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았어, 그럼 다음에 얘기해.”

혜린의 서운한 목소리가 기영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지금 전화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그녀에게 이런 일로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고 나중에 얘기하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혜린과 전화를 마친 그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죽집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3시간 전

“오빠 전화 괜찮아?”

집에서 한가롭게 TV를 보던 기영에게 지영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했다.

“응.”

“오빠 지금 수현이가 많이 아프다는데 내가 바빠서 갈 수가 없어. 오빠가 내 대신 좀 가주면 안돼?”

“수현이가 아픈데 내가 왜 가, 다른 친구는 없대?”

“오빠도 전에 봤잖아, 수현이 집이 워낙 어려워서 일만 하고 사느라 친구 별로 없어. 그리고 오빠는 같이 연극보고 저녁도 먹었으면 친구 맞잖아.”

“나 있다가 약속 있는데.”

“갔다가 가면 되잖아. 가서 어떤지 보고 약이나 죽 같은 거 좀 사다 주고. 오빠 아프면 내가 맨날 갔었잖아. 혼자 살 때 아프면 얼마나 서러운지 아는 사람이 그렇게 모른 척할 수 있어?”

“알았어, 알았어. 그럼 거기 잠깐 갔다가 바로 나와도 되는 거지?”

“응.”

수현이 살고 있는 집은 이름 없는 작은 산의 중턱에 위치한 한 주택가에 있었다.

그리고 그 중 한 평범한 빌라의 옥탑 방에 세를 들어 살고 있는 것이었다.

기영이 도착해보니 현관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초인종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탕탕……’

그는 살짝 노크를 하려 했으나 오래된 철문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잠시 후 방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지영이니?”

수현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문을 여니 그 앞에 기영이 서있었다.

“안녕?”

어색함을 무마시키려는 듯 기영이 반갑게 인사했다.

“어떻게……”

너무 놀란 수현은 할 말을 잊은 듯 했다.

“아프다면서, 지영이가 하도 성화여서 잠깐 돌봐주러 왔어.”

“네……”

“나 들어가도 되지?”

“네……근데 오실 줄 알았으면 청소라도 좀 하는 건데.”

수현이 흐트러진 물건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그녀의 집은 정말 깔끔했다.

“이 정도면 깨끗한데 왜, 자고 있었어?”

“그냥 누워 있었어요.”

“어디가 아픈 거야? 많이 헬쓱해진 것 같아. 얼굴도 창백하고.”

“몸살이 난 것 같아요. 온 몸이 안 아픈 데가 없어요. 저 좀 누워있을게요.”

“응.”

그녀의 집은 원룸이었다.

방 한쪽 구석에 침대가 있었고 그 맞은 편에 작은 책상과 서랍장, 그리고 그 위에 30년쯤 되어 보이는 TV가 있었다.

그는 무작정 오긴 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그녀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보니 방해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녀의 책상을 보니 많은 책들이 꽂혀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책상 앞에 앉아 책들을 꺼내 펼쳐보기 시작했다.

“으음……”

한창 독서 삼매경에 빠져있던 그에게 수현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수현이 어디가 많이 아픈지 괴로워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이마를 짚어보니 열이 많이 나고 있었다.

그는 뭔가 물수건 같은 것을 찾기 위해 방 뒤에 있는 작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이곳 저곳 닥치는 대로 열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건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고 오히려 그에게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김치로 보이는 큰 통을 빼고는 텅 비어 있었다.

게다가 냉동 칸에는 아예 들어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의 집도 가끔 그럴 때가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마트에 가 먹을 것을 많이 채워놓고는 했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수현의 냉장고는 지금 이 상태가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것 같았다.

결국 그는 물수건 찾는 것은 포기하고 수현에게로 돌아왔다.

“수현아, 너 마지막으로 밥 먹은 게 언제야?”

기영이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 집에서 나가서 길 따라 쭉 내려가면 노란색 간판에 작은 편의점이 하나 있는데요, 거기 가서 저 오늘 일 못한다고 좀 전해주시겠어요?”

그녀가 기영의 질문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갑자기 엉뚱한 말을 했다.

“알았어, 그럼 그거 얘기하고 죽이랑 약도 사올게, 그때까지 혼자 있을 수 있지?”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계를 보니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혜린과의 약속에 늦을 것 같았다. 그는 창백해진 수현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다음부터 열심히 해보겠다고 다짐했던 혜린과의 대화도 떠올렸다.

그는 진심으로 혜린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지만 차마 수현을 이대로 두고는 발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그는 수현의 집을 나서며 혜린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