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에 분명 있었는데……”

혜린이 골프에 관한 책으로 가득 차있는 책장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기영을 위한 바둑책을 찾는 중이었다.

그 곳은 종로에 있는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큰 서점으로, 웬만한 서점에는 바둑책이 몇 권 없기 때문에 기영을 만나기 전에 들린 것이었다.

혜린은 전에도 바둑책이 필요할 때면 이 곳을 애용했었기 때문에 책이 있는 곳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익숙한 책장에 다른 책들이 꽂혀있을 뿐 바둑에 관한 책은 한 권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맴돌며 책을 찾던 혜린은 결국 종업원의 도움을 받고서야 서점 구석으로 옮겨간 한 무더기의 바둑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게 다에요?”

그녀가 얼마 되지 않는 바둑책들을 보며 말했다.

“네. 바둑에 관한 건 거기 있는 책이 전부네요.”

종업원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전에는……”

“혜린씨?”

혜린이 푸념을 늘어놓으려는 찰나, 옆에서 역시 바둑책을 보고 있던 한 남자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어? 팀장님 아니세요?”

혜린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거, 여기서 뵙다니 뜻밖이네요. 프로기사도 바둑책사서 공부하나요?”

“뭐, 필요하다면 할 수도 있겠죠? 바둑책 고르고 계셨나 봐요?”

“네, 제 우상이었던 사범님께 지도대국도 받았으니 여세를 몰아 실력을 좀 키워보려고요.”

“흠, 우상이요? 제게 별로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인 것 같은데요.”

“그건 주관적인 거니까, 어울리는지 어울리지 않는지는 사용하는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 아닌가요?”;

“하지만 ‘우상’은 매번 다른 프로기사를 만날 때마다 바꾸기엔 뜻이 조금 무거운데요, 혹시 한국 프로기사 230명이 모두 우상이라고 말씀하실 건 아니겠죠?”

“물론 아니죠, 제 우상은 오직 혜린씨밖에 없었어요, 3일 전부터이긴 하지만.”

“아, 그러셨군요. 그래서 책은 고르셨나요?”

“안 그래도 고민 중이었는데, 이젠 걱정 안 해도 되겠네요.”

“왜요?”

“혜린씨가 제게 딱 맞는 책을 골라줄 테니까요.”

“제가 책을 골라드리나요?”

“네, 그러면 제가 답례로 혜린씨에게 커피를 사겠죠.”

“하지만 전 선약이 있는데요.”

“김대리님과?”

“네, 그렇게 들으니 생소하네요. 팀장님은 토요일 오후인데 한가하신가 봐요?”

“뭐 한가하다고 하긴 그렇지만 혜린씨와 커피를 마시는 일이라면 바쁜 스케줄도 한가해질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근데 어쩌죠, 제 스케줄은 팀장님과의 커피 때문에 한가해지지 않을 것 같네요. 이 책은 보셨나요?”

“아니요, 하지만 이 책을 보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죠. 제게 조금 어렵지 않을까요?”

“글쎄요, 바둑 한 판 둔 걸로 실력을 판단하긴 어렵지만 충분히 보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게다가 해설이 있으니 괜찮을 거에요.”

“보다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면 그때는 커피를 대접하며 물어도 될까요?”

“마침 그때 제가 한가하다면 가능하겠죠. 아, 잠깐 전화 좀 받을게요.”

“네.”

혜린은 들고 있던 작은 가방의 옆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까맣고 슬림한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하고 있었고 작은 화면에 기영의 사진과 함께 그의 번호가 찍혀있었다.

“여보세요.”

혜린이 지훈을 의식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혜린아 나야.”

기영의 평소와 다른 목소리에 그녀는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응, 무슨 일이야?”

“저기, 나 오늘 못 나갈 것 같아.”

“왜?”

“지금 설명하기는 너무 길고, 내일 시간 괜찮아?”

“내일은 나 바쁜데.”

“아무튼 그럼 다음에 만나서 설명해줄게.”

“갑자기 무슨 일인데? 지금 말해주면 안 되는 거야?”

혜린이 지훈에게서 멀리 떨어지며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만나서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무튼 미안, 오늘 좋은 하루 보내.”

“알았어. 그럼 다음에 얘기해.”

혜린이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하며 핸드폰을 닫았다.

“저는 주로 아메리카노 마셔요, 혜린씨는 뭐 드시겠어요?”

지훈이 계산대 앞에 서있는 서너 명의 사람들 뒤에 줄을 서며 물었다.

“저도 아메리카노 좋아해요.”

“설탕이나 시럽은요?”

“안 넣죠.”

“저도 안 넣어요.”

“커피가 달면 깊은 맛이 없어지니까요.”

“게다가 적당한 쓴맛은 마음을 가라앉게 해주고 머리를 맑게 해주죠.”

지훈의 말을 들은 혜린이 흠칫 놀라며 그를 보았다.

그것은 평소에 그녀가 커피를 마시며 자주 생각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먼저 자리잡고 있으면 제가 받아갈게요.”

조용히 생각에 잠긴 그녀에게 지훈이 말했다.

잠시 후 커피를 내려 놓은 그가 혜린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커피를 들어 후 입김을 불며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그의 표정에 흐뭇한 기분이 묻어났다.

