다른 곳으로 옮기며 말했다.

“아, 난 백이 이렇게 둘 까봐.”

“괜찮아 그 흑 한 점은 버려도 돼. 여기가 더 크거든.”

“그렇구나.”

기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실전에 어떻게 된 거야?”

“망했어……”

“어떻게 뒀는데?”

“백이 이렇게 두길래 난 이쪽에 집을 지으려는 줄 알고 여기 뒀더니 여기를 끊겼어.”

“축머리였네.”

“응.”

“거기 끊겨서 다 잡혔어?”

“살긴 살았는데 너무 망해서……”

“응. 조금 허무하네, 그래도 이번 판은 꽤 잘 두고 있었는데.”

“바둑이 괜찮다가도 조금만 복잡해지면 정신을 못 차리겠어.”

“바둑이 복잡해지지 않길 바라는 건 전쟁에서 싸우지 않고 이기겠다는 거하고 똑같아.”

“원래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가장 좋은 거 아냐?”

“그야 그렇지, 근데 바둑은 한번 시작된 이상 싸움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아. 정말 실력 차이가 나지 않는 다음에야, 서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 보면 충돌이 생길 수 밖에 없으니까.”

“그렇겠지, 그럼 바둑이 복잡해졌을 때 좀 더 잘 대처하려면 어떻게 둬야 할까?”

“음……가장 좋은 건 상황에 맞게 수를 읽는 건데, 조금 객관적으로 얘기하자면……우선 항상 바둑판 전체를 보고 있어야 해. 예를 들면, 오빠의 약점은 어디고 상대의 약점은 어딘지, 현재 가장 큰 자리는 어디인지 이런 것들을 파악하고 있는 거지. 왜, 기업 같은 데서도 무슨 일을 시작하려면 꼭 이런 저런 조사를 많이 하잖아. 많이 알고 있어야 제대로 된 전략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그런 거랑 비슷한 거 아닐까?”

“응. 비슷할 수 있겠다.”

“그리고 형세를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해. 만약 오빠가 불리하면 어디서 역전의 실마리를 찾을지 연구해야 하고, 반대로 유리하다면 상대가 어디서 오빠를 괴롭히려고 할지 생각해 보는 게 좋아. 어려운 점은 유리하다고 무조건 안전하게만 두면 금방 따라 잡히기 쉽다는 거지.”

“나도 그래서 형세판단을 자꾸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되는데다가 확신이 안 설 때가 많아. 내 생각엔 내가 유리한 것 같지만 내 생각을 내가 못 믿겠다고 해야 하나.”

“음, 그럴 땐 무리하거나 움츠러들지 말고 최선으로 두는 게 제일 좋아.”

“어디가 최선인지 모르겠으면?”

“바둑은 오빠 혼자만의 싸움이기 때문에 오빠를 못 믿으면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어. 오빠 스스로 자신감을 갖고 오빠의 생각을 믿어. 바둑 지는 거 별거 있어? 또 다시 두면 되잖아. 중요한 건 신중하게 열심히 두는 거지. 이기기 위해서 계속 수를 읽다 보면 실력도 늘고, 또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 나처럼 꼭 이겨야 하는 바둑을 두면 이렇게 편하지 않으니까 오빤 복 받은 줄 알아야 해.”

혜린은 기영이 좀 더 자신감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전혀 마음에 없는 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 가끔은 바둑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기영이 부럽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거야?”

그녀의 말에 기영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면서도 동의할 수 없다는 말투로 물었다.

“그럼, 그러고 보니 나 어릴 때 말이야. 우리 사범님이 엄하셔서 시합 성적이 나쁘면 벌을 섰거든. 근데 거기다가 내가 승부욕이 강해서 지는 걸 무척 억울해 하다 보니까 시합만 나가면 안 지려고 바둑이 굳어 버리는 거야. 그래서 하루는 우리 사범님이 그랬어. 난 특별히 이번에 성적이 안 좋아도 내가 다녀와서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당당히 말하면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벌도 안 서게 해주시겠다고.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참 마음이 편해지더라.”

혜린이 그때를 떠올리는 듯 회상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시합 성적은 어땠어?”

“음. 사실 그 부분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좋았던 것 같아. 어쨌든 그때 사범님께서 해주신 그 말씀은 내가 지금껏 바둑을 두는데 큰 힘이 되었던 것 같아. 프로기사가 된 다음에도 말이야.”

“그렇구나. 멋진 사범님이네.”

“응……참, 지난 주에는 어떻게 된 거야? 만나면 설명해 주겠다고 했잖아.”

“아, 그게, 지영이 친구가 아파서 간호해주러 갔었어.”

“지영이 친구? 오빠 친구가 아니고?”

“지영이 친구이긴 한데 나랑도 잘 아는 사이거든. 원래 지영이가 가려고 했는데 바빠서 못 간다고 하길래.”

“그래서 오빠가 하루 종일 간호해 준 거야? 혼자 사나 보네?”

“응, 그런 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