“저 정말 궁금한 게 있었는데, 물어봐도 돼요?”

잔을 내려놓은 지훈이 그녀에게 물었다.

“네.”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프로기사로 사는 건 어때요?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많이 만나보고, 대화도 할 기회가 있었지만 프로기사는 정말 드물잖아요. 게다가 그 삶은, 우리 같은 바둑인은 그저 상상할 수 밖에 없거든요.”

“프로기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 해봤어요?”

“네, 했었죠. 바둑에 빠진 나머지 다른 것들은 모두 팽개친 적도 있었고요.”

“어떨 것 같아요? 프로기사가 된다면.”

“큰 승부를 하는 것이 일상이니 인생이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아요. 하루 종일 바둑만 두고 있어도 아무 걱정 없겠죠? 전 바둑이 좋아서 정신 없이 두다 보면 나중에 흘러간 시간이 아까워 후회한 적이 많았거든요.”

“사실 저 그 질문 정말 많이 받아요. 프로기사의 삶은 어떠냐는 거요. 처음엔 그냥 그게 궁금하신가 보다, 알고 보면 크게 다를 건 없는데, 워낙 베일에 쌓여 있으니 그런가 보다 했어요. 그래서 전 최대한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프로기사도 힘든 점이 많고, 인간적이고 겉으로 보여지는 것과는 다르다는 걸요. 근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정답이 아니더라구요.”

혜린이 말을 마치자 지훈이 계속하라는 듯한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둑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누구나 프로기사에 대해 어떤 환상을 갖고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어요. 저마다 생각하는 이상향은 다르겠지만 어쨌든 그 분들은 그 환상을 확인하고 싶어하지 깨고 싶어하시는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전 우습게도 그 환상을 깨드리려고 무던히도 노력한 결과가 되어버렸죠.”

“하지만 진실을 아는 것이 나쁘다고 할 수 있나요. 사람들이 혜린씨에게 그런 질문을 할 때 그런 생각을 한다 하더라도, 혜린씨가 그걸 위해 거짓말을 하길 바라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요.”

“어린이들에게 산타 할아버지가 있다고 가르치는 걸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에요. 그렇죠?”

“그야 물론이죠.”

“어른이라고 꼭 모든 일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왜 아이들만 꿈을 꿀 수 있어요? 전 어른도 자신만의 꿈과 환상을 지켜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전 진실이 알고 싶어요. 생각해 보니 제가 프로기사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에요. 그래도 현실이 궁금해요. 산타 할아버지를 잃어도 후회하지 않을게요.”

“정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궁금한 걸 물어보세요.”

“시합이 없을 때는 어떻게 지내요?”

“이거 꼭 인터뷰하는 기분이네요.”

혜린이 웃으며 말하자 지훈이 따라 웃었다.

“음, 프로기사 연구회, 리그전에 나가거나 다른 일을 하겠죠.”

“어떤 다른 일이요?”

“바둑을 가르칠 수도 있겠고 취미 생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 개발을 할 수도 있겠죠. 예를 들면 어학을 배운다던 지.”

“혜린씨는 취미가 뭐에요?”

“음, 영화 보고, 책 읽고……사람 만나서 이야기 하는 것도 좋아해요. 팀장님은요?”

“제겐 바둑이 취미죠.”

“다른 취미는 없어요?”

“글쎄요, 여행? 수영도 가끔 하구요.”

“네. 그럼 이제 제가 물어볼게요. 대기업의 샐러리맨으로 사는 건 어때요?”

“그냥 살만 해요. 돈도 적당히 즐기고 살 만큼 벌 수 있고, 일이 힘들고 치열하긴 하지만 아주 못 할 일은 아니죠. 근데 저는 이런 질문 처음 받는 것 같은데요?”

“학교 다닐 때, 전 다른 친구들과 너무 달랐어요. 항상 바둑이 우선이고 학교는 그 다음이었으니까요. 반 아이들은 저를 바둑이라고 부르면서 특별히 대했어요. 그리고 부러워하는 친구도 많았죠. 근데 저는 다른 친구들이 부러웠어요. 제게는 그 아이들의 삶이 특별한 것이었으니까요.”

“가끔 연예인들의 인터뷰를 보면 평범한 삶을 동경한다는 말을 하던데, 거의 그런 식이네요.”

“평범한 삶이라는 게 정말 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한번 사는데,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인생이라고 해서 평범하다고 할 수 있을지……”

혜린이 말꼬리를 흐리며 커피 잔을 들었다.

하지만 그녀도 지훈도 그녀가 한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한동안 각자의 생각에 깊이 빠진 듯 아무 말없이 커피만 마셨다.

혜린은 지훈과 이야기하면서 기영과의 관계에선 느끼지 못했던 긴장감을 느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이 뜻밖의 만남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저녁때쯤이 되자 지훈이 그녀에게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고 제의했지만 혜린은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와 더 이상 깊어지지 않고 지금의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싶은 것이 그녀의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지훈의 표정엔 아쉬움이 역력했지만 교육받은 신사답게 그녀의 뜻을 존중해주었다.

그리고, 다음엔 저녁을 함께하겠다는 말을 듣는 것을 잊지 않았다.